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사람 낚는 어부 (루카 5,1-11)

2016. 9. 1. 오전 5: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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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사람 낚는 어부 (루카 5,1-11)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 1코린 3,18-23)
형제 여러분,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시편 24(23),1-2.3-4ㄱㄴ.5-6(◎ 1ㄱ)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기적을 보고 놀란 시몬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하시자 시몬과 그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코린3,18-23)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8)

코린토 1서 3장 18절에서 23절까지 사도 바오로는 주제를 급격히 바꾸어 이미 코린토1서 1장 18절에서 2장 16절에 논의한 바 있는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코린토 교인들의 분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원천에 대해 밝히는 본 단락을사도 바오로는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논증을 할때 흔히 사용하던 냉소주의적 스토아 학파의 '통렬한 비난'(diatribe)이란 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속여서는'으로 번역된 '엑사파타토'(eksapatato)'속이다(decieve), '판단을 흐리게 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엑사파타오'(ekasapatao)의 현재 명령법이다. 이것이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메데에스'(medeis)와 더불어 사용되어 코린토 교인들 일부가 현재 스스로에게 속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이같은 코린토 교인들의 형태를 엄중히 경고한다. 사실 인간은 약하고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스스로에게 속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을 속이는 대표적인 일이 스스로 지혜있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사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모든 지혜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사도바오로가 이들에 대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적 지혜를 사랑하는 코린토 교인들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은 세상적 지혜를 기준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평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분열했다는 면에서, 스스로 지혜있다고 착각한 자들이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코린토 교회의 위험은 세상적 지혜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며 그러한 자신을 스스로 현명하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설득력에 의존하는 논증 방식으로 또는 인간과 자아에 근거를 둔 생활 방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적 지혜에서 벗어나 더 높은 하느님의 지혜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참된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죄스러운 이 세상에 근거를 둔 인본주의적 지혜를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로마10,3; 필리3,6~9참조). 

코린토 교인들의 문제는 성도가 되는 일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자가 후자로 개선되거나 발전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사도 바오로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여기에 코린토 교회의 분쟁의 원인이 숨어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은 것이고 세상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코린토 교인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이'역설적 대립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어쩌면 그들은 교회와 세상을 둘 다 높이 평가하는 지혜에 자신들이 도달했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교회내의 상황을 직시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지혜는 영적 어리석음이며, 세상에 대한 어리석음은 영적 지혜라는 지적을 통하여 이 세상의 지혜를 내세워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어야 함을 교훈한 것이다.


2013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고기잡이 기적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보시자마자 바로 제자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요한 1,36),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날 예수님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9).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는데,
안드레아는 자기 형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고,
예수님께 형을 데려갔습니다(요한 1,40-42).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 앞에
시몬(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루카 4,38-39).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을 숙소로 사용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적어도 몇 달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몇 달은 어부들에게는 준비 기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가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간,
또는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따르기 전에
자기 인생을 정리하면서 부르심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런 준비 기간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은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었고,
또 제자들 쪽에서도 즉흥적으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를 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끝까지 가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가지 마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기 전에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지 않더라도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전체 신앙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기를 희망한다면,
잘 준비하고 전력을 다 해서 끝까지 그 길을 가도록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가다가 중간에 멈추면 처음부터 안 간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심사숙고’는 끝까지 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어부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어부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갑니다(루카 5,11).
그 많은 고기도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버리려고 그 많은 고기를 잡은 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버리게 될 고기를 잡게 하셨을까?
(실제로는 쓰레기를 버리듯이 버린 것은 아닐 것이고,
가족이나 다른 어부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부들이 지난밤에 ‘얕은 데’에서 고기를 잡았음을 암시합니다.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하면,
어부들이 ‘얕은 데’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는 인생에서는
얻는 것도 남는 것도 없음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들이 예수님의 지시대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은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에서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어부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일은
그들이 사도로서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한 가르침이 됩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사람을 낚는) 사도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얻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그런 깨달음을 얻은 어부들은
아무런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계속 그렇게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면?
그랬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겠지만,
부르셨더라도 그들이 응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고기를 많이 잡은 기적은 일종의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재물을 섬길 것인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을 섬길 것인가? 를 선택하라는 시험.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도약시키기 위한 시련.)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부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바늘구멍을 빠져나간 낙타’가 되었습니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5,1-11)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스승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epistata; master)는 신약 성경에서 루카 복음사가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이다(루카8,24.45; 9,33.49; 17,13).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적으로 '선생'(teacher)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나 율법 교사에 대한 존칭어인 '랍비'(rabbi)라는 단어보다는 '에피스타타'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에피스타타'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7장 13절의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제자들의 입으로 고백된 경우처럼, 이 용어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느껴서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불렀다. 그러나 이 호칭은 기적의 체험 후에는 신앙 고백적 호칭인 '퀴리에'(kyrie) 즉 '주님'(Lord)으로 바뀐다(루카5,8).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데'(de)는 여기서 'but' 혹은 'nevertheless'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전문 어부로서 고기잡이와 관련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또 날이 밝은 아침(오전)에 고기가 없는 깊은 데로 저어 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베드로에게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제가 ~내리겠습니다'로 번역된 '칼라소'(chalaso; I will let down)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자신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데, 마지 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에피~토 레마티 수'(epi ~ to remati su; at your word; because you say so)'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승님의 말씀'루카 복음 5장 4절의 명령 뿐만 아니라 루카 복음 5장 3절기록된 '가르침의 말씀'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진실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in spite of)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믿음은 평소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의 성품과 덕성을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구원의 배에 오를 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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