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수요일]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 13,1-9)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태중에서 성별하시어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신다. (예레 1,1.4-10)
1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들 가운데 하나인 힐키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7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9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 새들에게 먹히고, 돌밭에 떨어져 말라버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태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1,1.4-10)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선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5)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직접 예언자의 소명을 주셨음을 밝힌 예레미야서 1장 4절에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1장 5절~10절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예레미야와 하느님 사이의 대화체 형태의 문장들이 소개된다.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화법을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자 소명을 계획과 선택의 관점에서 밝힌다.
예레미야가 소명에 근거한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소명이 하느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므로 그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한편,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와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그를 아시고 예언자로서 성별하셨으며, 그것에 근거해서 그를 지으시고 나오게 하셨다는 의미, 즉 시간의 진척과 함께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 대해 계획하신 바를 구체화시키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기서 '모태에서 너를 빚기전에'란 표현은 성경상의 용례를 감안할 때(이사44,24; 갈라1,15),문자적으로 단순히 모태에 수태되기 전을 의미하기 보다는 영원 전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획과 결정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즉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예레미야를 아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알았다'로 번역된 '예디으티카'(yedihthika)의 원형은 '알다'(창세3,7), '깨닫다'(탈출34,29), '간섭하다'(창세39,6), '선택하다'(창세18,19), '동침하다'(창세4,1)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동사 '야다으'(yadah)이다. 이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사실 관계에 대한 피상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본질에 대한 확실한 앎을 의미한다(창세3,7).
본문에서 이 단어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예레미야에 대하여 머리카락 하나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신(마태10,30) 만큼 온전히 아셨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그와 얼마나 친밀하고 가까운 분이신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풀이된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너를 성별하였다'에 해당하는 '히크따쉬티카'(hiqdashithika)는 '거룩하게 하다','거룩히 구별하다','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다쉬'(qadash)의 사역형(Hiphil)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 예레미야를 거룩히 구별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역형 동사가 사용된 것은 행동의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위해 예레미야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선언은 그가 활동 내내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예레11,18)과 감금(예레38,6; 39,15), 매국노라는 오해와 모욕을 견디며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聖徒) 즉 '거룩한 무리'로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었다는 거룩한 성별 의식을 가질 때, 신앙 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시련과 유혹,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꿋꿋하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예언자 직무가 남부 유다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명시된다.
'세웠다'라는 의미의 '네탓티카'(nethatihka)는 '주다'(창세1,29), '놓다'(창세15,10), '세우다'(창세17,2)라는 의미의 동사 '나탄'(nathan)의 원형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의미인 '나탄'(nathan)의 미완료형 '에텐카'(ethenka)를 사용하지 않고 완료형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예언자 임명이 이미 하느님의 결정 사항으로서 확정되었으며, 절대 불변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마치 거룩한 임직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만국의 예언자로 임명하시되 천상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자신의 충성스런 대사로 임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세상의 어떤 핍박이나 유혹, 회유에 대해서 타협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을 예언자로 세우신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결정에 순명하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임직에 대한 확신은 오늘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봉사자로 일하는 이들 모두가 반드시 가져야 하며 결코 이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한결같이 충성스런 소명자로 서게 하는 굳건한 토대가 될 것이다.
한편, '민족들'로 번역된 '꼬임'(goim)은 단수형 '꼬이'(goi)로 사용될 때에는 '민족'(창세12,2), '사람들'(2열왕6,18), '무리'(욥기1,6) 등의 집합적인 개념을 가진다. 그러나 본문처럼 복수형으로 사용되면 '인류'(이사42,6), '이교도'(에제5,6~8), '이방민족'(탈출34,24) 등의 집합적인 의미가 보다 강조된다. 따라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웠다는 표현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범위가 어디에까지 이르는 것인지를 나타내준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에 대해서도 예언자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인생 후반기에 몇 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던 것 외에 외국에 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레미야서 46장~51장의 여러 나라들을 향한 신탁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예언이 남부 유다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예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를 향해 하느님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선포한 예언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임명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만 국한되는 지역神이나 자기 백성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神이 아니라 민족들을 공의(公義)로 심판하시는 전(全) 우주적인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준다. 아울러 남부 유다 멸망 당시 대표적인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가리켜 이처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는 표현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즉 선민의 나라인 남부 유다가 멸망당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상속인 가나안 땅이 아닌 이방 땅에 흩어져 살지만, 그들이 흩어져 사는 이방 땅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며,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13,1-9)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3ㄴ~8)
마태오 복음 13장 1~52절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7가지 비유'의 말씀이며,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런 성격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등을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의 씨를 뿌려도 바리사인들과 같이 완고하고 사악한 무리들의 마음은 말씀을 거부함으로인해 결실을 하지 못하는 밭인 반면에, 말씀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듣는 제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마음은 결실을 맺는 밭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비유'로 번역된 '파라볼라이스'(parabolais)의 원형 '파라볼레'(parabole)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즉 '파라볼레'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진행 방법이다.
