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금요일]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마태22,34-40)

2016. 8. 19. 오전 5: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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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금요일]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마태22,34-40)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뼈로 가득 찬 계곡으로 데리고 가시어 마른 뼈들을 살리시며,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자기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예언하게 하신다. (에제 37,1-14)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물음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신다. (마태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제37,1-14)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2ㄹ)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14) 

에제키엘서 37장 12절 이하 14절에서 마른 뼈의 환시를 통한 새로운 확신과 희망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에제키엘로 하여금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환시를 받은 자들을 '내 백성아'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비록 현재 그들의 영육의 상태가 마른 뼈처럼 희망없는 가운데 있지만, 이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선민의 축복을 회복시키실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에제키엘서 37장 1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땅에서 포로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들의 상황을  자신들의 뼈가 말랐다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의탁하고 신뢰하며 살지 못하는 그들의 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무덤 속에 있다고 표현하셨다. 

하지만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그들을 무덤으로부터 끌어내어 나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죽었다는 의미이고, 무덤으로부터 끌어내어 나오게 하겠다는 것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겠다는 의미이다. 

무덤의 비유넓은 계곡 한 가운데 가득하던 마른 뼈들이 힘줄과 살이 붙고 살갗이 붙은 후에 숨이 불어 넣어져 큰 군대가 되게 하신 환시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른 뼈의 소생 비유나 무덤의 죽은 자들의 소생에 관한 비유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영육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른 뼈나 무덤 속의 시신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남부 유다 공동체의 영적인 죽음 상태를 의미하고, 마른 뼈에 숨(생기)이 불어 넣어져 큰 군대로 소생하는 것이나  무덤 속의 시신이 살아 나오는 것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신앙이 생겨 새롭게 변화되며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는 표현이 사용되어 정치적인 해방과 국권의 회복을 보다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여기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예언되는 바빌론 유배 포로 공동체의 정치적 해방은 그들을 억류하고 있던 바빌론 제국이 B.C.539년에 멸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포로 귀환( B.C. 537년, 458년, 444년)이 이루어져 원하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상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적 회복은 그들이 다시 주님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B.C. 516년에 이루어진 성전 재건과  B.C. 432년에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을 들 수 있다. 

한편,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이스라엘의 회복의 영적 측면을 보다 부각시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선민 공동체에 두어 살아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 에제키엘서 37장 14절'내 영을'에 해당하는 '루히'(ruhi; my spirit)원형 '루아흐'(ruah)는 앞의 '숨'(생기)으로도 번역된 단어이다. 

여기서 사용된 '루아흐'(ruah)에제키엘서 37장 1절에서 에제키엘을 이끌고 계곡으로 갔던 것으로 언급된 '그의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 예흐와'(ruah yehwa)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의 영',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은 본 단락이 제시하는 선민의 회복이 단순히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과 국권의 회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민들이 하느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될 것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전에 그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하고 징계 받도록 한 이전의 잘못된 삶이 완전히 청산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백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선민의 회복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하는 새로운 백성들이 될 것임나타내는 새성전과 새로운 예배와 새 땅에 대한 환시를 담고 있는 에제키엘서 40장 이하 48장 까지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22,34-4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7)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8)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39)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40)

원문과 한글 새 성경의 단어 배열 순서가 다르다. 원문'너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너의 온 마음으로, 너의 온 목숨으로, 너의 온 뜻으로'이다. 원문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이 먼저 선언되고, 그 다음'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라는 방법론이 제시된다. 

'사랑해야 한다'로 번역된 '아가페세이스'(agapeseis; you shall love; love)의 원형 '아가파오'(agapao)라는 단어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뜻할 때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와 한없는 순종과 내면적 경외심을 가리킨다. 즉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이전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없는 사랑의 감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신명5,10), 그를 섬기며(신명10,12), 그의 모든 말씀을 실천하는 외적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신명11,22).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이 명령은 죄인을 위해 가장 귀한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당신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의 순종을 의미한다(요한14,15; 14,21; 1요한5,3). 

한편,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서 신명기 6장 5절의 인용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 드릴 때에 이 말씀을 신앙 고백문으로 사용했으며, 이것은 일명 '셰마'(shema)라고 불리웠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외모'를 나타내는 '프로소폰'(prosopon)과 대조되는 단어로서, 가식없는 내면의 진실함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2코린5,12; 1테살2,17). 그리고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yche; soul)'호흡', '생명'이라는 뜻이 있으며,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생명을 가리킨다. 

또한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생각', '뜻', '지각'이란 뜻으로서 이해하고 느끼며 갈망하는 기능으로서의 정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전인격(全人格)을 기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가시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여기서 '첫째'로 번역된 '프로테'(prote; the first)시간적 순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중요성의 경중에 있어서도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그분의 모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분과 친교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영적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 영적, 정서적, 인격적으로 균형있고 충족한 상태로 살아가려면,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해야 하며, 그분의 말씀과 교훈을 성심껏 순종해야 한다. 코헬렛 12장 13절'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라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계시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지 않고, 또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영적, 정서적, 인격적 성숙과 삶의 행복을 성취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이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서 성심성의껏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신명10,13).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와 같다'에 해당하는 '호모이아 아우테'(homoia aute; is like it)에서 '아우테'(aute; it)여성 3인칭 대명사로서 22장 38절의 여성 명사 '엔톨레'(entole; commandment),'계명'을 가리킨다. '같다'로 번역된 '호모이아'(homoia; is like)의 원형 '호모이오스'(homoios)'닮은 사람'(요한9,9), '같은 식'(유다1,7), '같은 곳'(묵시18,18)등과 같이 동등한 두 사물을 비교할 때 사용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와 같다'라는 말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성질이 동일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압축된다는 의미이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께 의무를 행하다 보면, 사람, 특히 부모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마태15,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의 핵심이며,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두 가지 의무는 어떤 면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생활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며, 그래서 사도 요한'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1요한4,20)라고 말한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십계명 중 첫번째부터 세번째까지의 계명을 요약한 것이라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문으로서 십계명 가운데 네번째부터 열번째까지의 계명을 요약한 것이다. 

