[연중 제11주간 토요일]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는 우상을 섬기던 요아스 임금과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경고를 전하다 죽는다. 아람 군대가 쳐들어 온 뒤 요아스는 신하들의 모반으로 살해된다. (역대하 24,17-25)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마태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예언자 즈카르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역대24,17-25)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17~19)
여호야다 사제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장례에 대하여 기술한 역대기 하권 24장 15~16절에 이어지는 역대기 하권 24장17~19절은 여호야다 사제가 죽은 직후의 요아스의 타락과 우상 숭배에 대하여 보도한다.
요아스왕의 정신적 지주였던 여호야다 사제가 죽자 요아스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상실한 배처럼 산같은 파도에 흔들리고 풍랑을 따라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일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주위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하느님 앞에서 일관되게 선(善)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여호야다 사제에게 의존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까닭에 여호야다 사제가 그에게 영향을 미칠 동안에는 우상을 척결하고 성전을 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지만, 여호야다사제가 죽고 악한 자의 마수가 그의 목을 잡는 순간부터는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한편 역대기 하권 24장 17~22절은 요아스가 하느님의 집을 버리고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데에 대해서 하느님의 책망의 말씀을 전하는 즈카르야 예언자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죽인 사실이 기록되어 나온다. 그런데 병행 본문인 열왕기 하권 12장에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 달리 요아스의 추악한 부분까지 낱낱이 기록한 것은 아람 군대에 의한 요아스의 대패(2역대24,23~24절)와 신복들에 대한 암살(2역대24,25~26)사건이 하느님을 버린 자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후대의 독자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어제가 어떠하였든지간에 오늘 하느님 앞에 바로 서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넘어질 수 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대신들'에 해당하는 '사레'(sare)의 원형 '사르'(sar)는 본래 '주권을 소유하다', '통치권을 행사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사라르'(sar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기본적으로 '통치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무려 369회나 사용된 이 단어는 '장관', '감독', '족장', '귀족', '방백', '신하' 등등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번역에 나타나는 '사르'의 공통점은 한 나라의 왕은 아니지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지고 어떤 지역을 다스리는 상당한 권력자라는 사실이다.
여호야다 사제가 죽은 후에 요아스 왕에게 찾아온 유다의 '사르'들은 당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로서 여호야다 사제의 생존시에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죽이고 있다가 여호야다 사제 사후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세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의'로 번역된 '알레헴'(allehem)은 '그들에게' 또는 '그들을 향하여'라는 의미인데, 왕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부추긴 인물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었던 것이다. 또한 '말을 듣게 되었다' 로 번역된 '샤마으'(shamah)는 주의를 기울여 듣고 따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요아스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말을 아무런 비판 의식도 없이 듣고 따름으로써 남부 유다 왕국 전체를 타락의 길로 몰아가고 말았다.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주체가 요아스 왕을 비롯한 남부 유다 백성 전체임을 보여준다. 특히 왕으로 즉위하여 하느님의 집을 수리하는 데 열정을 바쳤던 요아스는 이제 스스로 그 성전을 버리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이로 인해 백성들 전체도 하느님의 집을 버리게 되었고, 더 나아가 선민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몰아낸 그 자리에 우상을 얹혀 섬기는 일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요아스 왕 당시 하느님의 진노가 요아스 왕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와 그로인해 우상숭배에 빠진 남부 유다 모든 백성들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진노'에 해당하는 '케체프'(qetseph)는 구약 성경에서 범죄한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흔히 쓰인다(민수17,11; 1역대27,24).
역대기 하권 24장 24절에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는 진술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하느님의 진노는 아람 군대의 침략으로 가시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하느님의 진노는 요아스와 백성들이 하느님의 집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한 바로 그날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경계가 충분히 행해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2역대24,19.33).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언자들'으로 번역된 '네비임'(nebiim)은 '나비'(nabi)의 복수형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단 한 명의 예언자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이다. 이렇게 보내어진 예언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역대기 하권 24장 20~22절에 기록된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였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실 때마다 요아스와 백성들이 듣지 않는 강퍅함을 보였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요아스와 백성들의 거듭되는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상당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돌이키려고 부단히 애쓰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한 여러가지의 경계를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주시는 자비와 인내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증언하였지만'으로 번역된 '와이야이두'(waiyaidu)의 원형 '우드'(wud)는 본래 '반복하다','거듭 행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확고한 진리를 반복적으로 진술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진리를 확실히 알게 할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신명8,19; 1열왕21,10).
그러니까 여러 명의 예언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동일한 경고를 발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아스와 백성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에 해당하는 '우일로 헤에지누'(uilo heezinu)는 '듣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티다'라는 뉘앙스를 나타낸다.
예언자들의 증거와 경고가 거듭되는 동안, 요아스와 백성들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회개하라는 세미한 음성이 들렸지만, 이미 어둠의 마수에 사로잡힌 그들은 세미한 음성까지도 억누르면서 예언자들을 배척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악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자세이다.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6,24-3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4)
마태오 복음 6장 24절은 하늘 나라의 시민된 자가 재물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기록한 마태오 복음 6장 19~24절의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재물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지 양자택일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섬기다'에 해당하는 '둘류에인'(douleuein; serve)의 기본형인 '둘류오'(douleuo)는 '종', '노예'라는 뜻을 지닌 '둘로스'(doulos)와 같은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서, '종으로서 예속되다', '노예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는다.
즉 노예는 그 목숨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주인의 명령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당시 상황을 염두에 볼 때, 이것은 종이 목숨을 바쳐 섬길 대상은 절대로 하나 이상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한편, '재물'에 해당하는 '마모나'(mamona; mammon; money)의 원형 '맘모나스'(mammonas)는 히브리어로 '믿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멘'(amen)과 같은 어근을 갖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신뢰하는 자'라는 뜻을 갖는다.
고대로부터 재물은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며 집요하게 추구하여 왔던 것 중에 하나이므로, '맘모나스'(mammonas)는 '재물'과 동의어으로 쓰였다. 영어의 '재물'을 뜻하는 '맘몬'(mammon)이 이 단어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이 '재물'이라는 단어를 의인화시켜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 '재물'이 충분히 사람들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송영진 모세 신부
6월 18일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걱정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걱정’을 ‘집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집착은 사실상 재물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서
신앙생활도 잘하면 좋지 않은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될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느님을 섬기려면 ‘하느님만’ 섬기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재물을 하느님과 함께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재물과 같은 등급으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또는 재물을 하느님과 같은 등급으로 격상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죄입니다.)
2)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자기 자신이 먹고사는 문제만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하느님의 뜻과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 혼자서만 먹고살려고 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나의 배고픔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배고픔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는
기도문에서
‘저희’ 라는 말이 뜻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먹더라도 함께 먹어야 하고, 굶더라도 함께 굶어야
합니다.
3)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하지 마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일은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하느님의 권한으로,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까지
인간이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말씀도,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까지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을 주실지 안 주실지,
즉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또는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 라는 말씀을,
“더 잘 먹고 더 잘
입으려고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음식을 먹을까, 저 음식을 먹을까?” 라고 고민하지도 말고,
또
“오늘은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라고 고민하지도 말라는 것.)
그런 고민과 걱정은 ‘있는 자들’의 사치스러운
고민이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5)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자기가 할 일은 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 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보험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도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하느님께서 먹여 주신다고
믿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을 때,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땅에 내린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일과 그것을 음식으로 만드는 일은
백성들 자신들이 스스로 했습니다(탈출 16,17.23).
말하자면 그들도 노동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