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박해 (마태10,24-33)

2016. 7. 9. 오전 5: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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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박해 (마태10,24-33)

<너희는 육신만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매일미사, 마태 10,24-33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뢴다.( 이사야 6,1-8)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시편 93(92),1ㄱㄴ.1ㄷ-2.5(◎ 1ㄱ)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다. (마태오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이사6,1-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1~2)
앞선 이사야서 1장 2절~5장 30절은 주님을 배반한 남부 유다를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란 사실과 더불어 주님의 날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주님의 오심과 성전 숯불의 환시를 통하여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서에는 그 예언서를 쓴 예언자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술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예언서의 초두에 이런 사실이 소개되는데 (예레1,1~19; 에제1,1~3.15), 이에 반해 이사야 예언서에는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이며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 미뤄졌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느님의 종이며, 그의 메시지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로도 볼 수 있다. 

먼저 이사야서 6장 1~3절은 이사야에게 예언자로서 소명을 주신 주님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가 성전 위에 높이 들리고 사람들이 에워싼 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시점을 밝히는 본문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 일은 남부 유다의 제10대 임금이었던 우찌야가 죽던 해 발생하였다. 그 해는 B.C.739년으로 추정된다. 우찌야 즉 '우찌야후'(uzziyahu) '능력'(1역대16,11),'힘'(탈출15,2)이란  의미의 명사 '오즈'(oz)'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 '주님의 능력'이란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는 '아자르야'(2열왕15,1)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돕다'(여호1,14)란  뜻의 동사 '아자르'(azar)'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서 '주님께서 도우셨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부친 아마츠야에 이어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남부 유다의 왕위에 올라 죽는 날까지 무려 52년 동안 남부 유다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통치 후기에 문둥병이 들어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다가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통치 전반과 중반주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필리스티아와 암몬 등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 땅에 성(城)을 건축하고 암몬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나아가 이집트의 변방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는 등 그 왕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지면서 교만에 빠지게 되어 사제 외에는 들어가지 못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 하였다. 그것이 죄라고 말리는 아자르야 사제의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분향하기를 고집하는 순간, 주님께서 그를 치셔서 그 이마에 문둥병(나병)이 생기게 하셨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왕궁이 아닌 별궁으로 내려 앉고, 나아가 성전 출입을 제한당하였다. 

그런 비참한 말년을 쓸쓸히 보내다가 그의 나이 67세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2열왕15,1~7; 2역대26,1~23).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받은 소명은 그가 예언자 직분을 시작하면서 받은 소명이 아니라 예언자 직분을 수행하던 중간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소명임이 분명하다. 즉 본장에 나오는 소명과 별개로 이사야는 과거에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굳이 이를 따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본장의 내용만으로도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예언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1인칭 단수를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 주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증거를 많이 한다. 아합과 여호사팟 임금 당시의 예언자 미카야가 그랬고(1열왕22,17.19-23), 즈카르야 예언자(즈카1,8), 에제키엘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 등이 그러했다. 

이와 같은 1인칭 단수의 사용 그들 각자가 보았다고 하는 환시의 신빙성의 무게 더해준다. 제3자의 경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직접 기술한 것이기 떄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나는 보았는데' 해당하는 '와에르에'(waereh)계속적 용법으로 사용된 '와우'(wau)에 동사 '라아'(rah)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것은 우찌야 임금이 죽은 직후에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사실 그 때에 일회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사야서 1장 1절에는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것이 '하자'(haza)동사를 통해 표현된 반면에, 후자 실제적으로  실체를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바라봄으로써 실제적으로 이를 체험하여 아는 것과 관련된 표현인 것이다. 

