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밭 임자 (마태 20,1-16)

2016. 8. 17. 오전 6: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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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밭 임자  (마태 20,1-16)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라고 하신다. 양 떼를 먹이로 삼는 목자들에게서 양들을 구해 내어 보살펴 주시겠다는 것이다. (에제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포도밭에 일할 일꾼들을 산 마음씨 후한 밭 임자에 하늘 나라를 비유하시어 말씀하신다. (마태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에제34,1-11)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3)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4)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3) 

앞선 에제키엘서 34장 2절에서는 이스라엘 목자들로 비유된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먹여야 할 양인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일면 소극적인 측면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어지는 본절(3절)에서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인 백성들을 먹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아먹기까지 한 악행이 고발된다.  

본문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지적한다. 

양을 치는 목자가 양에게서 고기나 기름을 취하여 양식으로 삼고, 양털을 취하여 옷감을 삼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양으로부터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양을 성실하게 돌보는 목자에게만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들을 성실하게 먹이고 돌보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자기들의 유익만을 취한 것이다. 

이미 2절에 양떼를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3절 후반부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들을 제대로 돌보아야 하는 목자의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기름과 털을 취하는 목자의 권리만 행사하는 것이 문제이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불의인 것이다. 

이런 악한 목자에 대한 비유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연약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을 행한 죄를 지적한 것이다(아모5,10~12; 6,4~6참조). 

한편, 악한 목자들이 양으로부터 취한 '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leb)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 라틴어 번역본(Vulgata)'젖'이라는 뜻의 '할라브'(hallab)로 읽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가톨릭의 새 성경은 '젖을 짜먹고'라고 번역하였다. 목자들이 양떼로부터 취하는 것이 주로 양털과 젖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은 '기름'이나 '우유'(milk)로 번역한 것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원문에서 '기름'을 취했다는 내용이 살진 양을 잡았다는 내용보다 더 앞에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 가톨릭 새 성경처럼, 이것을 '젖'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양을 잡아야 기름이나 고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먼저 취한 뒤에 양을 잡았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으로 번역된 '헬레브'를 '젖'이라는 뜻의 '할라브'로 읽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본문에서 잡은 양이 살진 양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살진 양에게서는 털과 젖을 취할 뿐만 아니라 기름이나 고기까지 취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본문을 가톨릭이 '젖'으로 번역하든, 개신교가 '기름'으로 번역하든, 이스라엘 임금들 또는 고관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그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금으로 호의호식을 하였고, 많은 재산과 부를 가진 자들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악행을 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4)

이스라엘 거짓 목자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에제키엘서 34장 3~4절의 내용 중에서 34장 3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한 죄에 대한 지적이었다면, 34장 4절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에 대한 지적이 주로 제시된다. 

본절에 의하면, 목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여러 양들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양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고대 근동의 양치기들은 막대기와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가지거나 양치기 개를 데리고 도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창세31,39; 1사무17,34.35; 예레33,13). 

율법에서도 목동이 돌보는 중에 양을 다치게 하거나 잃거나 한다면, 그것을 주인에게 그대로 배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탈출22,12.13). 

위의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용례를 보면, 양을 직접 치는 사람은 그 양의 주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양치기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양이나 주인의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 목자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양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재산을 보전하는 일에 태만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고 피해를 입힌 악행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에제키엘서 34장 6절과 8절에서 하느님께서 이 양들을 내 양 떼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남부 유다 백성들은 남부 유다 임금이나 지도자들의 백성이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부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인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멸망하게 한 악행을 행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악행이 양들의 본래 소유자되신 하느님의 진노를 자극하여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가장 먼저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로 제시된다. 그 다음으로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란 지적이 나온다.  

여기서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아픈 양'에 해당하는 '하홀라'(haholla)는 수동형과 능동형이란 점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원형 '할라'(halla)의 분사형이다. '할라'(halla)에는 '약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병이 들다'(아프다) 라는 의미도 있다. 

수동형으로 사용된 '한나홀로트'(약한 자)선천적으로 병이 들어서 쇠약하게 된 양을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능동형으로 사용된 '하홀라'(아픈 자) 현재 병이 들어 있는 상태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치료는 지금 걸려 있는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치료해 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시되는 '부러진 양'에 해당하는 '니쉬뻬레트'(nishibereth)의 원형 '샤바르'(shabar)'부서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가 부러져 탈골되거나 없어진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싸매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음에 '흩어진 양'에 해당하는 '한닛다하트'(hannidahath)원형 '나다흐'(nadah)에는 '흩어지다'라는 이미가 있다. 양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양은 목자의 보호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곧바로 맹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 양을 다시 양 무리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무관심하였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양'에 해당하는 '하오베데트'(haobedeth)원형 '아바르'(abar)에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들은 양 무리에서 떠나 있을 뿐 아니라, 거의 죽음 직전에 가 있는 상태의 양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의 상태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병이 들거나 쇠약해진 양들이다. 둘째는, 큰 상처가 나(크게 다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양들이다. 세째는, 양 무리를 떠나 있는 상태로 5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위험에 노출되어 생명이 위협받는 지경에 직면해 있는 양들이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양들이 처한 위험의 정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묘사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양들을 제시하며, 이들을 돌보기는 커녕 포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의 행위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제키엘서를 대하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본절에서 양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점점 심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도를 더해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극한 어려움에 처한 양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악을 행하는 목자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마땅히 심판이 내려져야 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5) 

