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열 처녀에 비유 (마태25,1-13)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1코린 1,17-25)
형제 여러분,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33(32),1-2.4-5.10-11(◎ 5ㄴ 참조)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시며,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마태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코린1,17-25)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8)
코린토 1서 본론의 서두인 1장 10-17절은 코린토 교회 내의 분열의 실상과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내용이다.
이제 이어지는 18절 이하부터 4장 21절까지, 하느님의 절대적 지혜로 된 '십자가에 관한 말씀'<십자가의 도(道)>의 유일성에 대한 가르침인데, 이 논리를 가지고 몇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분열이 부당하며 불의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 첫번째 단락인 1장 17절부터 1장 25절까지는, 특히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한편,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르'(gar)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럴 경우, 본절은 앞서 17절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오로가 말재주(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십자가에 관한 말씀'<십자가의 도(道)>가 하느님의 힘(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십자가의 도(道)>로 번역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루'(ho logos gar ho tu stauru; for the preaching ot the cross)는 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17절에 언급된 '소피아 로구'(sophia logu) 즉 말의 지혜(말재주)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오로는 이러한 대조적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말의 지혜' 곧 철학적 논증 등에 대해서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코린토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다.
복음은 말의 지혜나 철학적 논증에 머무를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갈라3,1). 이러한 성격을 갖는 복음에 대한 평가나 결과는 이중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구원을 받을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힘(능력)이 된다(2코린2,15-16참조).
여기서 '멸망할'로 번역된 '아폴뤼메노이스'(apollymenois)는 '멸망시키다','파괴하다'란 뜻을 지닌'아폴뤼미'(apollymi)의 현재 분사형이며, '구원을 받을'로 번역된 '소조메노이스'(sozomenois) 역시 '구원하다'를 뜻하는 원형 '소조'(sozo)의 현재 분사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재 분사는 지속적임을 보여주므로, 이러한 표현은 파멸의 길과 구원의 길에 서 있는 자들의 상태가 영구적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바오로는 본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이루어지는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이 날카롭게 대립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힘'로 번역된 '뒤나미스 테우'(dynamis theu)는 로마서 1장 9절에 등장하는 것과 동일한 표현으로, '어리석은 것'(모리아; moria;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1코린4,20).
즉 바오로에게 있어서, 어리석은 것 즉 미련한 것은 '말재주'나 '하느님의 지혜'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능력)과 대조된다. 이것은 바오로의 독특한 복음에 대한 이해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미스'(dynamis)는 신체적,지적,영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지칭하며, 바오로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는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전능함과 생명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힘과 권능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말이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의 초월적이며 생명력을 갖는 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25,1-1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3~4.9)
마태오 복음 25장은 24장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사흘 전에 주신 올리브산에서의 말씀이 계속되는 부분으로서, 특히 도둑의 비유, 두 종의 비유인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태24,42~51)와 더불어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비유란 '열 처녀의 비유', '탈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임금의 비유'를 말한다.
여기서 '천국은 마치 ~~에 비길 수 있다'는 것은 천국이 열 처녀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상황에 비유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의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신랑의 집이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 장에 있어서의 혼인 잔치는 어느 곳에서 벌어졌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혼인 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 신랑이었던 사실(11~12절)에 비추어 보면,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베풀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혼인 잔치가 신부 집에서 신부 집에서 베풀어졌다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요청을 거부하는 주체가 신랑이 아닌 신부의 아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가 어디서 열렸는지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혼례식은 보통 해가 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 문 밖에 나가서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당도하면 영접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에 가는 시간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다.
특히 본문에서 신랑이 예측치 못한 시간에 온 것이 강조되는 것은 종말, 또는 모든 성도들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예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가 들고 나간 '등'으로 번역된 '람파다스'(lampadas)는 수지질의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등불, 또는 심지를 꽂아서 쓰는 속이 등근 접시나 기름병을 의미하는 명사 '람파스'(lampas)의 목적격 복수로서 '여러 개의 등'이다.
원문에는 이 단어 뒤에 새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단어 '헤아우톤'(heauton)이 있다. 이 '헤아우톤'(heauton)은 여성 3인칭 복수 소유격 재귀 대명사로서 '그녀들 자신들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열 처녀는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의 등을 들고 나갔다.
여기서 '나간 장소'가 신부의 집인지, 처녀 자신들의 집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은 이 비유의 전개에서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본 비유에서 '신랑'으로 번역된 '뉨피우'(nymphiu)의 원형 '뉨피오스'(nymphios)라는 단어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11절). 따라서 비유에서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신부가 아닌, 들러리 처녀 열 명이다.
