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월요일]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1-5)

2016. 6. 20. 오후 8: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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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간 월요일]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1-5)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독서 (2열왕17,5-8.13-15ㄱ.18)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4)

 

열왕기 하권 17장 3절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많은 예언자와 선견자들이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 백성에게 하느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이어지는 열왕기하권 17장 14절은 단순히 율법을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많은 선견자까지 보내어 거듭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듣지 않고 완고하게 거부하였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 열왕기 하권 17장 13절의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17장 14절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17장 14절의 서두에 나오는 '않고'로 번역된 '웰로'(wello)는 접속사 '와우'(wau)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 '로'(lo)가 결합된 형태이며, 이어지는 '그들은 듣지'

번역된 '샤메우'(shameu)는 완료형 동사이다.

 

이와같이 부정 부사 '로'(lo)완료형 동사가 사용된 것은

반복되는 하느님의 회개의 요구에 대해 그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17장 15절의 서두에 위치한 접속사 '와우'(wau)가 그 전후 문장이

각각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회개 요구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러나'로 번역되었다.

 

한편 그들은 하느님의 회개의 명령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목을 뻣뻣하게 하다', '목을 굳게 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과 관련해서 인간의 고집, 완악함,

교만 등을 나타내는 성경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탈출34,9; 신명9,6; 2역대30,8).

 

특히 열왕기 하권 17장 14절에서는 목이 뻣뻣한 것

'그들의 조상들'의 모습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의 조상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하였던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해 불순종으로 일관했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따라서 이들과 마찬가지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스스로 목을 뻣뻣하게 한 까닭에, 하느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조상들''하느님을 믿지 않은 자'로 표현된다.

여기서 '믿다'로 번역된 '헤에미누'(heeminu)'지속하다', '받치다',

'머물다'는 의미를 갖는 '아만'(aman)의 사역 능동형이다.

 

'아만'(aman)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면 '의지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열왕기 하권 17장 14절출애굽1세대가 주님과 그의 대리자인 모세를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후손인 북부 이스라엘도 예언자와 선견자들의 권고와

하느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거기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느님의 약속을 저버린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가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1~3)


마태오 복음 6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서 추구해야 하는 

자신 스스로의 경건과 의로움과 관련된 규정을 다루었다면, 마태오 복음 7장

1~6절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대인 관계의 규정을 다루고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크리네테'(me krinete; do not judge)

단도직입적인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니는 명령문이다.


여기서 '심판하지'로 번역된 '크리네테'(krinete)는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명령형은 생활 습관이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할 때 사용되는데,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계속해 왔던 심판하는 일을 그만두고, 심판을 금하는

새로운 생활 기준을 가지라는 말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율법이나 자신들이 만든 계율로 이웃을 단죄하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 혹은 비판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정당한 판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금하는 심판(비판)은 유익하고 지혜로운 선악의 구별이 아니라

이해심이나 동정심없이 상대방을 근거없이 헐뜯는 것을 말하며, 

절대 공의(義)로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말한다(로마2,1~3; 야고4,11.12).


그리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형제를 심판하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사실은 

마태오 복음 7장 1절의 '심판을 받다'에 해당하는 '크리테테'(krithete;

you are judged)수동형이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 단어에서 동작을 받는 대상은 복수 2인칭 으로서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자들이지만, 비판을 하는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불공정하게 심판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단죄하시는 분이

바로 공의로우신 하느님이시라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7장 2절은 마태오 복음 7장 1절의 보충설명이며

재강조의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심판받고'에 해당하는 '크리테세스테'(krithesesthe;  yo u will be judged)의

원형 '크리노'(krino)사사로운 단죄나 헐뜯는 것을 가리키지만,

판결하고 언도하는 사법적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그 되로 받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메트레테세타이'(metrethesetai;

it will be measured)의 원형 '메트레오'(metreo)양이나 길이를 재는 것

가리키는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하여 물건 거래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제적 용어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 7장 2절사법적 용어와 경제적 용어를 사용하여

이웃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자는 동일한 처우를 받게 될 것을 강조한다.


두 단어가 모두 수동태로 사용되어 상대방을 향한 심판과 되질함이

하느님에 의해 자신에게 되돌려질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마태오 복음 7장 3절은 '형제의 눈 속'과  '네 눈 속',  '티와 들보',  그리고

'보면서'와  '깨닫지 못하느냐'가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는 기교적인 문장이다.


'티'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hos; mote; speck)'시들다'는 뜻을 가진

'카르포'(karpho)에서 유래하여 지푸라기나 왕겨 등을 뜻한다.


그리고 '들보'에 해당하는 '도코스'(dokos; the beam; the plank)'받치다', 

'지탱하다'는 뜻이 있는 '데코마이'(dechomai)에서 유래하여 건물을 받치는

기둥, 재목 또는 서까래를 뜻한다.


타인의 조그마한 결점을 상징하는 '티'와  자신의 큰 허물을 상징하는

 '들보'라는 서로 대조되는 단어를 대구시키는 과장법을 통해 교훈이 전달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작은 도덕적 잘못이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결함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들보와 같은 결함은 자신이 가진 죄악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형제에 대하여 사랑이 없는 가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7장 1절과 2절에서는 동사가 복수 2인칭으로 사용된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 7장 3절에서는 동사가 단수 2인칭으로 사용된 것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7장 3절에서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개개인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심정으로 단수 2인칭을 사용하신 것이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송영진 모세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남을 심판함으로써 자기도 심판받게 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종입니다.
임금은 만 탈렌트나 되는 그의 빚을 아무 조건 없이 전액 탕감해 주었는데,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동료가 애원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둡니다(마태 18,30).
그것을 알게 된 임금은 그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임금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합니다(마태 18,34).


그 종이 자기 동료를 감옥에 가둔 것은
임금의 권한을 무시하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심판한 일입니다.
그가 고문 형리에게 끌려간 것은
자기가 심판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된 일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용서할 권한’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일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그 권한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 권한은 사도들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권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 권한을 사용해야 합니다.
‘용서할 권한’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해 주는 권한입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잠시 용서를 보류하고, 꾸짖고 타이르는 권한입니다.
어떻든 두 권한은 모두 심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사도직 수행입니다.


또 마태오복음 18장을 보면,
“(죄인이)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 즉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여라.”인데,
영구적으로 쫓아내라는 뜻이 아니라,
“회개할 때까지 신자 자격을 정지시켜라.” 라는 뜻이고,
역시 회개시키기 위해서 일시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그 일도 심판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형제애’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티’는 작은 결점이나 실수를 뜻하고, ‘들보’는 큰 죄를 뜻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의 큰 죄는 깨닫지 못하고, 또는 감추고,
다른 사람의 작은 결점과 실수를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잘못한 형제를 타이르는 일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다음에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어라.”로 읽을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형제에게 충고하고 권고하는 일은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부터 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형제애를 실천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의 죄인들이고,
함께 구원받아야 할 형제이고 이웃이고 동반자입니다.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고, 서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충고를 듣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갈라티아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갈라 2,11-14).
그때 베드로 사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전후 내용을 볼 때 베드로 사도는 침묵을 지키면서,
겸허하게 바오로 사도의 비난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그의 인품이나 성덕을 생각하면,
그는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오히려 고마워했을 것 같습니다.


만일에 뭔가 잘못한 뒤에 충고를 듣는 입장이 되었을 때,
충고하고 타이르는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보아라.” 라고 반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너나 잘해라.” 라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형제애를 거부하는 일이 되고,
바리사이들 같은 교만한 위선자가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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