한글 새 성경'나에게 합당하지'에 해당하는 '엑세스틴 모이'(eksestin moi; It is lawful for me)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포도밭 임자의 행동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하지 않느냐?" (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라는 뜻이 된다. 원문대로 하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였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신다 하여도 그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절대 공의로우며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는 선(善)한 것이기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에 해당하는 '호티 에고 아가토스 에이미'(hoti ego agathos eimi; because I am generous; because I am good)에서 '에고'(ego; I)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이미'(eimi; am)란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에고'(ego)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후하고 관대하며 선한 자가 바로 포도밭 임자(주인)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가토스'(agathos)'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다'는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놀고 있는 자를 고용하여 넉넉한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 자신의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후하다고'를 의미하는 '아가토스'(agathos)대응되는 단어로서 '시기하는'으로 번역된 '포네로스'(poneros; envious; evil)'비열한', '무가치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의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 것을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비록 늦게 포도밭에 왔지만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한데, 이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과 비교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크나큰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본성적 요소가 만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준은 항상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어 입어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감히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맨 먼저 온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오전 여섯 시쯤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일한 일꾼들입니다.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오후 다섯 시쯤부터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입니다.
밭 임자는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품삯으로 줍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는 것은 정당한 항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가르침을 주기 위한 비유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교 사제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그런데 유대교 사제들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 박해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당시의 사제들은 박해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제들 가운데에도 예수님 박해에 가담했던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에, 유대교 사제들이 개종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을 보고, 일부 신자들이 “어찌 박해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신앙인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반발하고 항의했다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뻐하면서 유대교 사제들을 환영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박해자였다가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처음에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그를 두려워했습니다(사도 9,26).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공동체의 형제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신자들을 하루 종일 일한 일꾼으로, 박해자였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뒤늦게 개종하고 신자가 된 사람들을 맨 나중에 온 일꾼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면,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신자를 하루 종일 일한 일꾼으로, 인생 말년에 세례를 받은 신자를 맨 나중에 온 일꾼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똑같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투덜거리고 항의한다면?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3-15)”


이 말은 꾸짖는 말이 아니라 타이르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한...)
어찌 되었든지 간에 맨 처음에 온 이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기 때문입니다.
밭 임자가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최저생계비’를 보장해 주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은 다른 곳에서 놀다가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을 구하기 위해서 고용주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실업 상태에 있다가 겨우 일을 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최저생계비를 받아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꾼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뜻이 됩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을 받거나 못 받거나 그런 차이는 있지만, 받았다면 똑같은 구원입니다.
남들보다 더 우월한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모두가 다 똑같은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원래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 차별도 차등도 차이도 없는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오래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고생했다고 해서, 더 좋은 나라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탈렌트의 비유’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줄 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줍니다(마태 25,15).
종들이 받은 탈렌트는 품삯이 아니라 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할 일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종들과 주인이 셈을 할 때,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받는 ‘상’이 같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들이 받은 진짜 ‘상’은 주인의 ‘기쁨’과 ‘칭찬’입니다.
많은 일을 한 종에 대해서도, 적은 일을 한 종에 대해서도, 주인은 똑같이 기뻐하면서 칭찬합니다.
이것은 포도밭 일꾼들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으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은 ‘능력에 따라’ 더 많은 탈렌트를 받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언뜻 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한 듯 보이지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모두 같은 품삯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대에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생활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그날그날 벌어서 생활해야만 했기에,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나와 일을 시킬 사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아무도 일을 주지 않기에 오후 늦게까지 장터에 서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주인이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똑같은 삯을 준 것은 공평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일할 의무가 있으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요. 이런 이유로 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품삯을 관대하게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봉사한 시간이나 결실보다 봉사의 동기와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늦게 일하러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삯을 정하지 않았지요. 그저 자신들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인의 처분만 바랐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역시 봉사를 한다고 주님께 그에 따른 대가를 바란다면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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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금요일]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마태22,34-40)16.08.19조회 153[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임금에 비유 (마태22,1-14)16.08.18조회 66[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밭 임자 (마태 20,1-16)16.08.17조회 65[연중 제20주간 화요일]부자와 하늘나라 (마태19,23-30)16.08.16조회 50[성모 승천 대축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 (루카 1,39-56)16.08.15조회 47[연중 제19주간 토요일]어린이 (마태오 19,13-15)16.08.13조회 86[연중 제19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태 19,3-12)16.08.12조회 86[연중 제19주간 금요일 ] 용서 (마태 18,21─19,1)16.08.11조회 83[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밀알 한알.(요한 12,24-26)16.08.10조회 83[연중 제19주간 화요일]작은 이 (마태 18,1-5.10.12-14)16.08.09조회 84[연중 제19주간 월요일]성전 세 (마태 17,22-27)16.08.08조회 48[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16.08.06조회 49[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6,24-28)16.08.05조회 52[연중 제18주간 목요일]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16,13-23)16.08.04조회 52[연중 제18주간 수요일]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15,21-28)16.08.03조회 48[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물위를 걸으시다 (마태오 14,22-36)16.08.02조회 51[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오병이어의 기적 (마태14,13-21)16.08.01조회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