'이웃'으로 번역된 '플레시온'(plesion; neighbor)가까이 있는 다른 사람이나 친구가리키는 단어이다. 

모세 율법이 주어질 당시의 이 표현동족이나, 함께 거주하면서 유다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외국인들만 가리켰으며,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도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웃의 범위에서 배제시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들은 물론(루카10,29~37), 원수까지도(마태5,44) 사랑해야 할 '이웃'의 개념에 포함시켰다. 

'사랑해야 한다'로 번역된 '아가페세이스'(agapeseis)마태오 복음 22장 37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했을 때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따라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여기서 '율법'으로 번역된 '호 노모스'(ho nomos; the Law)는 율법서인 모세 오경(Torah)을 가리키고, '예언서'로 번역된 '호이 프로페타이'(hoi prophetai; the prophets)예언서(Nebim)을 가리킨다. 

그러나 '온 율법과 예언서'라는 표현은 단지 율법서 예언서 뿐만 아니라 모세 오경과 예언서와 더불어 구약 성경을 이루는 구성 요소인 성문서(Kethubim)까지 포함하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정신이~달려 있다'로 번역된 '크레마타이'(krematai; hang)'크레만뉘미'(kremannymi)직설법 중간태로서 '매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비유적으로 '의존하다', '요약하다'(summarize)는 뜻이다. 

당시 랍비들은 도덕 법규들을 세분화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율법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며, 거기에서 공통적 성격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전통에 입각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모든 율법의 근본 정신이요, 원칙이라고 천명하셨다. 실제적으로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의 성품과 본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근본 정신이기에 사랑이 결여된 율법 준수는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며 위선일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로마13,10), 사랑의 법이 가장 탁월하다고 말했다(로마13,9; 갈라5,14). '경천애인'(敬天愛人) 혹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의 계명은 전체 구약 성경의 기둥이요, 핵심인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계명, 사랑>송영진 모세 신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한다는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바치기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을 조금 바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일”
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놓는다.’는 말은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내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억지로 내놓는 일도 아니고, 빼앗기는 일도 아닙니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놓는 일은 곧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과 ‘계명’이라는 말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을 계명으로 강요할 수 있는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도 계명이니까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사랑’과 ‘계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
또 계명을 무조건 복종해야 할 명령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버려야 할 고정관념입니다.)


1) 사랑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으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싶다면 믿으라고 권고할 뿐입니다.


또 우리가 하느님(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구원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으니까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믿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2) 믿음과 사랑과 계명 실천은 하나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믿고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명 실천도 자기가 원해서 하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사실 계명 자체가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서 만든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계명’으로 드러내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그 사랑을 받는 일이 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계명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계명 실천 자체가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사실상 ‘같은 일’이 됩니다.
하기 싫은 데도 명령이니까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상 실천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계명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계명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계명은 곧 사랑이니까,
“사랑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는 “... 해야 한다.” 라는 표현 때문에
뭔가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싫어도 하여라.” 라는 강요가 아니라,
구원과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중병에 걸려 누워 있는 환자에게,
“살고 싶다면 이 약을 먹어라.” 라고 호소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호소’ 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관한 말씀에 이어서 ‘이웃 사랑’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
두 사랑은 하나이고,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1요한 4,20-21).
이웃 사랑을 ‘둘째’ 라고 표현하신 것은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이 덜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고,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뒤로 미루라는 뜻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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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위선자(마태 23,13-22)16.08.22조회 52[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모세의 자리 (마태 23,1-12)16.08.20조회 48[연중 제20주간 금요일]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마태22,34-40)16.08.19조회 153[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임금에 비유 (마태22,1-14)16.08.18조회 66[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밭 임자 (마태 20,1-16)16.08.17조회 64[연중 제20주간 화요일]부자와 하늘나라 (마태19,23-30)16.08.16조회 50[성모 승천 대축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 (루카 1,39-56)16.08.15조회 47[연중 제19주간 토요일]어린이 (마태오 19,13-15)16.08.13조회 86[연중 제19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태 19,3-12)16.08.12조회 86[연중 제19주간 금요일 ] 용서 (마태 18,21─19,1)16.08.11조회 83[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밀알 한알.(요한 12,24-26)16.08.10조회 83[연중 제19주간 화요일]작은 이 (마태 18,1-5.10.12-14)16.08.09조회 84[연중 제19주간 월요일]성전 세 (마태 17,22-27)16.08.08조회 48[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16.08.06조회 49[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6,24-28)16.08.05조회 52[연중 제18주간 목요일]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16,13-23)16.08.04조회 52[연중 제18주간 수요일]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15,21-28)16.08.03조회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