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열병 (루카 4,38-44)
바오로 사도는 “바오로 편이다, 아폴로 편이다.” 하고 다투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는데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말한다. (1코린 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시편 33(32),12-13.14-15.20-21(◎ 12ㄴ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땅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보신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빚으시고, 그들의 행위를 속속들이 헤아리신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병자들을 고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 (루카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코린3,1-9)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6)
코린토 1서 3장 6절의 주어로, '나', '아폴로', '하느님'이 각각 등장하고, 서술어로 '심고', '물을 주었습니다', '자라게 하신'에 해당하는 세 동사가 등장하여 복음 전파의 방편과 본질을 잘 보여준다.
먼저 '나' (ego)에 해당하는 사도 바오로가 한 일은 심는 일이다. 여기서 '심고'로 번역된 '에픽튜사'(ephykteusa)는 '심다'는 뜻을 지닌 '퓌튜오'(phyteuo)의 과거형으로 사도 바오로가 과거 코린토에서 활동한 최초의 복음 선포자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것은 로마서 15장 20절에 나오는 "이와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 원칙을 상기시킨다. 반면에 아폴로는 나중에 코린토에 도착해서 복음 전파 활동을 계속했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이런 사실은 '물을 주었습니다' 로 번역된 '에포티센'(epotisen)이란 표현이 잘 보여준다. 이 동사는 코린토 1서 3장 2절에서도 등장했던 동사로 '포티죠'(potizo)의 과거형이다. 이것은 아폴로의 활동 역시 과거에 있었던 일이며, 사도행전 18장 24절에서 19장 1절에 언급된 아폴로의 선교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와 아폴로가 심고 물을 주었을지라도, 자라나게 하신 이는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자라나게 하신'으로 번역된 '에윅사넨'(eyksanen)은 '늘리다', '증가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욱사노'(auksano)의 미완료형이다.
앞선 두 동사가 과거형인 반면에 이 단어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자라나게 하는 하느님의 활동이 지금도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는 본절과 같은 식물 재배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과 아폴로의 코린토 선교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하느님의 활동은 지금도 계속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코린토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절대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언급함으로써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인들이 바오로파와 아폴로파를 만들어 바오로와 아폴로를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전혀 타당성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각 파의 우두머리의 우두머리 됨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사목자들의 위상을 오용하고 있는 코린토 교회를 향해 자신과 아폴로와 같은 사목자들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가치, 즉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 가치를 단호하게 부인한다.
농사에서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이 식물 생장의 효율을 위해서 필요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 조건은 아니다. 이처럼 교회에서의 사목자들의 행위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것이 결코 성도들의 구원에 있어 절대적 조건은 아니며 부수적 사항일 뿐이다. 농사에 있어서나 교회 사목에 있어서나 생장의 절대적 핵심 원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밖에 안계시다.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오로와 아폴로는 생장에 있어서 절대적 역할를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역할에 따라 분업하여 돕는 일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린토 교인들은 이를 망각하고 각자가 존경하는 사목자들에 대해 독자적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을 자신의 자랑거리나 추종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교 활동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아니고, 단지 하느님의 일꾼으로 사용된 자들을 우두머리로 삼아 분쟁한 코린토 교인들의 처사는 본말을 전도시킨 어리석은 행위이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있어서 사도 바오로의 심는 일과 아폴로의 물주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즉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0장 14절에서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 라고 말하는 동시에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농부가 심지않고 물주지 않으면서 추수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입을 벌리고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나무에 열매가 저절로 달려서 입으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처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오로가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고 새 생명을 양육하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생명의 창출과 성장의 궁극적인 제1원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을 특정 당파의 우두머리로 만들지 말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시며 보존자이신 하느님께 오히려 관심을 집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코린토 교회의 탄생과 성장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사목자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손이 아니라 손에 잡힌 도구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느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서 하느님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교만의 극치이며, 속화의 절정이고, 자신을 하느님으로 만드는 우상 숭배인 것이다.
