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모세의 자리 (마태 23,1-12)

2016. 8. 20. 오전 5: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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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모세의 자리 (마태 23,1-12)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삶" --- 2007.8.25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천사가 에제키엘 예언자를 주님의 집으로 데려가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와서 주님의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게 한다. (에제키엘  43,1-7ㄷ)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율법 학자들처럼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에제43,1-7ㄷ)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4)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5)  ~~~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7)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4)

성전 동쪽에 임하였던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관한 묘사이다.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한 문은 예루살렘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에제키엘서 9장 3절에서 성전 문지방에 머물던 하느님의 영광이 10장 18절과 19절에서 성전 문지방을 떠나 커룹들 위에 머물고 있던 곳도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또한 11장 1절 보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으로 에제키엘을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신 장소동쪽 대문이었고, 이어지는 11장 22절~24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완전히 떠나는 장소동쪽 대문이었다. 

또한 새 성전에 대한 환시의 보도인 40장 6절 보면, 이 동쪽 대문은 천사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되었고,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간 곳동쪽 대문이었다. 

에제키엘은 성전 멸망에 관한 보도에서 주님의 영광이 떠나시는 장소였던 동쪽 대문을 통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강조함으로써, 새 성전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의 성격지닌 것으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장면 묘사를 통해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시고 시행하신 이후에, 다시 찾아오셔서 은혜의 회복을 선포하실 것임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특별히 에제키엘 44장 2절에서는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을  영원히 닫을 것을 명령하신다. 이러한 동쪽 대문 폐쇄 명령은 이 성전에서 주 하느님께서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이 성전에 주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히 임재하실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5)

하느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엎드려 있는 에제키엘을 하느님의 영이 데리고 안뜰로 들어가게 하셨다.   

에제키엘서 40~42장에서는 천사가 에제키엘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의 각 건물들을 측량하고 설명하는 일을 하였고, 40장 1절 보면 주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성전 밖, 동쪽 대문 앞으로 인도한 것도 천사, 40장 3절의 표현에 의하면 빛나는 구리와 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이 임재한 성전 안으로 에제키엘을 들어가게 하신 것더 이상 천사가 아니고 하느님의 영이었다.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것은 에제키엘서 3장 12절,14절 등에도 나온다. 거기에보면,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에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영의 강한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은 적이 있다. 

에제키엘서 43장 5절 본문에서 '나를 들어'에 해당하는 '왓팃솨에니' (wathisaeni)는 (일반)능동형이고, '데리고 가셨는데'에 해당하는 '왓테비에니'(wathebieni)는 사역형이다. 

따라서 엎드려 있는 에제키엘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고, 에제키엘이 동쪽 대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간 것성령의 인도나 강력한 역사하심에 의해 따라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은 군대의 웅성거림과 같은 웅장한 소리와 온 땅을 밝히고도 남을 만한 강한 빛으로 압도되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현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정신을 잃다시피 하였을 에제키엘에게 일어설 수 있는 강한 힘을 주셨고, 그 힘으로 인해 성전 안뜰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성전 안으로 들어간 에제키엘은 그곳에 가득 찬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가득 차 있었다'로 번역된 '말레'(malle)탈출기 40장 34절, 3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지시한 대로 만남의 천막(성막)을 다 지은 후에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한 사실을 묘사함에도 사용되었고, 열왕기 상권 8장 10절,11절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완성된 성전으로 주님의 계약궤를 옮겼을 때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구름을 통해 가득 참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용례에서 '말레'(malle)는 두 번씩 반복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에제키엘은 탈출기와 열왕기 상권 저자가 사용한 '말레'(malle)라는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새 성전에 충만한 주님의 영광이 탈출기에서 성막에 임했던 주님의 영광이었으며, 솔로몬의 성전에 가득하였던 주님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또한 탈출기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의 경우에도 주님의 영광이 가득찼던 것은 성막과 성전 건축이 모두 완결된 이후였다. 

