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토요일]함구령 (마태 12,14-21)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고한다.(미카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시편 10(9),1-2.3-4ㄱㄴ.7-8ㄱㄴ.14(◎ 12ㄴ)
◎ 주님, 가련한 이들을 잊지 마소서.
○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어 계시나이까? 가련한 이는 악인의 교만에 애가 타고, 그들이 꾸민 흉계에 빠져드나이다. ◎
○ 악인은 뽐내며 탐욕을 부리고, 강도는 악담을 퍼부으며 주님을 업신여기나이다. 악인이 콧대를 세워 말하나이다.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 ◎
○ 저주만 퍼붓나이다. 그 입은 거짓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혓바닥 밑에는 재앙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나이다. 마을 은밀한 곳에 숨어 앉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하나이다. ◎
○ 당신은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나서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없앨 모의를 하자 그곳을 피하시고, 따라 온 군중을 고쳐 주시며,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신다. (마태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미카2,1-5)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1)
미카서 1장 10~16절에서는 각 성읍을 향한 예고와 권고 형식을 사용하여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였다.
이제 미카서 2장 1절 이하 11절에서는 선민의 사회적 악행의 사례를 제시하고
심판을 경고하며(1~5절), 또한 선민의 종교적이면서도 비인도적인 악행의
사례를 제시하고 심판을 경고한다(6~11절).
그 가운데 미카서 2장 1절과 2절은 계략을 꾸미고 수탈을 자행하는 등의
사회적 악행의 사례가 제시된다.
'불행하여라' 라고 번역한 감탄사 '호이'(hoy)는 1장에 이어서
이스라엘에 다가올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암시하는 점에서
미카서 2장 1~11절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도입부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선민들이 잠자리(침상)에서 악을 꾸민다고 지적한다.
'잠자리'(침상)에 해당하는 '미쉬코브'(mishikob)는 시서에서
신앙의 사람들이 거룩한 생각을 하는 장소(시편4,5), 하느님과 친교하는 장소
(시편36,5; 63,7)로 종종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악의 장소(이사57,8; 에제23,17), 사치와 방탕의 장소
(아모6,4)로도 종종 묘사된다.
침상은 고요함의 의미,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며,
그곳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태를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례로 사용되어 그들이 홀로 있을 때 그들의 도모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내면이 악으로 찌들어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이란 구절이 쓰여진 용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부유한 자들이 사치스러운 침상에 누워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착취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지탄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1)
미카서 2장 1절에서 사용된 세 개의 동사는 점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악을 행하게 되는 과정을 점점 더 강도를 높여 묘사한다.
먼저 상반절의 '불의를 꾀하고'라는 표현에서 '꾀하고'에 해당하는
'호세베'(hoshebe)의 원형 '하샤브'(hashab)는 죄악이 싹트는 단계로
마음속으로 범죄를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악한 일을 계획하는 것을 묘사한다(즈카7,10).
또한 본문의 '악을 꾸미는'에서 '꾸미는'에 해당하는 '우포알레'
(uphoale)의 원형 '파알'(phaal)은 '행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그런데 '파알'(phaal)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 위해를 가한다는 의미보다는
머리 속에만 있던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착수하였다는 의미 내지는
죄악을 행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꾸미는 행위는 마음속의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밤새 궁리한 악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만들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착수할 구체적인 준비까지 완료된 상태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세번째 '실행에 옮긴다'에 해당하는 '야아수하'(yaasuha)의
원형 '아사'(asa)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나 부당한 방법을 통해
가하는 행위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아사'(asa)는 그 단어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며
단지 어떤 행위를 한다는 의미인데, 이제까지 생각하고 계획한 일이
악한 것이었기에 행하는 일도 악행일 수밖에 없다.
'아침이 밝자마자'
'아침'에 해당하는 '보케르'(boqer)는 '새벽' 혹은 '아침','날'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밝자마자' 에 해당하는 '뻬오르'(beor)에서 전치사 '뻬'(be)는
'~(때)에'라는 의미이고, 명사 '오르'(or)는 '빛'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막 해가 떠서 빛이 비추는 이른 아침의 때를 가리킨다.
시간에 대한 본문의 이러한 표현은 상반절의 '침상에서'라는
장소에 대한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침상은 장소적 표현이지만, 모든 사람이 잠든
밤중이라는 시점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본절의 이러한 표현들은 악인이 밤새 악행을 행할 궁리를 하고,
자신의 죄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계획까지 세워두었다가
날이 새자마자 악행을 실천하였다는 뉘앙스를 지닌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의 묘사는 이들의 죄악이 부지불식간에 실수로 행한 잘못이나
순간적 분노로 인한 우발적 죄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계획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물론 죄악을 미워하시고, 누구든지간에
악을 행하였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아니라
동시에 그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형벌이나 사죄 여부에 대해
그 고의성 여부 또한 살피시고 헤아리신다.
또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것을 끝내 고집하느냐 여부,
즉 예언자 등의 가르침에 대해 합당하게 반응하느냐
여부도 염두에 두신다.
이런 것들을 감안할 때, 악의적으로 죄를 계획하고 그것을 주저함없이
저지르는 자들, 그 악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중단할 것을
요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고집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을 멸시하는 자이므로
자비와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철저한 심판을 자초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12,41-21)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18~21)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 이유를 구약의 이사야서 42장 1~4절에서 찾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 즉 이 세상에 보내실 메시야는 이방에 공의를 선포하며,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지 않으며, 이방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되실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메시야로서 자기 본래의 사명을 다 완수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세속적 기대에 부응하여 단지 병고치는 분으로 널리 알려지길
원치 않으셨다.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의 '종'으로 번역된 '파이스'(pais; servant)는 사회적
신분으로서 '종'뿐 아니라 혈통적인 관계에 있어서 '아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분을 잘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마지 못해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노예와 같은 '종'('둘로스';
doulos)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아버지께서 마음에 드시는 일을 행하는
아들과 같은 종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내면에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실 만한
요건이 충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며(요한14,10),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당신 독자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7,16).
