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루카 8,4-15)

2016. 9. 17. 오전 5: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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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루카 8,4-15)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를 묻는 이들에게,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난다고 말한다.(1코린 15,35-37.42-49)
형제 여러분, 35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시편 56(55),10.11-12.13-14(◎ 14ㄷㄹ 참조)
◎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리라.
○ 제가 부르짖는 그날, 그때 원수들은 뒤로 물러가리이다. 하느님이 제 편이심을 저는 아나이다. ◎
○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
○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이다. 제 목숨 죽음에서 건져 주시어, 제 발걸음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느님 앞에서 걸어가라,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라 하셨나이다. ◎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며,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상태라고 하신다.(루카 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제1독서 (1코린15,35-37.42-29)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42-44) 

코린토 전서 15장 42-44절은 36-38절에 나오는 씨의 사례 염두에 두면서 이 땅에 사는 인간은 썩어 없어질 것에 매여 있으나, 부활을 통해 마침내 썩지 않는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논증한다.(2코린5,1-5) 

여기서 '썩지 않는 것'으로 번역된 '압타르시아'(aptharsia)부정 접두어 '아'(a)와 '썩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프테이로'(ptheiro)의 합성어이다. 특히 '프테이로'(ptheiro)는 시신이 부패하는 것 뜻한다. 

일부 코린토 교인들을 포함한 당대 그리스인들이 일체의 부활 교리를 부정한 것 역시 현실에서 드러나는 육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시신의 부패를 관찰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는 본질상 썩어 소멸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점을 보아서도 영혼이 육체보다 고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영혼이 자신의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니, 사후에 다시 영혼이 자신의 감옥인 육체와 결합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육신이 죽음의 과정을 거쳐 부패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죽어 이 지상에서 틀림없이 부패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 그는 육체가 죽음을 거쳐 새로운 부활의 몫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소망하고 믿는다.

바오로는 그리스의 영육이원론 철학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에서의 영육 이원론과 바오로의 신학 사상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특히 몸과 관련하여 그리스인들이 몸을 영혼에 비해 비천한 것으로 간주한 반면, 바오로는 여기서 그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몸을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새 창조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오로는 육신의 죽음과 부패를 씨를 뿌리는(심는) 과정과 비교하고, 부패를 넘어선 새로운 변형의 부활할 몸을, 씨가 죽어 성장할 나무에 비교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스럽게 썩어질 육체에 '묻히고'(뿌리고; 심고)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라고 언급된 36절의 내용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즉 바오로는 '뿌리고'(심고)로 번역된 '스페이레타이'(speiretai)를 36절에서는 씨가 땅 속에 심겨지는 것에 대해 사용한 반면, 42-44절에서는 인간의 죽은 몸이 땅 속에 묻히는 것에 대해 사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죽은 몸이 땅 속에 뿌려진다는(심겨진다는) 것은 죽은 몸이 묻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오로는 여기서 씨앗이 땅 속에 심겨지는 하나의 그림과 시신이 무덤속에 묻히는 하나의 그림을 의도적으로 오버랩(overlap)시키고 있다. 이것을 통해 바오로는 새로운 영적 몸을 입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43) 

바오로는 본절에서 '비천한 것' '영광스러운 것', '그리고 '약한 것' '강한 것'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비천한 것'이나 '약한 것'이란 표현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로마3,23) 본질적으로 질병이나 고난, 그리고 환난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선한 것은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로마7,19) 

그런데 바오로는 42절에 이어 여기서도 '묻히고'(뿌리고, 심고) 라는 뜻을 지닌 '스페이레타이'(speiretai)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죽음과 부패를 여전히 식물의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것과의 유비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비천한 것으로 묻힌다는 것은 도대체 식물의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것과 어떤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가?  

제아무리 죽은 자를 위해 좋은 옷을 입히고, 그 관을 아름답게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신 자체는 산 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땅 속에 묻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씨앗이 뿌려질 때 그 알갱이가 어두운 땅 속으로 감추어지는 것과 같기에 시신이 비천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이란, 지금의 육체와 다른 면모로서의 부활할 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신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로마1,4) 부활할 몸을 통해서도 구현됨을 뜻한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육체가 갖는 '비천한 것'과 '약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란 점에서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이것은 더 이상 죄악과 관계 없으며, 하느님의 모상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죄에 오염됨으로 인해 육체적 허약함에 시달릴 뿐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할 가능성이 많은 이 세상에서의 육체와 달리, 허약함이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한 것' 이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강한', 부활할 몸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살아있는 몸 안에 있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지력과 능력을 초월한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덧입게 된다.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력으로는 이것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44)

바오로는 본절에서 몸의 두 가지 형태를 대조하고 있는데, '물질적인 몸' '영적인 몸'이 바로 그것이다. 바오로의 인간관에서 독특한 것은 인간을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구분하고, 비물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프쉬케'(psche; 영혼 혹은 혼) '프뉴마'(pneuma;심령 혹은 영)번갈아 사용해서 나타낸다는 점이다. 

