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목요일]그물의 비유 (마태 13,47-53)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옹기장이 집으로 부르시어, 이스라엘 집안은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주님 손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레 18,1-6)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일어나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
3 그래서 내가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더니, 옹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5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6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며,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던져 버린다고 하신다. (마태 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18,1-6)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4)
본절에는 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옹기장이의 손에서 부수어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진흙 자체에 결함이 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릇의 두께나 반죽의 농도가
잘못된 것인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
단지 무슨 이유로든 옹기장이는 그 그릇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의 눈을 기쁘게 할 만한 다른 그릇을 만들었다고 진술할 뿐이다.
이처럼 옹기장이가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드는 기준은
'자기 눈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이다.
여기서 '눈에 드는'(좋은)에 해당하는 '야샤르'(yashar)는 '마음에 들다'
(판관14,3), '곧게 하다'(이사45,13)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는 동사이다.
이 동사의 어근의 기본 의미는 '(길)을 똑바로 만들다'이다.
이러한 의미가 발전하여 윤리적으로 '올곧고 흠이 없는 사람',
'분별력 있는 사람'의 특징을 언급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리고 '야샤르'가 한정 형용사로 사용될 경우에는 '정직한', '올바른', '올곧은',
'의로운' 등으로 번역되는데, 특히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통치(신명32,4),
하느님의 길(호세14,10), 하느님의 말씀(시편111,8), 하느님의 심판(시편119,137)을 묘사할 때
하느님의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의인(시편33,1)이나
완전한 사람(욥기1,1.8)의 속성을 강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 가운데, 본문과 같이 '눈'(eye)을 뜻하는
'아인'(ain)과 함께 사용될 경우, 관용적 표현으로 '~가 보기에 올바른',
'~의 소견에 좋은', '~에 마음에 드는'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특히 이 관용적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이 첨가될 때, 신학적으로 중요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다'란 어구를 들 수 있다.
이 어구는 주님의 명령(탈출15,26; 신명6,17.18)과 계약(신명12,28; 13,19)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옹기장이가 주 하느님을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임을 고려하면,
본문에서 '자신의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는 진술은
주님께서 자신의 명령과 계약에 순종할 만한 다른 민족을
세우실 수 있다는 암시가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이 표현은 먼저 만든 그릇이 깨진 이유가
그 이스라엘이라는 그릇이 주님의 명령과 계약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하느님께서 패역부도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하느님의 계획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6)
새 성경에는 번역이 생략되었지만, 본문 문장 서두에는 '보라'(behold)란
의미를 지닌 불변사 '힌네'(hinne)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주로 이 단어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관심을 집중시킬 때 사용되며,
뒤이어 나오는 내용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는 옹기장이와 그릇, 옹기장이와 주 하느님, 그리고 주 하느님과
남부 유다 백성의 상관 관계와 이런 것들이 주는 교훈의 중요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이란 표현은 '옹기장이의 의도에 따라
그 진흙이 좌지우지되는 것처럼'이란 뜻이다.
이것은 남부 유다 역시 주님의 뜻에 따라 그 운명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직유법적 표현이다.
남부 유다의 운명은 하느님의 절대 주권 하에 놓여진 것임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실물을 사용하여 교훈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본 단락의 실물 교육에 사용한 옹기장이의 비유는 앞의 예레미야서 17장 19~27절의
안식일 계명 준수에 대한 말씀과 매우 밀접한 연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안식일 준수 계명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의 절대적 명령이다(17,21).
"너희 목숨을 잃지 않으려거든 조심하여라.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예루살렘 성문으로 그 짐을 들여오지 마라."
이 안식일 계명 준수 요구에는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 하느님이시며,
모든 다른 이방의 신들은 거짓되고 허황된 신임을 믿는 믿음의 요청이 수반되어 있다.