즉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본장에서 경험한 주 하느님의 천상의 모습과 그에 바탕을 둔 그 자신의 죄의 용서에 관한 환시 그에게 있어 현실적인 일처럼 분명히 나타났음을 강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 하느님이었다. 이같은 장면은 아합 임금 당시 예언자로 활약한 미카야의 증언에도 나오며 (1열왕22,17.19~23), 욥기에서도 유사한 묘사가 나온다(욥기1,6~12).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물리적인 육체가 없으신 순수한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에게 계시를 주시며, 이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시각적 형상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한편, 본문에서 주어로 제시되는 '주님'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주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인간 세상 뿐 아니라 온 우주를 권능으로 주관하시는 주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 바로 '아도나이'인 것이다. 

그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그 어떠한 세력도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이 세상을 통치하심을 나타낸다.

특히 '앉아 계시는' 해당하는 '요셰브'(yosheb)오래 동안 머물러 있거나 거주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야샤브'(yashab)능동태 분사형으로서 주님의 왕적 통치가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통치는 인생사의 영고성쇠와 관계없이 계속되어 왔고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원한 임금되심과 항구적인 통치의 면모과거에 위대한 임금으로 통치하다가 범죄로 징계를 당해 비참한 신세에 떨어지고, 결국 죽어 무덤에 돌아간 인간 임금 우찌야의 면모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의 옷자락' 해당하는 '슐라이우'(shulayu)의 원형 '슐'(shul)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좌우 손목 부분의 옷자락을 비롯하여 발을 덮어 가리는 옷자락까지 모든 부문의 옷자락이 길게 늘어뜨러져 성전을 가득 덮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의 위엄과 권능이 온 세상을 덮고 있음 의미한다. 이러한 주님의 권능 앞에 모든 피조물은 굴복하고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성전' 해당하는 '하헤칼'(hahekal)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지금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이며 천상의 상황이기 떄문에 이 문맥에서는 천상에 있는 주님의 궁전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성전과 관련지어 이사야가 성전에 있었으며,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옷자락은 분향 제단으로부터 올라간 연기가 성소 안을 가득 채운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설한다. 그러나 그가 현재 성전에 있든 그렇지 않든, 그가 환시 중에 목도한 것은  성전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영광중에 거하시는 천상의 거소로 보는 것이 문맥상 보다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2) 

이사야서 6장 2절과 3절은 하늘의 사자들이 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사랍들'에 해당하는 '세라핌'(seraphim)'불타다'(예레51,3)란 뜻의 동사 '사라프'(saraph)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 '불탐'이란 의미를 지닌 '사라프'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세라핌' 문자적으로 '불타는 것들'이란 뜻을 지닌다.

천사들에 대하여 이러한 명칭이 주어진 것은 부정한 것을 불로 태워 없애는 것처럼 그들이 거룩하고 순결한 존재이며, 또한 불꽃처럼 화려하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사랑을 상징한다.




중 제14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10,24-33)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는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28~30)

마태오 복음 10장 28절하느님과 사탄의 능력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사탄의 한계점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지도 파멸시키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욥기 1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육신 역시 하느님의 허락없이는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이 사탄의 한계인 것이다.

오늘 말씀이 박해와 그로 말미암은 고통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사탄이 주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육신'에 해당하는 '소마'(soma)에까지 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영혼'에 해당하는 '프쉬케'(psche)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다.

오늘 말씀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며, 참 두려움의 대상은 사탄이 아니고 바로 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또한 복음 전파자들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을지라도, 그러한 적대자들이 주는 고통과 박해는 그들의 육신에 까지밖에 미치지 못하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이라는 표현에서 '멸망시키다'는 뜻으로 사용된 '아폴뤼미'(apollymi; kill)라는 단어는 '없어지다', '사라지다'는 뜻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것을 굳이 하느님께서 영혼을 멸망시키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사물에 대하여 사용될 경우에 '없어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인격적 존재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없앤다는 뜻보다는 존재의 가치를 없앤다는 뜻이 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옥의 형벌에 대한 과장법적 서술로 보아야 한다. 

