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화요일](마태 13,36-43)
(7. 26.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이닥칠 재앙을 전하고, 저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라며 주님께 탄원한다. (예레 14,17ㄴ-22)
17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8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9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 20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22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려 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79(78),8.9.11과 13(◎ 9ㄴㄹ 참조)
◎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 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
○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
○ 포로들의 탄식이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죽을 운명에 놓인 이들을 당신의 힘센 팔로 보호하소서. 저희는 당신의 백성, 당신 목장의 양 떼. 끝없이 당신을 찬송하고, 대대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악한 자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고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신다.(마태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제1독서 (예레14,17ㄴ-22)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나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 (17ㄴ)
앞선 15절, 16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백성을 거짓 예언으로 유혹하는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유혹을 받아 참 예언을 배척하고 죄를 범하였던 백성들에게도 미침을 예언하였다. 이제 17절과 18절은 하느님의 심판이 시행된 결과로 야기된 참혹한 참사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에게 이 말을 하여라' 란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명령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며, 명령을 받는 '너'는 예레미야이고 '그들'은 파멸을 겪게 될 남부 유다 백성들이다.
본절의 1인칭 표현은 예레미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즉 이 부분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가 심판을 당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 자신의 슬픔을 전하되, 전하는 예레미야 자신을 '내' 라고 칭하면서 전하라고 명령하는 주문으로 이해한다.
그럴때, 이러한 본문은 눈물의 예언자로서의 예레미야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 된다.
즉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심판받고 고통받는 동족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는 예언이 소개되는 구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절 후반부에는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원문에는 '뻬툴라트 빠트암미'(bethullath bath-ammi)라고 되어 있다.
'처녀'(the virgin)에 해당하는 '뻬툴라트' 와 '딸'(daughter)에 해당하는 '빠트'는
모두 한 단어처럼 연결되어 있는 연계형이다.
이러한 연계형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내 백성의 처녀 딸' (the virgin daughter of my people)이 된다.
특히 '빠트'와 '암미'(내 백성 ; my people)사이에는 두 단어를 한 단어로 결합시키는
연결 부호 '막켑'(magkep ; '-')이 있으므로, 이것은 '딸 내 백성' 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내 백성의 딸' 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의미로 볼 경우,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 백성' 인 남부 유다 백성이 순결한 '처녀' 처럼 다른 민족에게 유린당한 적이 없는 사랑스러운 '딸'이었으나, 지금은 유린당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 백성이 처녀 딸' 이란 표현으로 볼 경우에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장에서,
남부 유다 백성 가운데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이며, 남자가 아닌 연약한 딸조차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또한 고대의 전쟁에서는 패배한 쪽의 처녀들이 무자비한 모욕을 당했으므로,
전쟁에서의 패배와 큰 모욕을 받게 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결국 남부 유다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본문은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연약하고 어린 여자들까지 큰 파멸과 중한 상처를 입는 끔찍한 현상에 대하여 또한 전쟁에 패하여 극한 수치와 모욕을 받게 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예레미야가 너무나 슬퍼 밤낮으로 눈물을 그치지 않고 흘린다는 의미가 된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오,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8)
본절은 남부 유다가 함락되는 날의 참상을, 성 밖의 들과 성읍 안의 광경을 예언함으로써
눈에 보는 듯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는,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보라'(then behold)로 번역할 수 있는 '웨힌네'(wehinneh)란 표현이 2회 등장한다. 이것은 들에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이 널려 있고, 성읍 안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이 널려있는 참혹한 상황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14장 13절에 나오는 '너희는 칼을 보지 않고 굶주림이 너희에게 닥칠 리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너희에게 참 평화를 주겠다'는 거짓 예언자의 예언이 완전한 허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본문 서두에는 '정녕', '진실로' 로 번역된 접속사 '키'(ki)가 나오는데,
이 의미로 보면, 예언자나 사제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한 전쟁과 기근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비참한 지경에 처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접속사 '키'(ki)를 '오히려'로 번역하면,
백성들이 적의 칼에 죽고 기근으로 죽어가는 상황에,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위로하며 하느님께 기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 장소를 떠나 도망다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취하더라도, 종교 지도자들도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의미만은 동일한다.
그리고 '헤매고 다닌다' 에 해당하는 '싸하루'(saharu)의 원형 '싸하르'(sahar)는
기본적으로 '배회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재앙의 땅 남부 유다를 떠나 방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보다 보편적인 해석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며, 고통당하는 동족을 버리고 도피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비록 남부 유다 땅을 빠져나왔지만,
어디로 가며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지, 혹은 장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바빌론의 침공 때 주로 귀족 계층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점에서, 18절의 의미를, 그들에게 있어 익숙하지 않았던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복음 (마태13,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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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0-43).”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을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밀밭의 가라지들을 거두어 불에 태우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은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을 분류해서 쓸모없는 사람은 제거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의인들은 밀이나 알곡처럼 예수님 나라에서 ‘쓸모 있는’ 사람들이고,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가라지나 쭉정이처럼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불구덩이에 던져진 악인들이
우는 모습은 그들의 ‘절망’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마지막 심판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고, 하느님(예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번복되거나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결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래서 벌을
받게 된 악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아마도 영원하고 완전한 절망은 산 채로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악인들이 이를 가는 모습은
그들의 ‘분노’를 나타냅니다.
이 분노는 자기들을 심판하고 벌을 내리신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분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이웃에 대한 분노도 섞여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화를 낼 것이고, 심판이 잘못되었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지옥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죄인들만 가득 있는 곳일
것입니다.)
의인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는 말씀은,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의인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 행복, 기쁨, 평화를 나타냅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절망 상태에
빠지지만, 의인들은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진(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악인들은 모든 것을 증오하고 모든 것에 분노하게
되지만, 의인들은 무한하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근거로 막연하게 ‘상상’은 해도
‘실감’은 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다지 긴장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고, ‘나의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일’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3).” 라는 말씀은 바로 그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불행이 닥치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한 번도 아파 본 적 없는
사람은 중병에 걸린 사람의 고통을 잘 모르고, 또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과신하면서 몸을 함부로 쓰다가 몸이 망가지게 되면 그때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반대로,
건강을 잃기 전에 미리 조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흔히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라.” 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지금 은총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살고 있다면, 그것을 잃지 않도록 잘 지켜라.” 라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금 누리는 은총과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더 받게 될 것이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자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것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영혼의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죄를 안 짓는 것으로만 그치면 안 됩니다.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5-46).”
인간 세상에서는 ‘작은
이들’에게 사랑 실천을 안 했다고 교도소에 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지옥으로 가게 되는 큰
죄입니다.
따라서 지금 자기와 자기 가족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만 만족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사랑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지옥을 예약한 것과 같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강도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
일도 안 했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그것은 하느님의 법으로는 큰 죄가 되는
일입니다.
본인들은 “나는 악한 일을 안 했다.” 라고 항의하겠지만,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 실천을 안 한 것 자체가 악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밀밭의 가라지처럼, 또는 알곡 속에 섞여 있는 쭉정이처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