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목요일]파견 (마태10,7-15)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부터 사랑하셨으며 그들이 멀어져 가도 멸망시키지 않으시리라고 호세아 예언자는 말한다. (호세아 11,1-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시편 80(79),2ㄱㄷㄹ과 3ㄴㄷ.15-16(◎ 4ㄴ 참조)
◎ 주님,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
○ 만군의 하느님, 어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서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신다.(마태오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제1독서 (호세11,1-4.8ㅁ-9)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는다."(9)
이유의 접속사 '키'(ki)로 시작되는 본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키 엘 아노키 웰로이시'(ki el anoki weloish), 주님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칭대명사 '아노키'(anoki)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화자(話者)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본문은 주님 자신이 사람이 아닌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지칭하는 '엘'(el)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그분은 사람처럼 감정에 압도되어 분별없이 분노를 발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신적 의지와 지혜는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 또한 억제하실 수 있다.
아울러 그분은 오직 정의(공의)로 심판을 내리시지만, 진노 중에도 당신 백성들에 대한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전능하심, 그분의 초월자 되심은 바로 이같은 측면을 견지할 때 보다 선명하게 이해된다.
그러면서 본절 중반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머무르시는 거룩한 분이심을 밝힌다. '거룩한 이' 에 해당하는 '카도쉬'(qadoshi)는 어원상 다른 속된 것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거룩함을 유지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주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들을 심판하신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으로 들린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다는 표현 가운데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죄인에 대한 심판을 통해 나타나지만, 그것은 죄인을 완전히 진멸해 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하여 공의에 입각한 심판을 행하시되,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도록 징계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이다.
즉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악을 제거하고 청소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선민에 대해서는 진멸하는 것이 아닌, 의로운 징계를 통해 그들을 거룩하게 빚으시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함이란, 곧 다른 존재와 구별된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인간이라면 결코 용서하거나 용납할 수 없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서 용서와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을 베푸신다는 뜻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와 함께 사용된 '네 가운데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거룩' 이라는 표현과 역설 관계를 이루며,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특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10,7-15)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9~10)
마태오 복음 10장 9절은 앞선 마태오 복음 10장 8절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받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자칫 잘못하면, 한글 새성경 번역은 복음 선포자가 아무것도 미리 준비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 6장 8절에는 '전대에 돈도'라고 되어 있고, 루카 복음 9장 3절에는 '돈도'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오 복음에는 '금'에 해당하는 '크리소스'(chrysos), '은'에 해당하는 '아르귀로스'(argyros), '구리'(동)에 해당하는 '칼코스'(chalkos)로 세분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마태오가 복음 선포자가 가져야 할 청렴성과 신앙의 강직성에 대해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전직 세리로서 금전 계산에 빨랐던 마태오 복음사가가 돈의 종류를 일일히 나열한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마태오 복음 10장 10절에서 '여행 보따리'에 해당하는 '페라'(pera; scrip;bag)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는 도구이며, '옷'에 해당하는 '키톤'(chiton;coat; tunic)은 일교차가 심해 특히 밤에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는 광야의 추운 밤에 이불 역할을 하는 필수품이고, '신발'에 해당하는 '휘포데마'(hypodema; shoes; sandal) 역시 먼 거리를 걸어서 여행하는 자가 반드시 준비해야 할 필수품이며, '지팡이'에 해당하는 '라브도스'(rabdos; staff)는 광야에서 짐승들을 만났을 경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이 모든 것들이 유다인들이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던 여행 필수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 선교 활동의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되어지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기본적인 필수품조차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셨을까?
이것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할 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그 복음의 내용을 실천하지 않으면 전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고, 오로지 이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꾼이 자기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복음 선포자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므로 일정한 수업이 없으니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고, 복음 선포자에게 생계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과 더불어 신도들에게는 복음 선포자의 생계를 책임지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받는 것은 당연하다'에 해당하는 '악시오스'(aksios; is worthy of)는 '합당한 가치를 지닌'이라는 뜻을 지닌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송영진 모세 신부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9-11).”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라는 말씀과 거의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가는 사람은
‘나에게’ 필요한 것,
즉 여비라든지 여행 물품 같은 것만 챙기려고 하지 말고,
‘복음 선포에’ 필요한 것,
즉 믿음, 사랑,
열성 등을 더 깊고 더 단단하게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만 생각하고 그것만 챙기다가는
복음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물질에 가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복음과 물질은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금도 은도 돈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돈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돈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영업 활동이 아니라, 내 믿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믿음이 없으면 선교활동을
못합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닙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는 일꾼들을 먹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인데,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만 믿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돈의 힘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교활동을 하면서 돈 걱정을 하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시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마땅한 사람’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사도들(선교사들)을 접대하는(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찾아내어’ 라는 말은 사도들(선교사들)이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숙식을 걱정하는 태도이고,
그것도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찾아내어’를 사도들 자신들이 스스로 찾아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과 모순됩니다.
그러니 ‘찾아내어’는 ‘만나게 되거든’ 정도로
해석됩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다른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만일에 더 좋은 곳을 찾아서 옮겨 다닌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더 편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될
뿐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은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생활의
지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 사랑, 선행 등입니다.
돈의 힘으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속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행에서 걸림돌이 되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도 돈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만 생각하고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또 “좀 더 자금이 넉넉하다면, 더 많이 선교활동을 할 수도 있고,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두 마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넉넉한 자금’만 생각하고 신경 쓰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소유’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무소유’ 라는 말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무소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입니다.
만일에 ‘무소유’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한다면,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리거나 뒤로 밀어내면,
‘무소유’ 라는 것도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버리고 비우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빈자리에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텅 비어 있기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빈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지 않으면 악령이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2,45).
‘무소유’ 대신에
‘청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한 청빈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청빈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다가
교만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