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금요일 ] 용서 (마태 18,21─19,1)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녀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했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 짐을 꾸려 떠나라고 이르신다. (에제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시편 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네. 그들의 조상들처럼 등 돌려 배신하고, 뒤틀린 활처럼 어긋나 버렸네. ◎
○ 산당을 지어 그분의 화를 돋우고, 우상을 세워 그분을 진노케 하였네. 하느님은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네. ◎
○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네. ◎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시며 큰 빚을 탕감받고도 작은 빚을 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신다. (마태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치드키야의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죽음(2열왕25,7)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제1독서 (에제12,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11)
여기서 3인칭 복수형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어원상 '유배를 당해'(포로로)로 번역된 '밧셰비'(bashebi)는
'벌거벗은 상태로'라는 의미이고,
'끌려'(사로잡혀)로 번역된 '빡골라'(baggolla)는
'포로의 상태로'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둘 중 한 단어만을 가지고도 포로로 끌려간다는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제키엘이 본문에서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B.C.586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파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보다 생생하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옷이 다 벗겨진 채로 손과 발이 결박을 당해 약속의 땅 밖으로
이방인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은 주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끝까지 범죄할 경우, 어떤 결과를 당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2)
본절에서는 치드키야 임금이 도주하는 광경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가 처한 절박한 상황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임금은 '짐을 어깨에 메고' 피난길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팔을 늘어뜨려 운반하지 못하고, 어깨에 지고 운반한다는 것은
그 짐이 매우 무거움을 암시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피난가는 것도 치욕스럽지만, 너무나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쫓겨 무거운 짐까지 져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이것은 짐을 질만한 신하가 없거나 혹은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으로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평생 힘든 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피난을 가야 했던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주는 '어두울 때에' 이루어졌다.
원문에 '빠알라타'(baallatah)인데, 이것은 어스름한 상태가 아닌
'짙은 어두움'을 의미한다.
즉 이동하기에 매우 불편한 시간에 체면을 버리고 도주하였음을 나타내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깊은 밤에 비겁함과 나약함으로 도주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남부 유다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통하여 나갔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는 치드키야 휘하의 가신과 군사들일 수도 있으며,
혹은 바빌론 군사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본문에서 언급하는 벽은 가신들이 치드키야를 도망시키기 위해
일부를 파쇄한 성벽일 수도 있고, 혹은 바빌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가 훼손된 성벽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일개의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동물과 같이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도망간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구멍을 뚫음을 나타내는 동사 '야흐테루'(yahtheru)의 원형
'하타르'(hatar)는 도둑질을 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 것(욥기24,16)과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요나3,2)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이런 용례는 치드키야의 비참함을 묵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치드키야 임금이 취하게 될 이러한 행위 역시 에제키엘이 취하였던
상징적 행위와 동일하다(에제12,7).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크나큰 슬픔과 비통한 마음 때문에
치드키야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땅을 애써 외면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치드키야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으나 바빌론 군대에 의해 붙잡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 두 눈이 뽑힌 후, 바빌론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 후,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었다(2열왕25,1~7; 예레52,11).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치드키야가 도망치면서 땅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두 눈이 뽑힐 것에 대한 예표라기 보다는, 그후로는 두 번 다시 자기가
통치했던 그 땅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에제12,13참조).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복음 (마태18,21-19,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
(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
-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매우 고약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왕에게 하소연하여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자신의 동료에게는 모질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탕감받은 돈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매정하게 감옥에 가두었지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는 너그럽지만, 다른 이에게는 모질게 대하는 경우가 없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은 늘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면서도, 막상 다른 이가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면 큰 모독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은 남에게 늘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이 조그만 상처라도 받으면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빚진 이들이 아닙니까? 비록 크건 작건 간에, 누구나 다 하느님께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누구나 완전한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부족하고 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그 부족한 부분까지 내보이면서까지, 좀 더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끼리 결코 헐뜯고, 단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듯 자신의 동료를 감옥에 가둔 저 몹쓸 종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가 몸담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돕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존재임을 더욱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용서>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 대화가 루카복음에는
이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같습니다.
용서의 횟수를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는 ‘회개하거든’이라는 말씀이 있고, 마태오복음에는
없는데,
뜻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그 사람이 회개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고,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그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용서할 일만 있고 용서받을 일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형제가 나를 일흔일곱
번씩이나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경우와 내 쪽에서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경우입니다.
1)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경우.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는,
자기는 용서받았으면서도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 또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용서받으려고 하는 사람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형제가 나를 용서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사실 용서는 하느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용서의 은총을 나누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인간들이 마음대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로
표현하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너희를 용서하시기를 바란다면,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용서를 받는 입장에서 다시 표현하면,
“형제가 너를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면, 너부터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나를 용서하는
형제와 내가 용서해야 하는 형제가
동일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받고
싶다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만일에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채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2) 내 쪽에서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경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
이 말씀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말’과 ‘성령을 거스르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정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주로
‘용서’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이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데도 자기가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가 나를 용서해도 내가 용서받기를 거부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단순히 용서를 못 받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형제 사이에서의 일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혹시 하느님의 용서는
거부하면서 형제의 용서는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 거부해서 못 받은
상태라면
형제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범죄 집단 내부에서
범죄자들이 하느님을 향한 회개는 하지 않고,
하느님께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용서한다고 말하는 일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텐데,
그것은 용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들끼리의 용서도 하느님의 용서에 뿌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