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목요일]하늘 나라의 신비 (마태 13,10-17)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은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외치라고 하신다.(예레 2,1-3.7-8.12-1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3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7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8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12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13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자,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신다.(마태오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2,1-3.7-8.12-13)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2~3)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2)
예레미야서 2장 2~3절은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태동기, 즉 출애굽 광야 시대에 하느님과 선민 사이의 순결하고 복된 사랑과 보호의 관계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즉 시간상으로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형성기인 출애굽 시대를 회상하는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출애굽 시기는 인생의 태아기로부터 노년기에 이르는 기간 중에서 가장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시기인 청년기, 즉 혼기에 접어든 성숙한 여성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네 젊은 시절의 순정' 과 '신부 시절의 사랑'은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여기서 '네 젊은 시절'이란 구체적으로 '신부 시절'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랑'은 '순정'과 동의어이다. 특히 '신부 시절'이라는 의미의 '켈룰로타이크'(kelulothaik)의 원형 '켈룰라'(kelula)는 구약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되는 명사로서 '신부'와 '며느리'를 의미하는 명사 '칼라'(kala)에서 유래하였으며, 결혼 자체의 의미보다는 '신부의 상태나 조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에서 '사랑' 즉 '아하바'(ahaba)는 결혼 생활을 통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결혼을 앞둔 약혼 상태에서 오고 가는 순수하고 달콤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은 법적으로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갖기 때문에 (창세19,14; 탈출22,16; 마태1,18) 본절의 표현은 혼인 계약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의 '순정'(hesed)과 '사랑'(ahaba)라는 표현을 두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사랑하였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느님께서 그 깊으신 뜻 가운데 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값없이 먼저 사랑하셨고, 또한 그들과 영원한 사랑의 계약을 체결하셨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순정과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하느님께 순종하여 그 사랑의 계약을 소중히 여기고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섬길 것을 맹세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순정과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사랑의 친교(교감)전체를 통틀어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앞서 말한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로부터 광야 생활까지를 통틀어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그때에 그들은 경작하거나 추수할 수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느님만 의지하여 살았음을 하느님 편에서 회상하시는 내용으로 묘사된다.
당시 그들의 신앙은 '나를 따랐다'란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해 그림자처럼 당신을 떠나지 않고 철저하게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결혼의 계약 안에서 신랑이 신부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출도 없는 광야에서 남편이신 하느님께서 신부인 이스라엘의 필요를 공급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신부가 자신의 공급자인 신랑을 따르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자신의 공급자이며 자신의 영적 남편이신 하느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의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신실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회상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선민들로 하여금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계신 그들의 보호자 주님을 기억하고 옛 이스라엘처럼 이제 신실한 백성이 되라는 도전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3)
본절에서 '주님께 성별된'과 '그분 수확의 맏물'은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구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대구를 통해 이스라엘이 선택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성별된'이라는 의미의 '코데쉬'(qodesh)는 '거룩하게 하다', '구별하다' 라는 의미의 동사 '카다쉬'(qadash)에서 유래하였으며, 하느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 나타난 '거룩함'의 본질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하느님 자신이시다(레위19,2). 즉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속성으로서의 거룩함(탈출15,11)을 갖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도 성별된 거룩한 이름이며(1역대29,16), 또한 하느님께 속한 성별된 것들도 거룩하다.
예를들어 안식일을 다른 6일과 구별하여 거룩한 날로 정하셨다(탈출16,23). 또한 '코데쉬'를 이중으로 사용하여 '거룩한 것들 중에 거룩한 것'(qodesh haqqodasim ; 코데쉬 학코다쉼)이라고 표현되는 지성소도 하느님을 위해 구별된 장소이므로 거룩하였다(탈출26,33).
이외에도 '거룩한 옷'(탈출40,13), '거룩한 제단'(탈출40,10), '거룩한 성별 기름'(탈출37,29), '거룩한 땅'(탈출3,5), '거룩한 일'(탈추36,4) 등 하느님을 위해 구별된<성별(聖別)된>많은 거룩한 것들이 존재하였다.
이스라엘도 특별히 하느님께서 많은 민족들 중에서 선택하셔서 구별하셨기 때문에(신명7,6)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었다. 특히 2절과 함께 3절의 '주님께 성별된'이란 표현은 하느님께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모든 민족들 중에서 선택하여 당신 백성들 삼으셨다는 탈출기 19장 4~6절의 내용을 연상케 한다.
한편, '맏물'(첫 열매)에 해당되는 '레쉬트'(reshith)는 소출로서는 첫 수확이나 최상의 상품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백성은 제정된 제사 규정에 따라 해마다 처음 익은 열매를 제일 먼저 하느님께 드려야 했다(탈출23,19; 민수3,13).