또한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I will put my Spirit on him)에서 '내가 ~
주리니'에 해당하는 '테소'(theso; I will put)는 '두다', '놓다'는 뜻을 지닌
동사 '티테미'(tithemi)의 미래 1인칭 단수로서 '내가 둘 것이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당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두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 머리 위에 내려오신 사건(요한3,16)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에서 '그가 ~선포하리라'로 번역한
'아팡겔레이'(apanggelei; he will proclaim)의 원형 '아팡겔로'(apanggello)는
'~로부터'(from)라는 기원과 근원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소식이나 사건을
알리다', '전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앙겔로'(anggello)가 결합된 합성 동사로서,
다른데서 얻은 소식 따위를 공개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민족들에게 알릴 '올바름'이 하느님께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이 공개적으로 알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올바름'으로 번역된 '크리신'(krisin; judgement; justice)의 원형
'크리시스'(krisis)는 '심판'보다는 '정의'(공의)의 의미를 더 함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민족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정의를 널리 선포할 것이다.
이것은 그분께서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전해진 '복음'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널리 증거되어질 것(마태28,18~20)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 12장 19절의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는 같은 뜻을
지닌 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의미를 보다 강조하는 동의적 대구법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소리치지도'로 번역된 '크라우가세이'(kraugasei; cry out)의 원형
'크라우가조'(kraugazo)는 '크게 소리지르다', '야단스럽게 떠들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식의 의(義)를 내세우기 위해 타인과 논쟁한 경우가
없으며, 자신이 한 행동을 자랑하기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면서 떠들어 댄 적도
없었고, 길에서 소리 높여 광고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메시야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마태11,29).
그리고 마태오 복음 19장 20절의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도 마태오 복음 12장 19절과 마찬가지로 동의적 대구법이 사용되었다.
'부러진'으로 번역된 '쉰테트림메논'(syntetrimmenon; bruised)는 '깨트리다',
'산산이 부수다', '상하다'는 뜻을 지닌 원형 '쉰트리보'(syntribo)의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 갈대가 '이미 썩어 부서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썩어 부서진 갈대는 그 자체로, 꺾지 않고 그대로 놔 두어서
되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갈대를 꺾어 버리는 것만큼 잔인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부러진 갈대'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비유하며,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꺾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다.
또한 '연기 나는'으로 번역된 '튀포메논'(typhomenon; smoking)은
'연기를 뿜다', '꺼져가다'는 뜻을 지닌 원형 '튀포'(typho)의 현재 분사로서,
심지가 '현재 연기를 내고 있는 것'을 뜻한다.
초의 심지에 연기가 나고 있다는 것은 그 심지의 불꽃이
금방 꺼져버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금방 꺼져버린 심지는 끄지 않고 그대로 놔 두어도
불꽃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심지를 끄는 행위 역시 잔인하며 몰인정한 것이다.
여기서의 심지도 산산조각난 갈대처럼, 죄로 말미암아 아무런 희망없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종, 또한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시는 종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희망없이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심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끝으로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는 '승리를 향하여 올바름을 이끌 때까지'
혹은 '승리를 위하여 올바름을 이끌 때까지'로 번역될 수 있는데,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의 '올바름'에 해당하는 '심판' 혹은 '정의'가 무지한 사람들에게
짓밟히지 않고, 영광스럽게 그 뜻을 펼칠 때까지를 가리킨다.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하느님의 정의가 그 목적을 성취할 것이며,
그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인생들을 지켜주시는 것이다.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8-21).”
여기서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계층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사람이 다 부러진 갈대이고 연기 나는 심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만일에 예수님께서 심판하려고 오셨다면, 부러진 갈대는 바로 꺾어버리고 잘라내셨을
것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는 그대로 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부러진 갈대 같은 이 인류를 어떻게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 한.)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되찾은 양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여기서 ‘찾을 때까지’ 라는 말은, 착한 목자는 한 마리 양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나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길을 잃은 양’과
‘목자를 떠난 양’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처음에는 ‘잃은 양’이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그는 ‘되찾은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완전히 목자를 떠난 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자기 죄를 뉘우쳤으면서도 자살해버린 것은(마태 27,3-5),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이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그 자신이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다투고
소리친다는 것은 논쟁을 하거나, 세속의 물리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속적인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고, 누룩을 넣어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키는 것처럼(마태 13,33)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을 때, 베드로 사도는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서 저항했습니다(요한 18,10).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권한으로 사람들을 제압해서 강압적으로 회개시키려고 하셨다면, 한 번에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무서워서 굴복하는 일일 뿐입니다.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예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즉
‘사랑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선교활동과 교회 운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서 일해야 합니다.
결과만 생각하면 그런 방식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돈의
힘이나 군대의 힘이나 권력의 힘으로 하면 금방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의 방식으로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어렵고, 쉽게 지칩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세속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라는 말씀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라는 말씀에 들어 있는 ‘올바름’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즉 ‘구원’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신 분이고, 그 구원사업을 승리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미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을 얻기 위한 생활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그 ‘올바름’에(‘구원’에) 참여하는, 즉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방식은 올바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