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화요일]원수 사랑 (마태 5,43-48)

2016. 6. 14. 오전 5: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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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화요일]원수 사랑 (마태 5,43-48)



엘리야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아합과 이제벨에게 주님의 재앙을 전하는데,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주님께서 재앙을 미루신다. (열왕상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시편 51(50),3-4.5-6ㄱㄴ.11과 16(◎ 3ㄱ 참조)
◎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돌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없애 주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제 혀가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이르신다.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합의 최후

 연중 제11주일 화요일 제1독서 (1열왕21,17-29)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27~29)

 

열왕기 상권 21장 20~26절까지는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아합과 이제벨을 향한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 신탁과(20~24), 저자가 아합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을 부연하여

밝힌(26, 27절) 내용이 기술되었다.

 

이어지는 21장의 마지막 단락인 27~29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 신탁을 들은

아합의 회개와 그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 유보 사실을 기술한다.

 

그 중에서 본문은 다섯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의 회개하는 행위

마치 눈 앞에서 이루어 지듯이 자세히 묘사된다.

 

옷을 찢거나(2사무13,19; 욥기2,12,)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는 행위

(굵은 베로 몸을 동이는 행위; 2열왕6,30)는 전형적인 회개의 모습이었으며,

단식을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자기 부인의 표현이다.

 

그리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니는 것 행보를 천천히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근신의 표시로 일상생활 모두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내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렇게 아합이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는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는 자였다.

백성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여 파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22절)

자신이 돌보아야 할 백성인 나봇을 탐욕으로 인해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아합에게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어 심판 실행을 유보하여 주신다(29절).

 

이처럼 극악무도한 아합의 회개까지도 받으시는 하느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죄인이 회개할 때에는

죄인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때의 아합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아합의 모습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아합은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에 의해 자신에게 임할 재앙이

자신을 비켜 아들의 시대로 옮겨가자, 몇 년이 못 되어 다시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아람과 전쟁을 벌이다가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22,37.38).

 

즉 엘리야가 먼저 선언한 대로 그의 가문 전체의 파멸은 일시적으로나마

그가 보인 겸손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로 잠시 유보되었지만,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아합 개인에 대한 심판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은 아합 이후 아하즈야를 거쳐

요람 시대에 예후의 쿠테타로 성취되어진다.

 

'그 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28)

 

아합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또 다른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첫번째 신탁 나봇을 죽이고 그의 기업인 포도밭을 강탈한 아합왕과

그의 일가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으나, 본절 이하에 나오는

두번째 신탁 심판을 유보하신다는 메시지였다.

 

아합 같은 악인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진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따라서 내려지는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성품에 근거해서 내려지는 신적 자비이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이사42,33; 마태12,20)

죄인이 죄를 떠나 회개하면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29ㄱ)

 

의문문으로 되어 있는 본문은 죄인이 하느님 앞에 회개하여 돌아오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잘 드러내준다(루카15,7).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유발했던 행위를 나타내는 새 성경의 '(자신을)낮춘 것'

(겸비, 겸손)에 해당하는 '니크나으'(niknah)의 원형 '카나으'(kanah)

'무릎을 꿇다','엎드리다' 라는 의미이며, 본문처럼 수동형일 때에는

'낮아지다'(2열왕22,19),'뉘우치다'(2역대32,26)라는 의미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이 하느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하느님 앞에 낮아져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이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한편, 본 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비가 부각되는 내용이 수록된 것은

저자가 본장에서 강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속한 당시의 상황과 이를 일차적으로 읽을 대상들,

즉 하느님의 징계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독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서 저자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은 죄로 인한 것임을

아합의 범죄와 이에 대한 심판 선언을 통하여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심판 선언 이후에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같은 본문의 결말은 궁극적으로 이를 읽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29ㄷ)

 

본문의 '그의 아들' 요람을 지칭한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의 활에 맞아

전사하여 나봇의 밭에 던져지게 된다(2열왕9,21~26).

 

한편, 이렇듯 아합의 죄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부당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아비의 죄로 인해 죄의 책임을

자손들에게 전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불의한 아비로 인해

의로운 자손을 처벌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심판 예언은 하느님께서 아합의 아들이 어떤 인물임을

이미 알고 계셨고, 아버지의 악한 영향을 받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당신이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같은 일들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심판의 시기를 유보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받아들이는 아합의 아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합이 회개를 통해 가문이 멸절되는 심판을 유보받은 것처럼

이를 전해 듣는 아합의 아들 요람도 그의 아버지와 같이 회개하였다면,

그 심판은 지속적으로 유보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1주일 화요일 복음 (마태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3)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4)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겐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5)

 

마태오 복음 5장 43절'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문장은 '그리고'라는 접속사 '카이'(kai; and)를 사이에 두고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사랑해야 한다''아가페세이스'(agapeseis) '미워해야 한다'

'미세세이스'(miseseis)대칭을 이루고, '네 이웃을'에 해당하는

'톤 플레시온 수'(ton plesion sou) '네 원수는'에 해당하는

'톤 에크트론 수'(ton echthron sou)대칭을 이룬다.