'씨뿌리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스페이론'(ho speiron; a sower)에서 '씨뿌리는'으로 번역된 '스페이론'(speiron)은 '씨를 뿌리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페이로'(speiro)의 현재분사로서 앞에 있는 관사 '호'(ho)와 함께 분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씨뿌리는 사람' (파종하는 자) 즉 농부(a farmer)를 가리킨다.
농경사회에서 밭에 파종하는 자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농경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그것의 결실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고, 씨 뿌리는 네가지 밭은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장하는 네가지 밭은 별개의 각각의 밭이 아니라 한 밭에 있는 다양한 땅의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원래 팔레스티나에서는 밭을 경작하기 전에 씨 뿌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씨가 떨어지는 밭은 대부분 돌이나 가시도 섞여 있었고, 잡초도 어느 정도 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신이 뿌리는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씨앗을 이곳 저곳에 뿌린다. 그러던 중 씨앗의 일부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길에'에 해당하는 '파라 텐 호돈'(para ten hodon; along the path)인데, 씨앗의 일부가 밭 사이의 길 내지는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길을 따라 뿌려진다.
말하자면, 여기서 '길'이란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이나 농부들이 밭일을 하기 위해 자주 걸으면서 다져져 길과 같이 된 땅을 말한다. 그래서 밭 사이에 나 있는 다소 딱딱한 좁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땅을 뚫고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기대와는 달리 결실은 커녕, 뿌리 한 번 제대로 내려보지 못하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타 페테이나'; ta peteina; the birds)의 눈에 띄게 되고, 결국 그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새들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마태13,19).
또한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은 '흙으로 얇게 덮인 바위가 많은 밭'이라는 말인데, 밖으로 싹이 돋지만, 곧바로 무섭게 뜨거운 태양이 솟아올라 그 열기와 빛으로 말미암아 메말라 죽게 된다. 이 비유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환난이나 박해'로 상징되고 있다(마태13,21).
우리의 내면이 마치 돌밭과 같이 깨어지지 않는 완고한 자아로 가득 차 있으면, '환난이나 박해'가 신앙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가시덤불'로 번역된 '아칸타스'(akanthas; thorns)는 '가시'나 '가시덤불'을 뜻하는 명사 '아칸타'(akantha)의 목적격 복수형으로서 '가시들' 내지 '가시덤불'을 의미한다. 이 '가시덤불'위에 떨어진 씨앗은 그보다 먼저 높이 자라버린 가시에 찔리고 그 그늘에 막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과 성체로 일구고 돌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내면은 이미 선점하고 있는 가시와 같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무성해질 것이다(마태13,22). 그래서 그 마음에서 복음의 씨앗은 자라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에피 텐 겐 텐 칼렌'(epi ten gen ten kalen;on good soil; into good ground)에서, '좋은'으로 번역된 '칼렌'(kelen)의 원형 '칼로스'(kalos)는 기타 다른 것보다 더 우수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하고'(suitable),'쓸모있는'(useful) 땅을 말한다. 이 땅은 위의 세 가지 종류의 땅보다 훨씬 우수하고 좋은 땅으로서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물 경작에 매우 적합한 땅'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호'(ho; some)는 지시 대명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스'(hos)의 주격 중성 단수로서, '어떤 것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각각의 씨앗들이 좋은 땅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또한 씨앗들의 조건이 동일한 땅에 떨어져도, 그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質)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합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씨앗이 아무리 부실해도 열매맺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과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3-4).”
길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먹어 버렸다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마태 13,18).
그런데 비유의 표현만 보면,
씨
뿌리는 사람이 길에 씨를 뿌린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생각하면 씨를 뿌린 사람이 잘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비유의
의도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 씨를 뿌렸는데
그 땅이 나중에 길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에게는 옛날 이스라엘의
실제 농사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각자 자신의
신앙생활 상태를 반성해 보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길’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창세 1,26-27).
죄를 지으라고 만드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땅’이었는데 ‘길’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마태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났을 때 걸려 넘어지는 사람입니다(마태 13,21).
그런데 처음부터 돌밭인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땅에서 돌밭으로 변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세례를 받을
때에는, 어떤 환난이나 박해를 받아도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떤 이는 순교자가 되고 어떤 이는 배교자가 됩니다.
누가 순교자가 될지, 누가 배교자가 될지는 처음에는
모릅니다.
사실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리 심한
박해를 받아도 배교하지 않을 사람이다.”
라고 자기 스스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그런 자만심은 위험합니다.
항상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 26,31).”
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습니다(마태 26,33-35).
그러나 유다는
배반했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버렸습니다(마르 14,50).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마태 13,22).
(여기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재물의 유혹’은 세상 걱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숨이 막힌다는
것은,
세상 걱정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생활도 못할 정도로...
그런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가시덤불 속에 뿌린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좋은 땅이었는데, 나중에 가시덤불이 자란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신앙인이었는데,
자기 안에 가시덤불 같은 걱정이 자라는 것을 방치한 것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걱정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만 하고 있다면 숨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걱정에서 해방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서 길, 돌밭,
가시덤불로 변했다고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노력하면 다시 좋은 땅으로 복구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길’로 변한
채 끝나버렸지만,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다른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께 되돌아왔고,
좋은 땅으로 복구되었습니다.
(박해 때
배교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중에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끝내시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