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6,24-28)
나훔 예언자는 피의 성읍인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한다. (나훔 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 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신명 32,35ㄷㄹ과 36ㄷㄹ.39ㄱㄴㄷㄹ.41(◎ 39ㄷ)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 그들에게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재난이 삽시간에 닥친다. 주님은 당신 백성의 권리를 감싸 주시며, 당신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 ◎
○ 이제 너희는 보아라! 나다. 내가 바로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다. ◎
○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날을 세우고,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리라. ◎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때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인데,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신다. (마태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훔2,1.3;3,1-3.6-7)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2,3)
본절은 아시리아가 그의 대적들에 의해 멸망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상반절과 후반절 모두 '왜냐하면'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키'(ki)로 시작한다.
아시리아 멸망의 첫째 이유가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과 약탈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고, 두번째 다른 이유가 이스라엘의 영예, 즉 야곱의 영예를 회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밝힌다.
여기서 '약탈자들'에 해당하는 '베카쿰'(beqaqum)이나 '약탈하고'에 해당하는 '뽀케킴'(boqeqim)의 원형은 모두 '빠카크'(baqaq)이다. 그런데 '약탈'이라는 말은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음'이라는 정도의 의미이지만, 원어 '뻬카크'(beqaq)는 어떤 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것은 아시리아가 남부 유다에 행한 악행이 일반적인 약탈의 수준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포도나무 가지'에 해당하는 '제모레'(zemore)의 원형 '제모라'(zemorah)는 구약 성경에서 5회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가지'라는 의미도 있지만(이사7,10; 에제8,17), 좀 더 구체적으로 '포도나무 가지'를 가리키는 경우(민수13,23; 에제15,2)도 있다. 본문 역시 '포도나무 가지'의 포현으로 볼 수 있다(시편80,15.16).
또한 '망쳐 버렸지만'에 해당하는 '쉬헤투'(shihethu)의 원형 '샤하트'(shahath)는 '없이하다' 혹은 '망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사용하심으로써 남부 유다를 징계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아시리아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징계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들의 탐욕과 사악함을 따라 남부 유다를 지나치게 압제하고,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등 잔혹하기 그지없는 일들을 저질렀다(이사10,6.7; 47,6).
따라서 아시리아 역시도 그들이 이스라엘에 행한 것처럼 다른 나라에 의해 처참하고도 무자비한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시리아는 북부 이스라엘을 B.C.722년에 멸망시켰고, B.C. 587년 남부 유다 멸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이제 바로 그 자신이 '파괴하게 하는 자'('흩어지게 하는 자')에 의해공격을 받아 철저히 파멸되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아시리아에게 이 일을 행한 주체는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연합군으로 볼 수 있다.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6,24-28)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6)
'목숨을'로 번역된 '프쉬켄'(psychen)의 원형 '프쉬케'(psche)는 '숨쉬다', '바람불다'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psycho)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목숨'(life; 요한10,17)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영혼'(soul; 마태10,28)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도 가리키는 이중적인 용어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 나오는 역설적인 교훈은 이러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간의 대조 관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자신의 육적인 생명에 대한 애착만을 갖고 이것을 지키려는(히브2,15) 자는 끝내는 육적인 목숨과 더불어 영적 목숨까지 잃게 되지만(루카12,20),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 헌신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 뿐 아니라 종말에 그 육체 또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야고1,19; 묵시21,4).
또한 '얻고도'에 해당하는 '케르데세'(kerdese; he gains)는 능동태인데 반해, '잃으면'에 해당하는 '제미오테'(zemiothe; lose)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태'(voice)는 본문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 즉 이 문장은 사람이 온 세상(천하)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힘쓰는 노력은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심은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위한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이다.
한글 새성경에서 '제 목숨을' 다음에 '주고'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shall give)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미래형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관습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격언적 미래형'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인간 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생명의 단(일)회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앞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한한 육적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영생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영생의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소중한 목숨까지도 권능의 예수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촉구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 뒤를 따라가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최후의 만찬 때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36).”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제자들이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는 곳,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가게 될 곳’, 즉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되는 곳입니다(요한 13,32).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 두신 곳인데(요한 14,2),
바로 ‘아버지의
집’(하느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려면”,또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어 누리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물질적인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도 버려야 한다면
버려야 합니다.
(꼭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얻기를 희망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방해되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도움이 되는(필요한) 것들은 잘 챙겨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또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세속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사랑, 희망, 열정, 헌신,
인내 등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입니다.
이 말은 사실상 ‘자신을 버리고’와 뜻이 같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는 것은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대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역시
믿음, 사랑, 희망, 열정, 헌신, 인내 등입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 부활과 승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희망도 있어야
하고,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도 있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인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십자가는 ‘참기 힘든 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참기 힘들지만 참는 것, 그것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와 ‘인내’에서
‘좁은 문’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
문’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참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끝까지 참는 사람보다는 참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박해 때의 역사를 보면 순교자보다 배교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눈앞의 십자가는 너무 크게
보이는데,
나중에 얻게 될 영광은 너무 멀고 막연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고,
지금 겪는 고난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나중에 얻게 될
영광을 잊어버리거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의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좁은 길이 되고, 그
문이 좁은 문이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훈련의
고통과 어려움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의 영광보다 더 크게 느낀다면,
그래서 훈련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금메달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보다 시험공부의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공부하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합격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그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통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에 고통,
희생, 슬픔 같은 것만 있다면
아무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런 어두운 것들만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에는 기쁨, 평화, 행복이 있고, 사실 그것이 더 크고 더 많습니다.
우리가 힘들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박해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보면,
분명히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기쁨’을 노래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우리는 성모님의 생애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고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7-18).”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기쁨’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자는 저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대사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이 영화는 1750년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 부근의 과라니 부족에 있었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그 마을에는 예수회에 소속된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가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며 선교사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토 분계선이 새롭게 그어지면서 과라니족 마을이 노예 제도를 합법화하는 포르투갈 의 식민지로 편입됩니다. 교회는 포르투갈과 갖고 있던 관계를 고려하여 그곳에서 선교하는 예수회 신부들을 철수시키고자 추기경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과라니 부족과 사제들은 이에 불응하며 이 마을을 노예 제도로 희생시키려는 포르투갈에 대응합니다. 결국 그곳 신부들은 원주민과 운명을 같이하며 포르투갈 군대와 맞서 싸우다 마침내 순교하게 됩니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대사는 바로 그곳 신부들을 설득하려고 파견된 추기경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글 마지막 부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종교와 사랑, 정의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누가 진정으로 산 자이고, 진정으로 죽은 자인지를 대답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보여도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지체로 살더라도 죽은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은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