당시 신부의 들러리는 신부의 친구들이 맡았으며, 들러리들이 드는 등불은 모두 열 개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열을 이상적인 숫자, 완전 숫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당에서의 공식 집회도 열 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도 그러한 풍습에 따라 들러리 처녀들이 열 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열 처녀로 상징되는 '모든 성도'가 대비하고 준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 앞에서 단 한명도 열 처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슬기로운 처녀가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모라이'(morai; foolish)의 원형 '모로스'(moros)는 신중하지 못하고 예측 능력이나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슬기로운'으로 번역된 '프로니모이'(phronimoi; wise)는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분별력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쓰인 동사 '에산'(esan; were)은 반복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이것은 신부의 들러리 처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항상 그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다섯 처녀들은 항상 신중하지 못하고 선견지명이 없는 자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평소처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향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며, 반대로 다른 다섯 처녀들도 평소의 삶의 자세가 사려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신중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어떠한 자들로 드러날 것인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이제 마태오 복음 25장 3절에는 열 처녀들이 왜 어리석고 슬기로운지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밝힌다. 즉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등은 물론 기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준비했을 뿐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메트 헤아우톤'(meth heauton; with them)은 '그녀들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녀들 자신들 곁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들러리 처녀들이 등을 밝힐 여분의 기름을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충고해 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엘라이온'(elaion; oil)은 '올리브 나무'(olive tree)를 의미하는 '엘라이아'(elai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팔레스티나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로서 등불을 밝히고(2열왕4,10) 병을 치료하는데(루카10,34), 그리고 귀한 손님의 머리에 부어 예의를 표시하는데(루카7,46) 사용되었다.
이 기름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믿음'을 상징한다고 보고, 어떤 학자는 믿음에 대응하는 '선행'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는 기름이 성별 의식에 사용된 물질이라는 것과(즈카4,12)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다(루카4,18)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름은 내면적 신앙의 모습인 '성령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4절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왜 슬기로운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그릇'으로 번역된 '앙게이오이스'(anggeiois; jars)의 원형 '앙게이온'(anggeion)는 플라스크와 같은 휴대용 병을 말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올 것을 대비하여 등 말고도 여분으로 플라스크 같은 병을 하나 더 준비하여 거기에 기름을 담아가는 준비성을 갖추었다. 그래서 설사 기름이 다하여 등불이 타다 꺼지더라도 여분의 기름으로 계속해서 등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5절에 '신랑이 늦어지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재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체되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 2서 3장 9절이 이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준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도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음을 베드로 2서 3장 3절과 4절이 밝혀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와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7절에서 '우리 등이 꺼져 가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오시는 역사의 깊은 밤중에 성령의 불길이 소멸해가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9절의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라는 표현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면 둘 다 등불을 켤 수 없을 것이기에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 오시는 순간에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는 말로서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에 있어서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모자란 기름을 사러가는 역할도 그 누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 당대 팔레스티나에서는 결혼식을 대개 밤에 신부의 집에서 올렸습니다. 신랑은 축하를 많이 받으려고 먼 길을 택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행렬해 갑니다. 그러다 보니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예측하기 어려웠지요.
한편 신부는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대신 신부의 친구들이 마을 어귀에 나가 신랑과 그 일행을 맞이하는데, 언제 올지 모르기에 밤새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다 신랑의 친구 하나가 먼저 와서 “저기 신랑이 온다.”라고 외치면, 그제야 등에 불을 밝히고 나가 신랑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이지요. 복음을 통해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삶에 있어 갑자기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이지요. 날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조금씩 닦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남에게 빌릴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처녀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지요.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지 않았습니까? 언뜻 보면 사랑의 정신에 어긋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나눠 주고 빌려 줄 수 있는 것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것 역시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재물은 빌려 주고 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빌려 줄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언제 어디서 뵙게 될지 모르는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1-5).”
여기서 ‘등’은 신앙인을
뜻하고, ‘기름’은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의 겉모습은 같습니다.
양쪽 다 신랑을 기다리고
있고,
등을 가지고 있고, 등불을 켜놓고 있습니다(마태 25,8).
신랑이 늦어지자 졸다가 잠이 드는 모습도 같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이 꺼졌을 때를 대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준비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기본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대비하는 내적인 신앙생활은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 비유의 내용 안에서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1-12).”
그 당시에 종말과 재림이 곧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
일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간다는 말은,
종말이 곧
온다고 생각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일은 하지 않고’ 라는 말은,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을 포기하고 종말과
재림만을 기다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남의 일에 참견만 한다는 말은,
종말이 곧 온다는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2) ‘어리석은 처녀들’이
‘지금’ 등을 켜놓고 있는 모습만큼은
슬기로운 처녀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처녀들을,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긴
하지만,
속으로는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보다
지금의 인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세보다 현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신앙생활을 잘하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세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내세를 생각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이
등불을 한 번 켤 수 있는 기름만 가지고 있고,
그 이상의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일은
잘하지만,
사랑 실천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21).
사실 사랑은, 이만큼만 해도 된다고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것을 거절했다(마태 25,9).
그러면 슬기로운 처녀들도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부족한 모습이 아니라,
‘사랑 실천’도 ‘회개 실천’도 각자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10).”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랑이
왔을 때 그 자리에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자리에 있었고,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잘
준비하고 있다가 재림하신 주님을 맞이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 자리에 없었고, 그래서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갑니다.
(준비하지 않은 채로 주님을 맞이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가느라고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방심하고 있다가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지면 그때서야 후회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고, ‘지금’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날이 되었을 때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뒤늦게 행동하긴 했지만 그래도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름을 사러 간 것이니
정상참작을 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마지막 심판입니다.
심판받을 준비는 심판 직전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종말과 심판이 닥치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고,
정상참작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종말, 재림,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만으로 막연하게 짐작할
뿐입니다.
모르니까 실감이 나지도 않고, 그다지 절박감이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먼 훗날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고, 마치 딴 세상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우리를 방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조심해야
하고,
“깨어 있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종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각
개인의 종말은(죽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후회만 남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지금’, 그리고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