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수요일]거짓 예언자 조심 (마태 7,15-20)
힐키야 대사제가 율법서를 발견하고 임금에게 전하자,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은 책에 쓰인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는다.(열왕하 22,8-13; 23,1-3)
그 무렵 8 힐키야 대사제가 사판 서기관에게, “내가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였소.” 하고 말하면서, 그 책을 사판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 9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임금에게 먼저 이렇게 보고하였다.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돈을 쏟아 내어, 주님의 집 공사 책임자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그런데 힐키야 사제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하면서, 임금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11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2 임금은 힐키야 사제, 사판의 아들 아히캄, 미카야의 아들 악보르, 사판 서기관, 그리고 임금의 시종인 아사야에게 명령하였다.
13 “가서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의 말씀을 두고,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님께 문의하여 주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23,1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원로를 소집하였다.
2 임금은 모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 사제들과 예언자들,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큰 소리로 읽어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3 그런 다음에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시편 119(118),33.34.35.36.37.40(◎ 33ㄱ)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
○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
○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
○ 탐욕이 아니라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
○ 헛된 것을 보지 않게 제 눈을 돌려 주시고, 당신 길을 걷게 하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 ◎
○ 보소서, 당신 규정을 애타게 그리오니,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살려 주소서. ◎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시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 그들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하신다. ( 마태오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제1독서 (2열왕22,8-13; 23,1-3)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1)
서기관 사판이 율법책을 읽어주자 요시야 임금은 회개의 자세를 즉각적으로 취했다. 아마도 이것은 사판이 읽어준 율법서의 내용이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예; 신명기28장 15-68절)이었고, 그것이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남부 유다 왕국의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해주었기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들은 율법서의 말씀은 남부 유다 임금이었던 요시야에게 그 어떤 위협보다도 더 심각한 것으로 다가왔고, 결국 이것은 종교 개혁의 불씨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자기 옷을 찢었다'에 해당하는 '와이크라으 에트 뻬가다이우' (waiqrah eth begadaiu)는 계속적 의미의 접속사 '와우'(wau)에 '찢다', '산산조각을 내다', '베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라으'(qarah)의 미완료형이 결합한 '와이크라으'(waiqrah)와 전치사 '에트'(eth) 그리고 '자기 옷을'이라는 뜻의 '뻬가다이우'(begadaiu; his robes; his clothes)가 함께 쓰인 것으로서 '자기 옷을 찢다'라는 관용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요시야 임금이 하느님의 징계와 메시지가 담긴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옷을 찢는 행위는 슬픔이나 분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머리에 먼지를 끼얹거나(여호7,6) 흙이나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행위도 같은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2사무13,19; 에스테르4,1.3; 욥기2,8).
그리고 여기서 율법서에 대한 요시야 임금의 반응을 보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가 율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율법서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고, 다만 율법에 대한 피상적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시 왕실에서의 교육이 비록 율법에 근거한 교육이었다고 하더라도, 율법서를 직접 다루지 않고 그것에 대한 해설이나 세부 적용에 중점을 두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적인 율법서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특히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심판의 막중함에 대해 큰 충격을 받고 옷을 찢는 회개의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겸손하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는 바룩이 가져다준 예레미야의 글이 쓰여진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 화롯불에 태운 남부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사악한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예레36,23).
한편, 열왕기 하권 22장과 이어지는 23장의 전체적인 흐름과 관련해서 율법서의 말씀을 들은 이후 요시야 임금의 반응을 묘사하는 22장 11절의 내용은 이어지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과 관련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이것은 앞서 주님 신앙 재건을 위해 성전을 다시 건립하는 것을 추진하는 것으로 종교 개혁을 시작한 요시야의 태도를 더욱 단호하고 분명하게 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요시야가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남부 유다의 영적인 상태와 현재의 처지, 그리고 정차 닥칠 심판과 관련된 비극적 운명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로 요시야는 주님의 말씀과 의로움에 근거한 단호하고 철저한 종교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성전에만 국한된 재건이, 이후에는 남부 유다 전역과 북부 이스라엘의 영역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단순히 훼손된 성전을 수리하고 재건하는 정도에 국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상을 파괴하고 우상 숭배자들의 뼈까지 찾아내 그것을 불사르는 등 철저하고 대대적인 개혁의 단행을 시도하게 된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마태 7,15).”
‘게걸 든 이리들’이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겉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기들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예언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거짓 사도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거짓 사도들’은 ‘사탄의
일꾼들’이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예언자들’도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놓는 존재입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사도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우리가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왜 우리가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사도들에게 잘 속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사탄은 사탄의 모습으로 오지
않고 천사의 모습으로 옵니다.
자기가 거짓 예언자라고(거짓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사도들은 항상
자기들은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자들을
식별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마태 7,16)”
이 말씀에서 ‘그들이 맺은
열매’ 라는 말은 거짓 예언자들의 활동 결과를 뜻합니다.
어떤 사람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예언자이고 진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릇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가짜이고, 사탄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적
계시들, 사이비 종파들,
또는 어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특히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영성
이론들,
또는 영성 수련 방법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 현혹되어서 교회에서 멀어지고, 신앙을 잃고,
결국 예수님을
등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일입니다(마태 13,19).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태 7,17-18).”
이 말씀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인데,
나무의 경우에는 좋은 나무가 나쁜 나무로 변질되는 일이 없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자주 생긴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배반자 유다는 사도로 뽑힐 때에는 좋은 나무였지만,
마지막에 나쁜 나무로
변질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때에는 나쁜 나무였지만,
좋은 나무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지금 좋은 나무라면 ‘끝까지’ 좋은 나무로 남아서
좋은 열매를 맺어라.” 라는
훈계가 됩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한 사람의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예언자이고 사도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또는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고,
‘사도’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선교활동을 할 의무가 있고,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다 예언자이고 사도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마태 7,19).”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6).”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다고 하면서(선교활동을 하면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복음이 아닌 자기의 생각만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쁜 나무로 추락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20).”
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다시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마지막까지 좋은 나무로 남아 있어야 진짜 좋은 나무다.”
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때 사제였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끝까지 사제로 살다 죽어야 사제인 것처럼
‘마지막까지’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진짜 신앙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