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화요일]풍랑을 가라앉히시다 (마태 8,23-27)

2016. 6. 28. 오전 5: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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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간 화요일]풍랑을 가라앉히시다 (마태 8,23-27)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의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모스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예언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의 날을 예고한다.(아모스 3,1-8; 4,11-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3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4 먹이가 없는데도 사자가 숲 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잡은 것이 없는데도 힘센 사자가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5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6 성읍 안에서 뿔 나팔이 울리면 사람들이 떨지 않느냐?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 7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8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4,11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니,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예수님께 호소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탓하시며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신다.(마태오 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화요일  제1독서 (아모3,1-8; 4,11-12)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4,11) 

아모스서 4장 11절은 아모스서 4장 6절 이하에서 10절까지 계속 제시되는 과거 북부 이스라엘에 행하신 하느님의 다섯 가지 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다루고 있는데, 북부 이스라엘을 포함한 가나안 일대에 내려진 하느님의 심판으로서의 지진을 다루고 있다. 

본문에서 '뒤엎은 것처럼'에 해당하는 '케마흐페카트'(kemahpekath)'뒤엎어 버리니'에 해당하는 '하파크티'(hapakthi)의 원형인 '하파크'(hapak)'완전히 뒤집어엎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인데, 구약 성경에서 여섯 번 사용된다. 

이중에서 이사야서 1장 7절을 제외하고는, 신명기 29장 23절, 이사야서 13장 19절, 예레미야서49장18절, 50장 40절은 모두 지진으로 말미암아 흔적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소돔과 고모라의 멀망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하파크'(hapak)는 적군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성읍을 묘사하는 단어가 아니고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에 의해 완전하게 파괴된 성읍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대 문헌들을 보면 우찌야 임금이 다스리던 때에 일어났던 지진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티로와 시돈 등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가나안 내륙 지방을 지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옥과 성읍이 땅 속으로 함몰되거나 완전히 무너져 내려 뒤엎어지고 수많은 사람과 가축들이 몰살을 당하는 참변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즈카르야서 14장 5절에서 종말론적 심판의 때에 당할 환난을 우찌야 임금 때에 지진을 피하여 달아나던 때처럼 될 것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당시의 지진은 선민 이스라엘과 그 일을 체험한 이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고통과 공포를 안겨준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아모스서 4장 11절상반절 소돔과 고모라의 완전한 파멸을 상기시킴으로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멸을 생생하게 경고했다면, 후반절소돔과 고모라를 뒤덮었던 유황불로 인한 거대한 불길의 이미지를 가져와서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화염에 뒤덮힐 것이라고 비유한다. 

본문에서 북부 이스라엘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서 '나무토막'에 해당하는 '우드'(ud)는 일반적인 나무가 아니고 부지깽이로 사용되는 막대기나 기름을 묻혀 태우는 횃불로 사용되는 몽둥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끄집어낸'에 해당하는 '뭇찰'(mutsal)'구원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나찰'(natsal)사역 수동형 분사이고, 이 분사의 의미상의 주어상반절에서 두 번이나 사용된 주어인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내용은 북부 이스라엘이 재앙으로 인해 성읍이 무너지고 불 속에 던져진 나무토막처럼 새까맣게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완전히 멸망할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에 의해 마지막 구원을 받아 건져지게 됨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모스서 4장 6~11절에 기록된 재앙을 보면, 6절은 양식의 고갈, 7절과 8절은 가뭄, 9절은 농작물이 입은 피해, 10절은 염병과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한 살육의 재앙, 그리고 11절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성읍의 붕괴를 각각 묘사했다. 

전반부의 세 가지 재앙 먹을 양식에 대한 피해가 점점 더 극심해져 가는 내용을 다루었다면, 후반부의 두 가지 재앙죽음의 자리에 던져지는 일이 군대에 갈만한 청년들에게서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는 내용이다.  