이것은 새 성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새 성전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천사에 의한 성전의 각 부분에 대한 측량이 마쳐진 뒤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찼다. 성막이나 성전은 모두, 그 건축물 자체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주님의 영광이 임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이것을 감안할 때, 새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과거에 성전을 떠났던 주님의 영광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새 성전의 완전한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도 이해된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7) 

성소로부터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이 본절인 43장 7절 이하 12절에 다시금 소개된다. 그 가운데 43장 7~9절의 내용은 주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신다는 약속과 더불어, 그 조건으로 성전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처소이므로 거룩함을 훼손하는 죄악을 버리고 거룩함에 관한 성전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43장 7절은 성전이 거룩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먼저 성전에 하느님의 어좌(옥좌, 보좌)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전은 먼저 '내 어좌의 자리(처소)'로 소개된다. 여기서 '내 어좌'에 해당하는 '키쓰이'(kissyi)의 원형 '카싸'(kassa)권력의 자리를 의미한다.  '카싸'창세기 40장 40절에서는 왕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상권 1장 9절에서는 사제가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시편 94장 20절에서는 재판관이 판결을 위해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를 보면, '카싸'(kassa)는 왕이나 재판관이나 사제가 갖는 정치, 사법, 종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에제키엘에서는 '카싸'(kassa)가 총 5회 사용되었는데, 세상 왕의 왕좌를 묘사한 26장 16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시 중에 본 하늘의 보좌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내 어좌의 자리'와 병행되어 제시되는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표현은 역대기 상권 28장 2절, 시편 99장 5절, 이사야 60장 15절에서 모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때 성전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소로 언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발'은 어떤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딛고 살아가는 자신의 거주지와 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것하느님의 발만이 아니고, 발이 상징하는 바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새 성전을 가리켜 '내 어좌의 자리'라고 한 것이나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고 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임재(현존)가 새 성전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 두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댓구를 이루는 반복이다.  '내 어좌의 자리'라는 표현에서 어좌는 모든 권력의 근원인 하늘의 어좌를 의미하므로 하늘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표현에서 발은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땅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내 어좌'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모든 정치, 종교, 사법적 권력을 아우르는 온 우주적 권력을 상징하고, '내 발(바닥)'이라는 표현은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본문은 성전을 하늘과 땅, 즉 온 우주, 혹은 우주에 대한 통치의 축소판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성전은 모든 이들이 와서 경배해야 할 만유의 절대 주권자이며 통치자요, 심판자가 계신 거룩한 장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표현은 주님께서 새 성전에 영원히 현존(임재)하실 것이란 약속이다. 즉 이것은 앞으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단절없는 완전한 하느님의 통치와 백성들의 경배가 계속되는 곳이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에제키엘서 43장 7절의 의미를 종합하면, 43장 7절의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의 임재가 그분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모든 나라와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뿐 아니라, 인간의 사언행위(思言行爲)의 심사와 그 의로움과 불의함에 따라 심판을 단행하실 권력을 갖고 계심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23,1-12)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5)

 마태오 복음 23장 5~7절까지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외적인 경건 과시(5절),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끝없는 명예욕(6절),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7절)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성구갑'으로 번역된 '퓔라크테리아'(phylakteria; phylacteries)의 원형 '퓔라크테리온'(phylakterion)은 모세 율법 중에서 탈출기 13장 1~10절,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등의 네 부분을 작고 긴 양피지 조각에 기록하여 그것을 작은 상자 속에 봉해 넣은 것을 가리킨다. 

유다인들은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말씀(탈출13,16; 신명6,8)에 근거하여 위의 네 부분의 율법의 구절을 기록경문을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서 '넓게 만들고'해당하는'플라튀누신'(platynusin; they make wide; they make broad)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성구갑의 크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시행 초기인 바빌론 유배 포로기 직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성구갑을 달고 다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  과시욕이 지나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더 크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한편, '옷자락 술'로 번역된 '크라스페다'(kraspeda; the tassels of their garments)의 원형 '크라스페돈'(kraspedon)'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리게 장식한 작은 부속물'을 의미한다.  

유다인들은 민수기 15장 37~40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흰색과 청색 실로 짠, 이와 같은 부속물을 겉옷의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마음과 눈이 쏠리는 데로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아 배신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해 주었다(민수15,39).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러한 율법의 정신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으로 '옷자락 술'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이다.



