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화요일]황금율 (마태 7,6.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화요일 제1독서 (2열왕19,9ㄴ-11.14-21.31-35ㄱ.36)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31)
열왕기 하권 19장 30절에 '유다 집안의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다시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라고 나오는데, 남부 유다가 앗시리아의 침략으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번영된 미래가 있으리라는 보장을 하느님이 하신다.
이러한 남부 유다의 회복을 대구법을 사용하여 19장 31절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남은 자'는 '생존자'와, '예루살렘'은 '시온산'과 각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열왕기 하권 18장 13-16절과 관련된 앗시리아의 비문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은 남부 유다 1차 침입시 약 20만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 2차 원정에서도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포로로 잡혀갔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본문에서 '남은 자'와 '생존자'는 이러한 난리를 피해 예루살렘성 안과 시온산으로 피한 자를 지칭한다.
이들이 예루살렘과 시온산에서 나온다는 것은 앗시리아가 물러갈 것을 감안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들이 더 이상 은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각자의 처소로 돌아가게 된 상황을 나타내 준다.
한편 '남은 자'에 해당하는 '셰예리트'(sheerith ; a remant)는 30절에서 '남은 자'로 번역된
'한니쉬아라'(hanishiara)와 마찬가지로, 그 어근은 '남다'란 뜻의 '샤아르'(shaar)이다.
이것은 모두 일차적으로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남부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에서 '남은 자'는 어둡고 망가진 세상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순종하여 그를 떠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남은 자'에 대한 결정적인 신학적 계시가 나오는 성경 말씀은 로마서 9장 27-29절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남은 자' 사상은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용어로서,
이것은 현실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베풀기로 정하신 은혜에 기초하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구원의 진정한 수혜자들을 의미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일차적으로 앗시리아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남부 유다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상황을 예언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죄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신약의 백성들까지 염두에 둔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본문은 '남은 자'와 '생존자'가 난리를 피해 숨어 있다가, 앗시리아가 퇴각하자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구원 사건이 전적으로 '주님의 열정'에 근거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주님의 열정'에 해당하는 '키느아트 예흐와'(qinath yehah)란 표현이 이사야 예언서 9장 6절과
37장 32절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선택하여 세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신실하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열정'으로 번역된 '키느아트'의 원형 '키느아'(qinah ; zeal)는
본래 '시기'나 '질투'를 의미하는데(잠언6,34 ; 에제8,3 ; 즈카1,14),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셔서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강한 시기심 내지는 질투심을 갖고 계심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주님의 열정'은 당신 백성들을 향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역설적 표현이다.
그리고 '주님의 열정' 앞에 붙은 '만군의'로 번역된 '체바오트'(tsebaoth)는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약속에 더하여 이러한 표현을 덧붙이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택하신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는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Almighty)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세 가지 가르침>송영진 모세 신부
1)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
타락한 자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는다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나 타락한
자들이
하느님(예수님)을, 또는 말씀과 복음과 성사 등을 모독하는 것을 뜻합니다.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억압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 주었더니 믿고 구원을
받기는커녕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독하고 더욱 심하게 박해를 하는 것.)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이라는 말과
‘마땅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마태
10,13).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지 않은 자들’이 바로
하느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자들이고, 그들이 개들과
돼지들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또는 겉으로는) 그것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단 복음을 전해주긴 하는데,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는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거부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하고 설득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요하듯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음이 우러나와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가는
나라입니다.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인지 먼저 신중하게 판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사를 집전할 때에도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실적을 올리려고 예비신자 교리 교육을 충분히
하지도 않고 함부로 세례를 주거나,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주거나... 그런 일은 옳지 않습니다.
(혼인성사, 견진성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심판과 멸망을 상징합니다.
복음이란,
받아들여서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즉 개들과 돼지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을 선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개들과 돼지들로 전락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빠지는 것,
또는 성경책이나 성물들을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을, “너희가 먼저
사랑하여라.”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2,37-40).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여라.”가 아니고,
“사랑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여라.”입니다.
즉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주어라.”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경우에, 사랑을 준만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왜 나는 주기만 해야 하는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또 준 대로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이 말씀에서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씀에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하지 않더라도”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네가 의로움을(자비를) 실천해서 부활하게 될 때에
하느님께서 너에게 보답하실 것이다.” 라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받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또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문과 그 문으로 가는 길은
당연히 아주 넓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문이 원래 좁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 사람들이 좁다고 생각하는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그 문과
길을 좁다고 생각할까?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기는커녕 힘들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즉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재미있고, 쉽고, 편하기 때문에 넓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편하고 쉽고 즐거운
쪽으로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긴 하지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 본성을 억제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다수결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간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길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만,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간 그 길만 가야 합니다.
화요일 복음 (마태7,6.12-14)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6)
마태오 복음 7장 1~4절은 타인에 대한 무책임한 심판(비판)을 금하고,
마태오 복음 7장 5절은 자신의 과오를 먼저 해결한 후에 사랑을 가지고
타인의 결점을 지적하여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7장 6절은 비록 상대방에 대한 무책임한 비판을
금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죄악에 대해서까지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죄와 구별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개들'에 해당하는 '퀴신'(kysin; dogs)의 원형인 '개'로 번역된
'퀴온'(kyon)은 팔레스티나에서 야생 상태로 생활하는 사납고 더러운 짐승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이교도들이나(마태15,26; '강아지들')
신도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유다인들(필리3,2; '개들') 또는 거짓 예언자들을
(묵시22,15; '개들')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태오 복음 7장 6절에서도 타락하여 복음을 훼방하며 진리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완고하며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고 본다.
개들이 '거룩한 것'에 해당하는 '토 하기온'(to hagion; what is sacred;
what is holy)의 가치를 모르는 것과 같이, 이들 역시 복음의 가치를 몰라서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훼손하려 들 것이므로, 이들에게는
복음조차 전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는 문장도 앞의 문장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반복되는데, 그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는 문장의 기교가 사용되었다.
'너희의 진주'에 해당하는 '투스 마르가리타스 휘몬'(tous margaritas hymon;
your pears)는 '거룩한 것'에 해당하는 '토 하기온'(to hagion; what is sacred)과
같은 의미이며, '돼지들'에 해당하는 '토 코이론'(to choiron; pigs)은 '개들'에
해당하는 '토이스 퀴신'(tois kysin; dogs)과 같은 의미이다.
돼지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로 취급되어 식용이나
사육이 금지되었기에, 여기서는 야생 상태의 맷돼지로 볼 수 있다.
팔레스티나의 야생 맷돼지들은 매우 사나워서 사람들을 어금니로 받고,
발로 짓밟아 해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7장 6절은 진주와도 같은 고귀한 천국의 복음을
그 가치도 모르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사나운 자들에게 전하면,
돼지와 같은 자들은 복음을 팽개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전하는 자들까지
해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타락한 자들에게는 아예 복음을
전하지도 말라는 명령을 거듭 내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