이처럼 '맏물'(첫 열매)을 드리는 행위는 '하느님께서 모든 소출(소산)의 주인이심'을 표현하는 신앙 고백에 빗댈 수 있는 것이었다(민수18,12~18). 그런 점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맏물'(첫 열매)이라고 칭하신 것은 하느님의 소유로 구별하셨다는 성별(聖別)의 의미와 하느님을 위해 가장 좋은 열매로 엄선하셨다는 최상의 선택의 의미를 내포한다(레위2,12; 23,10).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의 이러한 상태와 현재 상태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현재 이스라엘은 우상을 따라가기 때문에 주님께 속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으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고발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성별된 이스라엘의 수호자였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거룩한 것을 접촉하거나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었다. 대사제의 임직식에 사용된 제물은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먹도록 제한되었다(탈출29,33.3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은 사제와 레위인들만 먹을 수 있었다(레위7,6~14; 신명18,3.4). 사제나 그 가족이라도 부정한 사람은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레위22,6). 또한 사제의 집에 함께 거할지라도 외국인이나 객이나 품팔이꾼은 거룩한 예물을 결코 먹지 못했다(레위22,10). 이와같이 하느님을 위해서 구별된 거룩한 예물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한도내에서만 접촉하거나 먹을 수 있었다.
한편, 본문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거룩한 예물을 더럽힌다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이 침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됨을 선언한다(레위22,15.16). 즉 이방 민족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삼킨다면, 아말렉족이 징벌을 받았던 것처럼(탈출17,8~16)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징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빌론 제국도 비록 징계의 채찍으로서 남부 유다를 침략하는 것이 허용되었을지라도, 그들은 결국 멸망의 징벌을 받는 것이다(예레51,1~3; 54~56).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무조건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님을 위한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오히려 그 백성이 이방인처럼 거룩함을 상실하고 이방 신들을 따라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처럼 취급하여 당신 자신의 명예를 지키실 것이라는 암시가 본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외부의 적들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들 또한 물리치시는 분이시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13,10-17)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5)
여기서 '무디고'에 해당하는 '에파퀸테'(epachynthe; is waxed gross; has become calloused)는 '두껍게 만들다', '살찌게 만들다'는 일차적 의미와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동사 '파퀴노'(pachyno)의 부정 과거 수동태형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들 스스로가 아닌 제3의 존재에 의해서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사야서 6장 10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백성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두껍게 살찌게 만들어 무감각하게 하는 주체는 예언자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이다.
그러나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백성들이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죄로 기울어지는 인간 본성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에 쉽게 길들여지고 타협하며, 죄짓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마음이 더욱 완고해지고 사악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완고하고 사악하게 만드는 주체는 바로 죄스런 인간 본성으로 가득 차 있는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쳐 주다'로 번역된 '이아소마이'(iasomai; I should heal)는 '치료하다', '(병을)고치다'(루카9,11)는 의미를 지닌 동사 '이아오마이'(iaomai)의 직설법 미래 1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문장 앞에 '결코 ~하지 않도록', '혹시라도 ~하지 않도록'이라는 의미를 지닌 부정어 '메포테'(mepote)가 있어서, 직역하면 '결코(혹시라도)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도록'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고쳐 주지 않기를 바라는 주체는 백성 자신들이 아닌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 완고한 사악한 상태의 백성들을 고쳐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회개의 여지가 없는 완고하고 사악한 그들을 심판의 자리에서 보자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라는 로마서 1장 28절의 내용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13장 16절이하에 나오는 데로 구약의 많은 예언자와 의인들은 천국 비밀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 실체를 보지 못했지만(히브11,39), 비록 예언자도 의인도 아니지만 예수님 바로 곁에서 그분을 통해 천국의 실체와 그 비밀들을 보고 듣는 제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 되는 것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자주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원래 비유라는 것은 쉽게 알아듣게 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유들이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여주어도 안 보려고 하고
들려주어도 안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비유들은 어려운 수수께끼가 될
뿐입니다.
쉽게 설명했는데도 그 설명이 더 어렵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성경은 어려운 책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데도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1) 이천 여 년의 세월
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은 바로 알아들었지만,
그 말씀들을 기록한 책을 이천 여 년 뒤에 읽게
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 번역의 문제 등 때문에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2) 인간들 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그 말씀을 해설한 성서학자의 글이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잘못이 아니라 인간들 잘못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서학이라는 학문이 없어도,
성서학자들의 연구가 없어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고,
성인이 될 사람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실천하니까.
(사랑에 관한 학문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사랑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학자들의 사랑 연구 결과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서학이라는 학문은 왜 있는 것인가?
앞에서 말한 이천 여 년의 세월을 극복하려면 성서학이 필요합니다.)
3) 각자 자기 자신 탓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즉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 말씀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편안함만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말씀이 될 것입니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용서하라는 말씀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을 섬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4).”
비웃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은 부유함을 추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재물을
섬기는 짓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간격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 간격은 우리 자신이 극복해야 합니다.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제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안 하면, 우리도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빠져서 세속의 부귀영화나 추구한다면,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신앙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4) 외부에서 오는 방해
탓일 수도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에 뿌려진 씨’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마태 13,19).”
예수님의 말씀들을 왜곡하거나 잘못 해석한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이단에 빠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2서 저자는,
“...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2베드
3,17).”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법한 자들’은 사탄의 하수인들일 수도 있고,
무신론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이나 사이비
종교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도 성경을 연구(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연구가(해석이)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인도하기는커녕 심각하게
방해합니다.
어떻든 성경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올바른 해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른다면,
또는 예수님이 구세주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