무릇 사목자는 요한 복음 21장 15절에서 19절에 나오는대로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양떼가 아니라 예수님의 양떼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잘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양떼들은 인간 사목자, 인간 은사자, 인간 설교자를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단지 주님의 것을 관리하는 도구요, 종일 뿐이며, 그들 뒤의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회안에 누구 누구와 친하고, 누구 누구파, 누구 누구의 사람, 누구 누구의 식구, 누구의 가족, 누구의 추종자들이란 말들이 없어진다.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4,38-44)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0)
루카 복음 4장 40절은 고통과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셔서 그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치유해 주신 예수님의 자상함을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특히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번역된 '헤니 헤카스토'(heni hekasto; each one; everyone)는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이 병자 중 어느 한 사람도 지나치지 않고, 그들 각각의 머리를 감쌌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특히 '손'에 해당하는 '타스 케이라스'(tas cheiras; his hands)는 복수형이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병자들의 머리를 안수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병자들은 두 손을 통해 전해오는 따뜻하고 자비가 많으신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했을 것이다.
안식일 하루 종일 복음 선포에 힘쓰신 예수님께서는(루카4,31~39) 해가 져 피곤하셨을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을 찾아 모여든 병자들의 무리 사이에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일일이 안수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통상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안수)가 자신의 죄악을 동물에게 전가시키거나(탈출29,15.19) 증인들이 죄인을 돌로 치기 전에 그 사람에게 죄를 확정하는 방법으로(레위24,14) 사용되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안수'를 하느님의 은총을 전가하는 방법, 치유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수'('타스 케이라스 에피티테이스'; tas cheiras epititheis; laying his hands on)를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이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강하게 심어 주고자 하셨으며, 그 안수 행위를 통해서 당신께서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건강>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셔서
쫓아내셨다는 말은, 시몬(베드로)의 장모를 괴롭히고 있는 병마(病魔)를 쫓아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열이 마귀에게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40).”
아마도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온 것은 그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병고’는
인간을 괴롭히는 고통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고통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병고보다 더 큰, 다른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앞의 시몬의 장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자들을 ‘구원’하신 일입니다. 즉 치유를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구원의 은혜, 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하신 일도 아니고, 복음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하신 일도 아니고,
그 자체가 복음 선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의
치유만을 원해서 몰려들었고, 몸이 치유된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습니다(루카
4,42).
그것은 의사로서 병을 고쳐주는 일만 하면서 계속 머물러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여기서 ‘다른 고을’이라는 말은 ‘모든 고을’을 뜻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고을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 가셔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다른 고을에도’
라는 표현에는 ‘이 고을에서 했듯이’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고을’에서 하신 일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일로만 보였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몸의 병을 고치는 일은 그 구원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전인적인 치유의 은총’을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병자
자신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 은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즉 죄 속에 있는 것은 영혼이 병든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병들어 있는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물론 병자 자신도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병든 사람들만 있는 곳, 천국은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지만, 몸만 건강해지고 영혼은 건강해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5-9).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이
안식일 규정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걸자(요한 5,10), 예수님 때문에 그랬다고 예수님을 신고합니다(요한 5,15).
그가 그러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배반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몸은 건강해졌지만 영혼은 다시 건강을 잃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병’은
악(惡)이고 고통입니다.
건강은 선(善)이고 좋은 일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영혼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생 동안
어떤 병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건강했고 강인했지만, 그의 몸은 그 병 때문에 많이 약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코린 12,7).”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바오로 사도가 자만심에 빠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자신은 그 병을 자만심에 대한 경고로 삼았습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병고에 시달렸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3).”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신심 깊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이지요.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 주자 즉시 시중을 들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감사의 예를 다하는 자세이지요.
당연한 행동이지만 실생활에서 간과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주님께 절박하게 매달리지요.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해결되면 그만 하느님께 소홀해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하느님께 받은 것이 있으면, 하느님을 위해 또 다른 봉사를 해야만 합니다.
또한, 오늘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활동을 마치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활동으로 기도를 대신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활동도 기도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와 활동을 병행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머무르고 싶은 점은, 예수님께서 또다시 길을 떠나셨다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온갖 병을 다 고쳐 주셨기에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머무르신다면 온갖 대우를 다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새로이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도 늘 새로운 임무를 받습니다. 한 가지 일을 끝내고 이제 좀 쉬려 하면 주님께서는 또 다른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까? 피하고 싶기만 하지요. 하지만 새로운 일을 늘 고맙게,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결국, 나 자신이 영적으로 더욱 튼튼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