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임금에 비유 (마태22,1-14)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민족들 사이에서 데려와 정결하게 하고,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실 것이라고 한다. (에제키엘 36,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3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24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28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시편 51(50),12-13.14-15.18-19(◎ 에제 36,25 참조)
◎ 정결한 물을 뿌려 모든 부정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비유하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신다. (마태오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제36,23-28)
"나는 너희는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 가겠다.(24)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5)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26)
앞선 에제키엘서 36장 21~23절은 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의지표명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회복하여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음을 밝혔다.
이제 에제키엘서 36장 24절 이하 36절에서는 당신 이름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선민 이스리엘의 회복에 대한 일방적 약속이 선언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절은 포로 귀환에 대해 묘사한다.
그런데 유배로 끌려간 포로민들을 바빌론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는
지리적 이동과 정치적 해방은 하느님의 궁극적 구원의 과정에서 볼 때는
서곡에 불과하지만, 영적 새로워짐을 통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창조에 대한
묘사가 36장 25절부터 에제키엘서 마지막 절까지 계속하여 기록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본절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나 경제적 부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과 하느님 이름의 명예 회복에
그 초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5)
에제키엘서 36장 24절에서는 포로된 선민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 약속되었다.
36장 25절 이하 36절에서는 고국에 돌아간 후, 회복된 모습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약속의 형태로 제시되는 회복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자세와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36장 25절에서는 정결 의식을 소재로 해서 선민의 변화된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이 정결 의식은 레위인들이 제사 의식을 돕는 일을 하기 전,
즉 직무에 임명되기 전에 앞서서 레위인들에게 속죄의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고,
레위인들을 속죄 의식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식이다(민수8,7).
이러한 정결 의식은 에제키엘서 36장 17~19절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에제키엘서 36장 17~19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이유가 그들이 부정한 행위로 땅을 더럽혔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그들이 땅을
더렵혔던 행위를 했던 자들이기 때문에, 정결 의식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36장 25절 후반부에서 '너희의 모든 부정에서'에 해당하는
'믹콜 투메오테켐'(mikol tumothekem)의 원형 '투메아'(tumea)는
17절의 '마치 달거리하는 여자의 부정과 같았다'란 표현에서
'부정'에 해당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또한 36장 25절 후반부의 '모든 우상에게서'에 해당하는 '우믹콜 껄룰레켐'
(umikol gllullekem)이라는 표현에도 36장 18절의 '우상들 때문에'라는
표현과 동일하게 '껄룰'(gllul)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본절에서 '~으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과 함께 사용되어
정결의식을 행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두 가지 내용, 즉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의
정결과 우상 숭배로부터의 정결은 모두 에제키엘서 36장 17,18절에 기록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했던 두 가지 죄악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시되는 정결 의식은 가나안 입성을 위한
정결 의식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본절에서 제시되는 정결 의식은 단지 과거에 행했던 부정한 일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행한 과거의 죄에 대한 속죄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그런 잘못을 행하지 않는 자들로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워짐(거듭남)의 의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으로부터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는 부정한 일을 행하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 에제키엘서 36장 26절, 27절이 말하는 새로운 영과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로 씻어 정결케 하는
본절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전서 6장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지 못할 온갖 죄를 행하던 이방인들이, 코린토 교회의
성도라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행위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의 의미하는 것과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레위인들의 정결 예식 자체가 하느님께의 헌신과 새로운 직무를 맡아
출발하는 예식(봉헌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본절은 과거의 죄로부터의
속죄와 더불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사명에 충실한, 헌신된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바빌론에서 귀환한 남부 유다 백성들이 맑은 물로 뿌림을 받아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이전의 더러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며, 아울러 선민으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6)
36장 25절에서는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 백성에게 행할 정결 의식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과거의 죄를 청산한다는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36장 26절과 27절에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이 주어져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내가 너희에게 주고'로 직역되는 '웨나탓티 라켐'(wenathathi lakem)과
'내가 너희 안에 넣어 주겠다'로 직역되는 '엣텐 뻬키르 뻬켐'
(ethen beqirbekem)에서 강조하는 것은 새 마음과 새 영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이다.
36장 24절과 25절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이나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는데에서 나오는 죄악을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느님과 자신을 분리시켜 악의 세계로
점점 더 빠져드는 악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난 날의 잘못을 용서받아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다고 할지라도,자신의 힘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께로부터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야만 하는데,
36장 2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본문에는 '새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 하다쉬'(leb hadash)와
'새 영'에 해당하는 '웨루아흐 하다샤'(weruah hadasha)가 나온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leb)는 판관기 16장 25절에서는 인간의 감정의 자리로 제시되고,
열왕기 상권 3장 9절에서는 사리를 판별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의 자리로 제시되며,
욥기 27장 6절에서는 사람의 윤리적 양심의 자리로 제시된다.