아모스서 4장 11절은 이런한 점층적 구조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이다. 이러한 뻔뻔함에 대한 강조는 매 단락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통해 반복 지적되고 있다.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방관치 않고 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예언자를 파견하셨고, 예언자를 통해 죄를 지적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재난이 닥치면 그것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줄어들어 고난을 당하고,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도대체 회개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정말로 목이 뻣뻣하고 낯이 뻔뻔스러운 교만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둘째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시는 모습이다. 하느님께서는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 회개를 염원하시며 당신께 돌아와 그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축복된 삶을 누리도록 무수한 경고와 징계를 거듭 거듭 주셨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와 인내와 기대는 실망으로 계속 이어졌고, 결국 하느님의 오래참음을 멸시한 북부 이스라엘은 아모스서 4장 12절과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연중 제13주간 화요일복음(마태 8,23-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27)

마르코 복음 4장 36절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탄 배를 뒤따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 사람들은'에 해당하는 '호이 안트로포이'(hoi anthropoi; the men)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탄 배를 뒤따랐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마태오 복음 8장 26절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는 장면은 풍랑이 몰아치는 호수 위의 다른 배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놀라워하며'에 해당하는 '에타우마산'(ethaumasan; marvelled)의 원형 '타우마조'(thaumazo)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계시적 행위에 대한 인간의 놀람을 나타낼 때 사용되지만, 존경이나 의아해하는 감정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기이하게 여긴 까닭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와 같은 자연 현상까지도 지배하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시므로 이런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무리들은 놀랍게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당시, '호수' 또는 '바다'가 종종 악(惡; evil)의 상징이며, 악(惡)이 거주하는 장소로 묘사되었다(시편65,8; 107,29-30).

따라서 예수님께서 호수를 복종케하신 사건은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한 시도인 동시에,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시는 구마와 치유의 의미까지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쫓겨나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이 기사 다음에 나오는 기사(마태8,28-34)가 가다라인들의 지방의 마귀들린 자를 치유하는 내용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는 것이다.


[성화]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그리스도

<풍랑을 가라앉히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마태 8,23-24).”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배가 파도에 뒤덮여도(큰 박해를 받아도) 가던 대로 계속 가면 됩니다.


큰 풍랑이 일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모르셨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알고 계셨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무셨을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판단하셨다는 것.
그리고 노련한 어부 출신인 제자들을 믿으셨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주무셨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5-27)”


“주님, 구해 주십시오.” 라는 제자들의 말만 놓고 보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하다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것은 믿음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또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말은,
아직은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었고, 올바른 믿음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 구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믿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겁에 질려서 그냥 한 말이 됩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구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예수님을 비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르 4,38).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계셨고,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셨다는 점,
그리고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알고 계셨다는 점,
예수님께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주무시는 분을 깨우지 말고 계속 노를 저었어야 했습니다.
믿음이란, 살고 죽는 것은 주님께 맡기고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든 주무시다가 제자들 때문에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셔서 고요하게 만드셨는데,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셔서 주무셨다면,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신 일은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의 믿음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일로 해석됩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올바르게 깨닫도록 계시하신 일.)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배를 교회로, 풍랑을 박해와 시련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배를 우리 인생으로,
그리고 풍랑을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로 해석하면서,
“예수님은 그런 고난과 시련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는 분”
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초보적인 해석입니다.
이 이야기의 진짜 가르침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8).”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풍랑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어하셨으면 더 좋았지 않은가?
왜 거센 바람과 큰 파도가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고난과 시련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는 것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고난과 시련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우리가 예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 자체가 예수님의 뜻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다가
우리가 애원하면 그때서야 알게 되셔서 도와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를 항상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주님께 그것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보호와 사랑을 우리 쪽에서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우리의 약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단련으로 받아들이거나,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살고 죽는 것을 포함해서 모든 일의 결과를 주님께 맡겨 드리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고난과 시련에서 육신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겪는다고 해도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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