 

그래서 문장 구조를 보아서는 '네 아웃을 사랑하는 것'만큼 '네 원수를

미워하는 것'동일하게 비중을 지니는 가르침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으며, 이민족과 반민족자인

동족들이 압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공통의 적으로 생각하고

증오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지적하시며

이웃 사랑의 새 기준을 제시하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5장 44절'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에서 '사랑하여라'

해당하는 '아가파테'(agapate)는 앞절의 '사랑해야 한다'에 해당하는

'아가페세이스'동일한 단어이며, 원형은 '아가파오'(agapao)이다.

 

'아가파오'(agapao)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자기 희생적인 순수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실 아담과 하와의 본성으로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이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그 원수에 대하여

본성과 계산을 뛰어넘어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하느님께서 몸소 들어 오셔서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이 자신에게 임한 체험을

가진 자만이 확신을 가지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에서 '기도하여라'

해당하는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을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스'(pros)'기도하다', '원하다'는 뜻의 '유코마이'(euchomai)

합성어로서, '~을 위하여 간구하다'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서 지체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원수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인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에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천국 시민인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이 수준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5장 4절'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에서 순수한 영이신 하느님의 편재성(偏在性)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으로서 유한한 인간과는 다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녀'에 해당하는 '휘오이 푸 파트로스'(hyoi tou patros;

the sons of Father; the children of Father)에서 '투 파트로스'

(tou patros)'아버지의'라는 뜻을 지닌 소유격이다.

 

희랍어에서 소유격은 그 속성을 나타내어 '아버지를 닮은 아들',

'아버지의 속성을 가진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림받기 위해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45절믿는 이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서 악인과 불의한 이에게도

은혜를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도

당연히 하느님과 같이 악인과 불의한 이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악인과 불의한 이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일반 은총이다.

 

일반적인 은총이란 악인과 의인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사도14,16.17)

세상 보존 및 상선벌악(권선징악)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로마13,1~4).

 

[매일미사(다해) 16-06-14]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원수를 사랑하여라.>송영진 모세 신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3-45).”


‘사울’이 교회를 박해할 때,
교회와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박해자 사울은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마스쿠스에서 살고 있는 ‘하나니아스’ 라는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사도 9,11-12).”
이 말씀은, “사울에게 가서 안수 기도로 그를 치료해 주어라.” 라는 뜻인데,
“박해자이고 원수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지시입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사도 9,13-14).”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사울은 박해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겠습니다.”입니다.
주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니아스를 설득하셨습니다(사도 9,15-16).
그래서 결국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 기도를 해 주었고(사도 9,17),
앞을 못 보고 있었던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 9,18).
(사울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인데,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박해자를 회개시키고 개종시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니아스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린 일은,
남들은 모르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니아스가 스스로 사울에게 가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만 보면,
비록 박해자였지만 사울은 곤경에 빠져 있는 불쌍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니아스가 실천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일이기도 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니아스가 실천한 사랑의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단히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니아스는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결과를 알고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가 생기기를 ‘기대만’ 하면서 실천합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의 계명이니
주님께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원하는 대로 좋은 결과가 생기지 않더라도 너무 쉽게 실망하지 말아야 하고,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면서 미리 포기해도 안 됩니다.
사랑 실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과 하나니아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원수를(원수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원수 같은 사람’도 이웃이고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찾아간 하나니아스는 사울을 ’형제’ 라고 불렀습니다(사도 9,17).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사실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원수 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5).


사랑 실천의 목적은 ‘하느님 뜻’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랑 실천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박해자가 회개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이고,
우리는 박해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도와주는 것도 한 방법이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꾸짖고 타이를 때 화풀이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몹시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떤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옆에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서 평생 원한과 증오심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원한과 증오심은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계명만 내려 주시고
그 실천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시는 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내려 주신 계명이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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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주님의 기도 (마태 6,7-15)16.06.16조회 63[연중 제11주간 수요일]올바른 자선 (마태 6,1-6.16-18)16.06.15조회 136[연중 제11주간 화요일]원수 사랑 (마태 5,43-48)16.06.14조회 55[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8-42)16.06.13조회 120[6. 11.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선교 (마태 10,7-13)16.06.11조회 148[연중 제10주간 금요일] 간음 죄 (마태 5,27-32)16.06.10조회 50[연중 제10주간 목요일]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16.06.09조회 93[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율법의 완성 (마태 5,17-19)16.06.08조회 146[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세상의 소금과 빛 (마태 5,13-16)16.06.07조회 93[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참 행복 (마태 5,1-12)16.06.05조회 247[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16.06.04조회 476.3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루카 15,3-7)16.06.04조회 48[연중9주 수요일]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마르12,18-27)16.06.01조회 201[연중 제9주간 화요일] 5. 3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루카1,39-56)16.05.31조회 164연중 제9주간 월요일]포도원소작인의 비유 (마르 12,1-12)16.05.29조회 188[연중 제8주간 토요일] 권한 (마르 11,27-33)16.05.27조회 167[연중 제8주간 금요일] 무화가 나무 저주 (마르 11,11-25)16.05.27조회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