본 옹기장이의 비유 안에도 이와 유사한 교훈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그릇으로 만들거나
또는 만들어진 그릇을 부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민족이나 국가를 세우거나 부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이것은 주 하느님께서 창조주로서 모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적 주권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주 하느님게서는 한 민족이나 국가만을 주관하시고 상관하시는 단순한 민족신이 아니며,
전 인류와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된 유일신이시며, 절대적 주권의 소유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민족에게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 모든 나라,
모든 백성,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이 옹기장이가 하는 것과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그 무엇을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반문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13,47-53)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47~50.52ㄴ)
마태오 복음 13장에서 전개되는 하늘 나라의 비유 가운데 마지막 일곱번째 비유인
'그물의 비유'이다.
'그물의 비유'의 핵심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에 있지 않고, 물가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여 나쁜 것은 버리는 데에 있다.
마태오 복음 13장 24~30절의 '가라지의 비유'처럼,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 내어 악인은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여기서 '그물'로 번역된 '사게네'(sagene; a net)는 저인망을 가리킨다.
즉 떼 지어다니는 고기를 대량으로 잡기 위해 두 배 끝에 그물을 고정시켜 놓거나
이러한 저인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움직이는 배로 그물을 끌어 그곳을 지나가는
고기들을 잡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물이 지나가는 곳의 거의 모든 종류의 고기들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로 번역된 '판토스 게누스'(pantos genus; all kinds)에서
'판토스'(pantos)는 '모든'(all)을 의미하는 형용사 '파스'(pas)의 소유격이며,
'게누스'(genus)의 원형 '게노스'(genos)는 '종족', '민족', '자손', '혈통',
'같은 종(種)'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고기를 비롯하여 바다 속에 서식하고 있는
각종 생물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판토스 게누스'(pantos genus)는 각종 고기 뿐만 아니라 바다 속에서
그물로 잡을 수 있는 각종 모든 생물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것은 예인망에 잡다한 모든 바다 생물들이 걸려드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인종과 성별, 악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에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타 칼라'(ta kala; the good)는 '적합한 것들', '쓸모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이며,
'나쁜 것'으로 번역된 '타 사프라'(ta sapra; the bad)는 '썩은 것들', '무가치한 것들'
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갓 잡아올린 고기 및 바다 생물들이 썩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니까 '타 사프라'(ta sapra)는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닌, 사람의 사용 용도에
미치지 못하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맥락에서 '악한 자'로 적용되고 있다(마태13,49).
이런 의미에서 49절의 '심판받을 악한 자'는 도덕적인 차원보다는,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전혀 쓸모없는, '사용 가치적 차원'에서의
'악한 자'라고 볼 수 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도 최후에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져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되는 자는 바로 '쓸모없는 종'이었다(마태25,30).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이것은 어부가 쓸모있는 고기만 그릇에 담고, 쓸모없는 고기는 내버리는 것처럼,
세상 종말의 때에 있을 심판의 양상도 똑같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종말'로 번역된 '쉰텔레이아'(synteleia; end)는 '완료', '완성', '끝',
'종결'을 의미하는 명사이므로, 여기서의 심판의 때는 세상이 그 사명을 완성하고
종결되는 그 종말의 때를 말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종말론적 심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다.
종말론적 심판의 때에는 무엇보다도 '가려내는 작업'이 있게 된다.
여기서 '가려내다'는 의미로 번역된 '아포리우신'(aphoriusin; sever; separate)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는 '경계를 지어 어떤 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
'분리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뒤엉켜 존재하고 있던 악한 자들은 이제 의인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의인과는 영원히 다른 운명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자'로 번역된 '투스 포네루스'(tus ponerus; the wicked)는 물가에서 버려진
'나쁜 것' 즉 '타 사프라'(ta sapra; the bad)와 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적극적인 악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가치있고 쓸모있는 '의'(義)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여기서 '던져 버릴 것이다'로 번역된 '발루신'(balusin; throw)의 원형 '발로'(ballo)는
48절의 '던져 버렸다'로 번역된 '에발론'(ebalon; threw)의 원형과 동일한 동사이다.
