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칼(마태 10,34-11,1)

2016. 7. 11. 오전 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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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칼(마태 10,34-1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하느님 백성에게, 헛된 제물을 바치지 말고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며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이사야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며 예수님의 제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마태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이사1,10-17)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1)

 

고대 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神)이 아무리 격렬하게 분노할지라도

제사만 드리면 얼마든지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지극한 정성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제사,

값 비싸고 가치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 신(神)의 분노를 달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범죄를 저지르고서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당신의 분노를 잠재우며 그 눈을 가리고자 바치는

그러한 제사를 받지도 원치도 않으신다.

 

그분은 철저히 공의(公義)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성품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제사만을

합당한 것으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당신이 스스로 대답하신다.

이 대답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무수한 제물이

하느님께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 물렸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굳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eb)는 제사를 드릴 때

동물의 뱃속 내장 부분에서 떼어내 불태워 드리는

지방 성분을 가리킨다(레위3,9).

 

제사드릴 때 다른 부분을 먹는 것을 허락되었지만, 피와 굳기름 만큼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성별되었으며,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레위3,17).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먹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는

그 기름마저도 원치 않으셨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마음과 삶, 제사가

도리어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과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기 떄문이다.

 

한편, '살진 짐승'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건강하고 품질이 좋은 짐승을 잡아 드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시대 말기에 병든 것과 저는 것 등

값이 떨어지고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제물로 드렸던 것

(말라1,8)에 비하여 매우 많은 정성을 드린 제사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삶이 그들의 값비싼 제물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아니 하느님 대전에 역겨운 것으로 비쳐지도록 만들고 말았다.

 

또한 '나는 ~ 물렸다' 해당하는 '사밧티'(sabathi)의 원형

'사바으'(sabah)배부르게 먹어 완전히 만족한 상태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물릴 정도로 싫증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무언가를 물릴 정도로 먹으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거북하고 그 자체가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이 된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제사드리는 자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드리는 굳기름을 받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도리어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여기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말씀으로 형식적 제사가 당신께 아무 유익이 없음 밝히신데 이어서

이제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보다 직접적인 말씀으로 형식적 제사의 무용성 밝힌다.

 

여기에서 '싫다'가 원문에서는 '기뻐하지 아니한다'로 되어 있는데,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하파쳇티'(haphatsethi)의 원형

'하페츠'(haphets)는 본래 관심있는 어떤 대상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

파생되었는데, 여기서는 강한 의미의 부정어 '로'(lo)와 함께 쓰여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피에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으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본래 제사를 명하는 율법의 기록에 의하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 그리고 그중 피는 가장 거룩한 것으로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으로 묘사된다(민수18,17).

 

율법이 명하는 것과 똑같은  짐승, 살지고 좋은 제물을 잡아 바치는 피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님의 반응이 다른 것은, 하느님께 제물을 잡아 바치는 그들 자신들의 손에

무죄한 희생자들, 약자들의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이사1,15~17).

 

히브리 사회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피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이것은 피가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을 물러내는 속전의 개념으로 드리는 피는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의 일부였다.

 

더욱이 이방 여러 종교들은 그들의 신들이 피에 굶주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피를 제물로 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드린 것은 이방 사람들과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레위17,11), 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만은 동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소중한 제물이었던 피를 하느님께 드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바른 인식도,

그분께 대한 바른 삶도 갖추지 못한 채

제물인 피에만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도 않으면서

피만 드리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들의 이같은 행태는 그들 스스로 그들의 제사 자체를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성품과 뜻을 올바로 인식하지도 않고, 그에 부합한 삶과도

거리가 먼 그들의 제사는, 그야말로 무능하고 무가치하고 헛된

이방신을 향한 제사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복음 (마태10,34-1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마태오 복음 10장 34절에서 39절까지는 제자들이 세상과 겪게 되는

갈등의 필연성과 절대적 헌신의 요청에 대해 말하고 있다.

 

희랍어 원문은 마태오 복음 10장 34절과 35절에는 과거 시제,

36절에는 현제 시제, 그리고 39절에는 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복음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세상과의 갈등

및 박해, 제자로서 요구되는 절대적 헌신의 삶, 자신의 목숨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함에 대해서 차례대로 다루고 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여기서 점층법적 구조를 통해 위의 세 개의 작은 단락 중에

마지막 단락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는 수준

헌신의 자세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승되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외의 것들과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을 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道)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높은 신앙의 경지이다.

 

여기서 '평화'에 해당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세상과의 타협을 말하고,

'칼'에 해당하는 '마카이라'(machaira; a sword)는 하나의 은유로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신앙에 대해서 복음을 들고 싸우는 적극적인 대처

각각 상징한다.

 

병행구절인 루카복음 12장 51절을 보면, '칼'은 '분열'(division)로 해석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2)

 

여기서 '작은 이들'에 해당하는 '미크론'(mikron; little ones)

마르코 복음 9장 37절요한 복음 21장 5절에 나오는 나이 어린 어린이

가리키거나 상징적인 뜻으로 사회에서 소외받는 연약한 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무리가

점점 확대되어 감을 묘사하는 가운데, 가장 마지막 순서에 해당하는

가장 폭 넓고 일반적인 개념의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고 땅이 메마르고 물이 귀하며 무더운 팔레스티나의 상황에서

먼 길을 걸어 손님이 집에 찾아왔을 때에 방금 우물에서 길어낸

시원한 물을 대접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대접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자나 그 복음에 대해 거절하지 않고

당연히 듣거나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대접하는 행위

그들에게 사소한 도움을 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사소한 도움을 준 사람들이

받을 '상'에 해당하는 '미스토스'(misthos; reward) 일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하지만(마태25,31-46),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선행에 대한 상급을 말하는 것이다.

 

그 구원과 상급은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며,

결단코 잃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실한 것임을 나타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어떤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주님 구원 사업의 협력자들에 대한 도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상급으로 이어지며,

모든 것을 상급으로 갚아 주시는 주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한다.





<십자가>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1) 이 말씀과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에서 ‘평화’는
예수님의 ‘참 평화’가 아니라, ‘세상이 주는 평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참 평화를 주러 왔다.”)




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말씀은,
세상의 거짓 평화를 잘라버리고,
하느님의 참 평화를 얻게 해 주는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칼’은 참 평화를 얻기 위한 ‘믿음’으로 해석됩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반어법’을 사용하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세상에 참 평화를 주러 왔는데,
사람들은 평화를 거부하고 칼을 선택했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말씀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 됩니다.




3) ‘평화’를 일치로, ‘칼’을 분열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아버지와 당신의 일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요한 17,21).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이 분열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신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셨는데 칼을 주신 것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분열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열은 일치를 거부한 사람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




이 말씀은, 신앙 때문에 가족이 분열될 수도 있고,
식구가 박해를 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식구를 원수로 삼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 믿는 식구가 종교를 이유로 신앙인을 원수처럼 대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신앙인은 식구를 원수로 대하면 안 됩니다.
‘사랑으로’ 그 박해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은, “식구들을 사랑하면 안 된다.”도 아니고,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도 아닙니다.
여기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고 식구들만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랑이란 더 큰 사랑과 더 작은 사랑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식구들에 대한 사랑으로 실현되어야 하고,
식구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의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따르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을 텐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곧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생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안식’이란 모든 고생에서 해방되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모든 십자가에서도 해방된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 십자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그것을 없애기 위한 것.)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회피하거나 거부한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지고 갈 때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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