구약 성경도 사람은 창세기 20장 5절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통해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길 수 있으며, 반대로 창세기 8장 21절이 지적하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대항하고 범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윗은 바쎄바를 범한 뒤에 예언자 나탄이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
시편 51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내면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시편51,12)
또한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ruah)는 숨이나 바람 혹은 하느님의 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인간의 기질이나 성질이나 정신과 같은 의미로서
마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루아흐'가 창세기 41장 8절에서는 꿈을 꾼 파라오의 번민하는 마음으로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여호수아 2장 11절에서는 예리코 성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에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의 용례에서 '마음'(레브)와 '영'(루아흐)이라는 단어가
본문처럼 한 문장에 함께 사용된 경우에는 서로 별개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기 보다는, 지(知), 정(情), 의(意)를 포괄하는 장소이며,
인격(人格)과 인성(人性)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총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들어,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는
에제키엘 18장 31절의 내용처럼, 이 표현은 자신의 삶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께서 회복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신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그들의 내면과 인격에 부어주시겠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의 새로움은 이전 것들과의 단절된 새로움이 아니라
이전 것들과 연관된 새로움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절에는 '돌로 된 마음'에서 '돌로 된'에 해당하는
'에벤'(eben)은 '돌'이라는 의미이고, '살로 된 마음'에서 '살로 된'에
해당하는 '빠샤르'(bashar)는 '고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돌로 된 마음'(굳은 마음)이란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지시하심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딱딱한 돌과 같은 마음이고,
'살로 된 마음'(부드러운 마음)이란 하느님의 지시와 권고하심에
대해 민감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바뀐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선민은 새 계약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받은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36장 27절에서는 하느님의 영을 넣어 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하느님께서 선민에게 '성령'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순종하는, 성숙하고 헌신된 인격과 인성을 구비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22,1-14)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11~12)
마태오 복음 22장 11절은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접속사 '데'
(de; and; but)로 시작한다.
이것은 여기서부터 또 다른 국면의 사건이 전개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임금이 등장하여 임금 중심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잔치가 본격화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영적으로 천국 잔치의 본격적 시작 시점인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통치는 지금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을
본격적인 천국의 잔치에서 예복을 입은 자에게는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날이
될 것이고,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는 큰 슬픔의 날이 될 것이다.
여기서 '예복'으로 번역된 '엔뒤마 가무'(endyma gamu; wedding clothes)는
'결혼식 때 입는 옷'을 뜻한다.
본래 '엔뒤마'(endyma)는 '겉옷'이나 '외투'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옷 위에 덧입는 옷이다.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에는 혼주가 나누어 주는 예복을 입어야만 했다.
이들에게도 분명히 임금이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창세45,22; 판관14,12).
하지만 한 사람이 이 예복을 입지 않은, 너무나 무례하며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임금의 잔치 석상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심판의 날에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갈라3,27),
자기 육(肉)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대신 성령의 능력을
얻어 입어서(갈라5,22~24) 의로운 행위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묵시19,8).
한편,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을 향해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친구'로 번역된 '헤타이레'(hetaire; friend)는 '헤타이로스'(hetairos)의 호격이다.
'헤타이로스'(hetairos)는 다정한 느낌의 '동료', '동무'를 뜻하기도 하지만(마태11,16),
문책과 심판의 대상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포도밭 임자가 품꾼 중에 원망하는 자들을 부를 때 이 단어를 사용했고(마태20,13),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배반하기 위해 오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부를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마태26,50).
따라서 여기 본문의 '친구'도 카리옷 사람 유다처럼 거짓으로 하느님의 나라의 공동체 안에
몸붙이고 있으면서도, 의(義)로움을 좇지 않고 악(惡)을 고집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면 무방하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로 번역된 '에피모테'(ephimothe;
was speechless)의 원형 '피모오'(phimoo)는 '재갈로 입을 막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임금의 질문 앞에 마치 입에 망을 씌운 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임금이 예복을 준비하여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으며, 결국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표현은 최후의 심판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지엄하신 위엄과 그분의 책망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이 겪게 될 비참한 운명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혼인 잔치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마태오복음 22장에 있는
‘혼인 잔치의 비유’와
바로 앞에 있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는 모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아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과 은총을 잃게 되었고,
그리스도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소작료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종들을 초대받은 이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뜻은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소작인들이 종들을 매질하거나 죽인 일,
또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종들을 때리거나 죽인 일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는커녕 반역죄를 지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인이 포도밭을 다른 소작인들에게 준다는 내용과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임금이 다른 사람들을 새로 초대한다는 내용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과 은총이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갔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의
비유’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종들은 임금의 지시대로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왔습니다(마태 22,9-10).
즉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고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랬는데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납니다(마태 22,11-13).
“갑자기 불려 들어갔는데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쫓겨난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혼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혼인 예복을 입을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초대를 받자 바로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붙잡혀서 끌려간 사람들이 아니라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초대하면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니면, 초대받기를
갈망하면서
미리 예복을 입고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가 갑작스럽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연상됩니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3-14)”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마르 11,20).”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은 무화과나무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일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이용해서 가르침을 주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아무도 지금은 제 철이 아니라고(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부르시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즉시 응답해야 한다는 것.
(‘죽음’을 부르심으로 생각하면 이 가르침이 바로
실감납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어도 초대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했다면 입어야 할 예복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복 입기를 거부하는 것은 초대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은 참석했더라도 예복을 안 입었다면 참석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충실한 신앙생활,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합니다.
혼인 예복은 잔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입고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한 번 응답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즉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내용을 보면,
혼인 예복을 안 입은 사람도
일단 잔칫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태 22,10-11).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다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고, 잔칫방에 들어가긴 했지만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닌 상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잔칫방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방과
잔치 음식을 먹는 방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비유에 나오는
‘잔칫방’에 들어가는 일은 지상의 교회에 들어가는 일로,
최종적으로 잔치 음식을 먹게 되는 일은
완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로
해석됩니다.
즉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부 종파에서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21).
그 실행이 바로 ‘혼인 예복’을 입는
일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 끝에
있는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라는 말씀은, 신앙인들 모두를 향해서 말씀하신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