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화요일]부자와 하늘나라 (마태19,23-30)

2016. 8. 16. 오전 5: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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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화요일]부자와 하늘나라 (마태19,23-30)

[매일복음(다해) 10-08-17] - “내 이름 때문에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티로의 군주가 사람이면서 신에다 비기니 이방인의 손에 죽으리라고 전하게 하신다. (에제키엘  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정녕 내가 말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신명 32,26-27.28과 30.35ㄷㄹ과 36ㄷㄹ(◎ 39ㄷ)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 나는 생각하였다. “그들을 산산조각 내고,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리라.” 그러나 원수가 뽐낼까 보아, “우리 손이 더 강하였다. 이 모든 것을 한 이는 주님이 아니다.” 이렇게 적들이 착각할까 보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 정녕 이 백성은 생각이 없고,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바위이신 분이 그들을 팔아 버리지 않으신다면, 주님이 그들을 넘겨주지 않으신다면, 어찌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을 수 있으며, 두 사람이 만 명을 몰아낼 수 있으랴? ◎
○ 그들에게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재난이 삽시간에 닥친다. 주님은 당신 백성의 권리를 감싸 주시며, 당신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 ◎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오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현재 레바논에 위치하고 있는 티로 항구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제1독서 (에제28,1-10)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사람의 아들' 이라는 의미를 갖는 '인자'(人子)에 해당하는 '뻰 아담'(ben adam)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에제키엘로 하여금 하느님과 대조되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임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즉 에제키엘로 하여금 스스로의 유한함을 자극하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에제키엘이 예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자가 '티로의 군주'로 제시된다. 여기서 '군주에게'에 해당하는 '리네기드'(linegid)의 원형 '나기드'(nagid)는 직역하면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역대기 상권 12장 8절에서는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영도자'(족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역대기 상권 13장 1절에서는 다윗의 군대 장관(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역대기 하권 28장 7절에서는 왕궁의 대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티로의 군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왕'이라는 의미의 '멜레크'(melek)라는 단어 대신에 '우두머리'라는 의미가 강한 '나기드'(nagid)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티로의 군주가 진정한 왕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막대한 부와 근동에서의 영향력 있는 위치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느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교만한 티로의 군주를 폄하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티로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비교적 규모가 작은 도시 국가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본문의 '나기드'(nagid)라는 표현은 티로의 군주가 세상 나라에서도 왕의 위세를 갖지 못한 일개 도시 국가의 우두머리에 불과하면서, 온 우주만물의 유일하신 통치자이시며 왕이 되신 하느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깨닫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신이다.'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필리스티아에 대한 심판의 내용은 17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에제키엘서 25장에 모두 함께 기록되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내용에제키엘서 26~28장으로 무려 세 장이나 되는 많은 분량이다. 또한 이어지는 파라오와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내용29~32장으로 네 장이나 된다. 

티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내용과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내용에 이처럼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은 먼저 이 나라들이 당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나라의 왕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신격화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 중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서 왕은 신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존재로 여겨졌다. 신이 선택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권위가 확보되었다. 반면 이집트에서는 왕 자신이 신적인 존재, 즉 신들의 집단 중에 속한 하나의 신으로 여겨졌다. 

티로의 왕권의 개념은 본래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와 유사했었으나, 이집트와의 밀접한 무역을 통해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역을 통한 부와 영화를 얻게 되고, 국제 사회에서의 그 위상이 매우 높게 올라가게 됨으로 인하여 교만해져서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티로의 군주의 교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신'에 해당하는 '엘'은 민족들이 섬기는 일반적인 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탈출34,14),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탈출34,14; 애가3,41)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티로의 군주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신으로 선언하였을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당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오직 주 하느님 한 분 뿐이시지만(1코린8,4),  하느님께서 티로의 군주의 선언을 당신께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한편, 자신을 신으로 선포한 티로의 군주의 말은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당시 바빌론은 대제국 아시리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형성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바빌론은 고대 근동의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개 도시 국가인 티로의 군주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는 행위는 바빌론 제국의 왕의 통치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티로의 군주의 말은 당시 근동의 사람들이 신의 거처라고 생각했던 장소를, 우가리트(Ugarit) 북쪽의 예벨 아크라(Jebel Aqra) 즉 페니키아 만신전에서 티로성으로 옮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티로의 군주의 말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고대 세계의 정치, 종교적 패권을 자신이 차지하겠다는 야심에 찬 공격적인 말이 된다. 이런 티로 군주의 교만한 언사는 곧 바빌론의 공격을 불러왔고,이로 인해 티로는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며, 주변 나라들을 무시하고 교만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선포하는 티로를 바빌론을 통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 가운데에 앉아 있다'

티로의 군주가 본절 상반절에서 '나는 신이다' 라고 한 말은  자신을 신과 동등한 신분이라고 주장 것이고, 본문에서 '나는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 라고 한 말은  자신이 신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주장한 것이다. 

즉 본문은 바다로 둘러싸여 어느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완전한 곳으로서의 지리적 위치의 우월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신적 존재라고 여겼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자리'에 해당하는 '모샤브'(moshab)에는 역대기 상권 6장 54절에서처럼 일정한 무리의 백성들이 거하는 주거지라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열왕기 상권 10장 5절에나 시편 107장 32절에서는  원로들이나 고위 관리들의 회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상권 20장 25절에서는 임금이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경우 '모샤브'권력의 자리이고, 권력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 자리란 의미이다. 또한 '모샤브'시편 132장 13절에서 주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 경우 '모샤브'는 일개 나라를 다스리는 장소가 아니고, 온 우주 만물이 통치되는 절대 권력의 자리란 의미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좌정하실 수 있다. 