어부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고기들을 인정사정없이 던져 버리는 것처럼, 최후 종말의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소용되는 '의'(義)가 결핍되어 있는 악한 자들을 향해 조금도
동정을 보이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the firey furnace)속에 던져버릴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은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지만,
일단 세상이 끝나고 마지막 심판 때에 이르게 되면, 악한 자들을 향해 결코
열리지 않는 것이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여기서 '자기 곳간'으로 번역된 '테사우루 아우투'(thesauru autu)는 '그의 보물',
'그의 창고'(his storeroom; his treasure)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축적한 지식의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집주인이 그의 창고에서 필요에 따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자유롭게 꺼내
사용하며 가족 구성원들에게 마음껏 나누어 주는 것처럼, 하늘나라(천국)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들은 옛 진리, 즉 구약의 가르침과 새 진리, 즉 율법의 근본 의미와 정신을
바르게 해석해 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물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여기서 ‘바다’는 이
세상을,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은 선교활동을 뜻합니다.
‘그릇’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 ‘밖’은 하느님 나라의 밖입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그물은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의인들만 모여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악인들도 섞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의인이었다가 타락해서 악인이 된 사람,
악인이었지만 회개해서 의인이 된 사람,
자기가 악인인
줄 모르는 사람, 자기가 의인인 줄 모르는 사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의인들만
모여 있는 공동체’로만 생각했다가
다른 사람을 보고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신앙인이란
말인가?
교회는 왜 저런 사람을 받아주었는가?” 하면서...
그런 경우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잘못하고 있는 형제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형제애 실천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라는
말은 ‘종말의 날이 되자’ 라는 뜻인데,
이 말에서 종말이 오려면 우선 먼저 그물이 가득 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신자가 되는 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우리는 정확한 시기나 상황을 모릅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그물
속에 있는 고기들만 심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물 밖에 있는 고기들은 어떻게 되나?
‘그물’이 교회를 뜻하기
때문에 ‘그물 밖에 있는 고기들’은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
즉 구원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따로 심판할 것도
없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지금 ‘그물의 비유’에서의
심판은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의 심판과 같습니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10).”
초대를 받아들여서 잔칫방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그물을 가득 채운
온갖 종류의 고기들과 같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은 사람과 안 입은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마태
22,11-13)
‘그물의 비유’에서 어부들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분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비유에는,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울면서 이를 갈 것이라는 말이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물의 비유’와 ‘혼인
잔치의 비유’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구원이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초대장만 받은 것이지 아직 입장권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두 비유는 “최후의
심판은 자격 심사” 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했는가를 보지 않고 어떤 사람인가를 보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공로나
업적이 아니라 현재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본다는 것.)
정말로 많은 일을 했지만
자격이 없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업적은 별로 없지만 자격이 있어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중에는
한 일이 거의 없는데도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 있습니다.
공로나 업적을 본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 선포할 만한 사람인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습니다.
자격이 있다면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격이 없다면 전체가 다 못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일부
종파에서는 수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 없는 말입니다.
(묵시록 7장에서 말하는 ‘십사만 사천 명’은 실제 숫자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직 종말과 심판이 닥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시간을 주신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었던 사람도, 의인이었던 사람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과 심판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그런데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은 언제든지 지워질 수 있습니다(묵시 3,5).
반대로
생각하면, 이름이 새로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만심에 빠져도 안 되고, 포기해도 안 됩니다.
끝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심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십니다.
내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지는 아직은
모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은 어디엔가 갇혀 있지 않으면 결국엔 바다로 모입니다. 물이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겸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할 때가 있습니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고, 따라서 세상의 온갖 찌꺼기들이 물에 씻겨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다는 또한 정화 작용이 있어서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생명력이 풍부하게 자라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바다에 던진 그물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바다 속에도 온갖 생물이 자라고 있어서 주님의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올라옵니다. 그중에서 주님께서는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세상 안에도 밭이나 바다처럼 밀과 가라지가, 그리고 좋은 생선과 나쁜 생선이 늘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왕 세상 마지막 날에는 구분하실 건데 미리 좀 구분하시면 좋으련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 선택을 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아마도 세상 안에도 바다와 같이 정화 작용이 있어서 우리 모두가 풍부한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