『음성강론』?2012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씀은,
그들이 모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을(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직무 수행과 권위를 ‘인정’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직무 수행과 권위를 비판하신 것도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뜻이 아니고,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은 지켜야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대로 아무거나 다 실행하고 지키면 안 된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은 따라 하면 안 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실에 대해서 변명하는 말도 들으면 안 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이 전하느냐에 따라서 말씀이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모독하는 사람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나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명확해집니다.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과 행실이 다르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과 그들의 ‘행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모르고 하느님의 말씀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보고 그 행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인 줄로 알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경우에는 ‘행실’로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선 먼저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서 말로만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듣는 사람 쪽에서 복음을 거짓말로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우리 교회를 판단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삶’을 살고 있으면 진실한 종교라고 생각하고, ‘거짓된 삶’을 살고 있으면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하고...
이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진실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의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19).
성전 구실을 못하는 성전은 허물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모세의 자리에서 끌어내려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하면,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이 다 해당되지만, 일차적으로는 성직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해당됩니다.
(당시의 유대교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제들과 함께 성직자들 역할을 했고, 종교 지도자로 대우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꾸중과 비판은 성직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은 존경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싫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주교든지 개신교든지 간에 다 싫다고...)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성직자들이 잘못 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넓게 생각하면 교회가 ‘복음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곧 복음 선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에서 ‘참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들에서 더 즐거움을 찾고,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믿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보다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더 희망하고 추구하고,
사랑 실천보다는 이기적인 모습을 더 보이고...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을 옛날의 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당시의 유대교가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회는 어떤가?”(지금의 나는 어떤가?)가 더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말씀’을 제대로 다 ‘실행’하고 있는가?


공동생활의 원리/2012.8.25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 에제43,1-7ㄷ 마태23,1-12

오늘은 공동생활의 원리인 섬김과 겸손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게 공동생활의 어려움입니다.
공동생활에는 비약이나 도약도 없고 왕도나 첩경의 지름길도, 정답도 없습니다.
그냥 평생, 매일 섬김과 겸손을 배워가며 살아가는 길 뿐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면교사로 하여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행함이 없는 가르침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들처럼 언행불일치의 삶이 아니 언행일치의 삶을 살라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특징은 허영과 교만으로 요약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온통 사람들이게 보이기 위한,
또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한 허영과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봅니다.
허영과 교만의 환상 속에 자기를 잊고 실속 없이 껍데기의 삶을 산 이들이요
결과는 공허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반면교사로 하여 섬김과 겸손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섬김과 겸손의 삶은 허영과 교만과는 대조적으로 속이 꽉 찬
실속 있는 충만한 삶입니다. 주님 친히 평생 섬김의 삶을 사셨고
당신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여 아무도 스승이라, 선생님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고,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스승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고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말씀입니다.
이런 철저한 자각이 바로 겸손이며 이의 표현이 섬김입니다.
겸손의 진정성은 섬김의 삶을 통해 들어납니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복음 말미의 두 구절을 통해 주님은 섬김과 겸손이
공동생활의 원리임을 확고히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새삼 공동체 장상은 형제들을 섬기는 ‘섬김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교만으로 낮아지고 겸손으로 높아지는 영적 역설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오늘 저는 1독서 에제키엘의 환시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겸손과 섬김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환시 장면이 성전에서의 거룩한 미사장면 같습니다.
에제키엘의 환시가 주님의 미사전례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영광으로 가득 찼다.”동쪽에서 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흡사 동녘에서 떠오르는 황홀한 태양을,
주님의 집에 가득한 빛은 아침 햇살 가득한 성전을 연상케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 동녘에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은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했습니다.
하여 동쪽을 향해 성전을 지었고,
수도승들은 새벽 밤중에 일어나 기도를 바치며 기다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듯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했습니다.
땅의 성전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통해서 하느님의 겸손을 배웁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천사의 예언이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 가운데 영원히 살아계시어 우리를 섬기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섬기시며 치유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을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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