하지만, 티로의 군주는 자신이 앉는 일개 왕의 자리를 하느님의 자리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왕의 권력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오르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극도로 교만한 말이었다. 또한 티로의 군주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리는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자리라고 했다. 

여기서 '바다 한가운데에'에 해당하는 '뼬레브 얌밈'(belleb yammim)27장 4절, 25절에서는 티로가 해상 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한 절대 강자로서 많은 부를 쌓던 자리를 상징하였다. 또한 이 자리는 요새와 같은 바위섬으로, 외세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던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27장 26절, 27절, 3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곳을 티로를 심판하시는 자리로 삼으셨다. 

티로의 군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군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된 티로의 군주는 하느님의 자리까지 넘보았던 것이다. 

티로의 군주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던 자신의 자리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왕의 자리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가졌었더라면, 그는 경제적 부흥의 원천이며 군사적 방어막 역할을 했던, 바다 한 가운데에 있었던 티로 섬에서 왕의 자리를 잘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본문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leb)는 앞선 전반부에서 '한가운데'라는 의미로 번역된 '레브'와 동일한 단어이다. 본절 상반절이 지적하는 티로의 군주의 죄는 자신이 거한  바다 '한가운데'(레브)의 자리를 신의 자리라고 한 교만이 죄였다.  또한, 본문에서 지적하는 티로 군주의 죄는 자신의 '마음'(레브)신의 마음과 같다고 여기며 행동하는 교만의 죄이다.  

이처럼 본절에서는 '레브'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티로 군주의 교만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성공과 영화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티로와 함께 교만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던 고대 시돈 항구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9,23-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23)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 

마태오 복음 19장 23절에서 30절까지는 앞의 마태오 복음 19장 16~22절에 기록된 부자 청년의 행동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 

특히 오늘의 말씀은 물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는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큰 경계가 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려울 것이다'로 번역된 '뒤스콜로스'(dyskolos; hardly)는 영어의 'mis''un'과 같이 '어려움', '반대', '방해' 등을 뜻하는 접두사 '뒤스'(dys)'음식'이란 뜻을 지닌 '콜론'(kolon)의 합성어로서 '마음에 드는 음식을 찾기 어려운'이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부자가 보통 사람이 겪지 않아도 될 또 다른 재물이라는 장애가 있으므로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하늘 나라'에 해당하는 '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ten basilleian ton uranon; the kingdom of heaven)이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10장 23절루카 복음 18장 24절에서는 모두 '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텐 바실레이안 투 테우'(ten basilleian tu theu; the kingdom of God)로 나온다. 

양자는 모두 같은 의미이지만, '하늘 나라'내세적 의미가 좀 더 강하며, '하느님의 나라'는  내세적 의미와 더불어 현세적 의미가 있다. '바실레이아'(basilleia)는 공간적, 장소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통치', '다스림'(reign; govern), '왕다운 지배권'이라는 뜻이 있는 용어이다. 

부자는 내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통치하심에 순응하기도 어렵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본문인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는 '들어가다'가 미래형으로 되어 있으나, 루카 복음에서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물질적인 부자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 명예나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이 세속적인 측면에서 누리는 것이 많은 자는 자연히 이러한 것들에 쉽게 의존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통치를 받기도 힘들며, 또한 장차 천국에 들어가기도 쉽기 않은 것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더 쉽다'에 해당하는 '유코포테론'(uekopoteron; easier)비교급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전자가 더 쉽다는 뜻이다.

이러한 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먼저 '바늘 구멍'(바늘 귀)에 해당하는 '트뤼페마토스 라피도스'(trypematos raphidos; the eye of a needle) 예루살렘 성에서 주로 밤에 이용되던 속칭 '바늘귀 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문은 입구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는 통과할 수 없었고, 지방이 들어 있는 물혹과 더불어 짐을 지고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낙타는 모든 짐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낙타'에 해당하는 '카멜로스'(kamelos; a camel)'밧줄'의미하는 '카밀론'(kamilon)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소수의 몇몇 사본이 이 입장을 취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밧줄이 바늘 구멍(바늘 귀)을 통과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이런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의 바늘귀 문(jaffa gate)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여기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
재물을 모으고 쌓아두는 일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강조하신 표현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하늘나라에 쉽게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난해도 재물을 하느님보다 더 섬기고,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말씀에 대해서 “나는 ‘부’를 추구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
또는 “나는 신앙생활과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동시에 잘할 수 있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은 무의미한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섬기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법(계명)이고 명령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과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일이 되고,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사실 두 가지를 함께 잘한다는 것은 실제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사람은 재물에 대해서는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반대로,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 마음이 떠나게 되거나,
하느님께 물질적인 복을 비는 기도만 하는 기복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


당시의 유대인들은 ‘부유함’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일부 그런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 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마리와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욥 42,12).”
제자들은 아직 그런 사고방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시대의 초보적인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약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부자들만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그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의 권한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한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교는 ‘자력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고 수행을 해도, 무슨 대단한 공로를 세우고 업적을 쌓아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했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한 다음에
겸손하게 하느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들이기도 합니다.



영과 육(靈과 肉) (마태 19, 23~27)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물론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바늘구멍이란,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매우 작은 문을 의미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큰 성문 곁에는 밤에만 출입하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매우 작아서 사람 하나도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작은 문을 당시 사람들은 바늘귀라고도 부르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그만큼 어렵고, 유혹이 많이 따른다는 의미이지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유혹은, 권력과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기에 사회 여러 곳마다 부패가 생기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재물만 가지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지 않습니까?
물론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은 세상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세상일에 관심이 많으면 그만큼 하느님의 필요성을 잊어버릴 위험이 많게 되지요. 그렇다고 오늘 예수님 말씀은, 부자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나 재산을 이웃을 위해 어떻게 선용하는가 하는 점이지요. 바로 이 점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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