복음 전파자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잃어도 그의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므로, 그의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하지만 사탄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분께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는 평안하게 살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참새'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흔하고 값이 나가지 않는 날짐승이었다. 여기서 참새 두 마리 값으로 제시된 '한 닢'에 해당하는 '앗사리온'(assarion;a penny)은 당시 가장 가난한 계층이었던 일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불과한 돈이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가장 하찮은 날짐승조차도 당신의 섭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돌보시는 세심하고도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마태오 복음 10장 30절에서 '세어 두셨다'에 해당하는 '에리트 메메나이 에이신' (erith memenai eisin; are numbered)에 있어서 '에리트메메나이'(erithmemenai)수동형 완료 분사이므로, 이미 세신 행동이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머리카락'(머리털; the hairs of head)이 상징하는 것은 앞절의 '참새'처럼 사람의 신체 일부분 중에서 '가장 흔하고 값어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 신체 가운데 가장 가치없게 여겨지는 부분인 머리카락 까지도 이미 모두 세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무수히 많은 뿐 아니라 날마다 빠지고 새로 생겨나 수효가 변하는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실 만큼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아니고, 그만큼 당신 자신이 지으신 인간을 세심하게 보살피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배후에 계시므로, 제자들은 그들이 비록 육신이 찢기고 상하는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박해>송영진 모세 신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8-31).”


이 말씀은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박해자들은 우리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죽음이란,
언제 어떻게 죽든지 간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고,
또 그것이 인생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혼의 멸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도 육신도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만 무서워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만 믿고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이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박해를 허락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박해는, 또 이 세상의 죄악들은
하느님의 허락을 받기는커녕 하느님께 거역하고 반항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허락’이라는 말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박해를 내버려 두시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또 카인의 살인 때부터 시작된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내버려 두셨는가?
또 하느님께서는 왜 카인이 아벨을 죽일 때 내버려 두셨는가?
혹시 모르고 계셨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인간들의 일에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사람 쪽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자유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들을 자유의지 없는 로봇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악인들과 박해자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말과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지금 이 내용은 박해자들과 죄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바로 천벌을 내리시지 않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만일에 ‘사울’이라는 박해자가 교회를 박해할 때,
또는 교회를 박해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바로 사울에게 천벌을 내리셨다면?
그러면 사도 바오로는 없습니다.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혹시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르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모르고 계신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시해버리는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다 보시는 분이고,
아주 세세하게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고...)


그래도 어떻든 신앙인들 입장에서는 ‘박해’는 ‘악’이고,
박해를 받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한 답이 베드로 2서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여기서 ‘여러분을 위하여’ 라는 말은 지나치면 안 되는, 중요한 말입니다.
앞에서 이미 ‘박해자의 입장에서’ 언급한 것인데,
이 말은 ‘그들’이 아니라 ‘나의’ 회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박해자들과 죄인들을 ‘그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박해를 받기만 했지 한 적은 없다.” 라고 말할 신앙인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과연 몇 명이나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사실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신앙생활과 회개는 완전했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이나 그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겸손’이라는 성덕도 갖춘 사람일 텐데,
진짜 겸손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더 반성하고, 더 회개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다시 강조하시는 말씀이고,
믿음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육신의 죽음이 무서워서 박해에 굴복하고, 그래서 심판 때에
‘수많은 참새들’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어서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고 어떤 위험에서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신앙 안에서 개인의 마음의 평화만을 구하거나 세상의 갈등을 회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이 사명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파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 두실 만큼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점은 당신의 힘으로 다 채워 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입술이 더러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타는 숯을 집어 그의 입술을 정화시켜 주시고, 죄를 없애 주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부족하고 죄가 많지만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려는 모든 사도의 마음가짐입니다.



오늘 올해 최고 더위, 서울 32.7도...내일도 폭염

경기 광주 실촌읍이 무려 37.2도까지 치솟으면서 가장 더웠고, 의성 35.2도, 대구 33.9도, 대전 33.1도로 33도를 웃돈 곳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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