'프쉬케'(psche)는  '프뉴마'(pneuma)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구분되어 쓰일 때에는 사람의 육체적 생명(육신)과 관계된 비물질적 부분(영혼)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고, '프뉴마'(pneuma)는 하느님의 생명(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인 성령)의 영향을 받은 영적 생명과 관계된 비물질적 부분(심령;영혼의 핵으로서,세례와 견진때 받은 성령을 담는 그릇)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 

따라서 '물질적인 몸'으로 번역된 '소마 프쉬키콘'(soma psychikon ; a natural body)'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덧입은 육체적 생명력을 갖는 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프튜마티콘'(pneumatikon)이 본래 '하느님의 영'(성령)을 주로 뜻하는 '프뉴마'(pneuma)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소마 프뉴마티콘'(soma pneumatikon ; a spiritual body)'영적인 몸' 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되살아난 새 몸', '부활을 통해 장차 오는 세대에 덧입게 될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2코린5,1)

'영적인 몸'은 마치 어리석은 코린토 교인들이 가정했을 법한 논리, 즉 죽은 자들이 '부패한 시신의 재조직'을 통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신령한 몸' 즉 '다른 몸'을 입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부활할 몸의 근본적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몸은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몸의 존재 양식'에 있어서는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매우 독특한 몸이다. 

우리는 이 '영적인 몸' 대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몽소승천(피승천)한 성모님의 몸 생각하면 된다. 죽은 육신과 부활한 육신은 겉 모습으로는 똑같은 육신이다. 그러나 죽기 전의 육신과는 차원과 상태가 다른 육신이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 영혼과 천주성은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육신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지닌 육신, 곧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으셔서, 몸이 빛나고, 무손상, 신속, 투철하시다.

여기 H2O물(액체)이 있는데, 물을 끓이면 기체(수증기)가 되고, 얼리면 고체(얼음)가 되지만, 다같이 실체와 본질은 H2O이고, 다만 새로운 조건하에 새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인 것과 같다. 

우리의 '영적인 몸'도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어서 몸이 빛나고, 더 이상 손상(고통)이 없는 무손상, 가고자 하는 곳에 이미 가 있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신속함, 문을 닫고 있는데도 뚫고 들어가는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투철함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인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1-12).”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첫 번째로 받은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악마에게 그 말씀을 빼앗긴 사람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그런데 사탄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이 말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사탄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사탄의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습니다.
(사탄의 말이 진실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일은, 악마가 와서 사람의 마음에서 ‘말씀’을 앗아 가 버린 일 가운데에서 첫 번째 일이고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 일에서, 유혹을 한 사탄의 책임이 크지만, 믿어야 할 말씀을 안 믿고, 믿으면 안 되는 말을 믿은 아담과 하와 자신의 책임도 큽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처럼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면서 신앙인들의 믿음을 흔들어놓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거짓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부터 신앙인들은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듣지 말아야 합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여기서 ‘뿌리’ 라는 말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자기의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 2)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

확신 없이 그냥 막연히 믿기만 한 사람은, 종교박해가 닥쳤을 때 죽는 것이 무서워서 쉽게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박해가 없을 때에는 믿기만 하는 사람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게 되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종교박해를 받기 전에는 누가 순교자가 될지 누가 배교자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가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자만심에 빠지면 안 되고, 헛된 장담을 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실행’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루카 6,49).”

믿음의 뿌리가 없어서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것도, 미사 참례만 열심히 하고 다른 신심 생활은 하지 않는 것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이 바로 ‘뿌리 없는 믿음’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히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좀 더 잘 살고 싶어 하는 소망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은, 또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은, 그런 소망이 욕망으로 변질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숨이 막히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은, 또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은, 소망이 욕망으로, 또 집착으로 변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숨이 막히게 됩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복신앙에 빠져 있고, 그래서 기도할 때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만을 청하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일은 생각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기만 하는 경우...
그런 경우에 혹시라도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다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말씀의 열매를 맺은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사탄이 준 것입니다.)


2015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질 때, 우리 마음이 말씀의 씨앗이 싹트지 못하는 굳은 땅이 되거나 싹이 돋아나도 곧 짓밟혀 버리는 길거리 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이 싹이 자랄 수 없고 장애물이 많은 땅이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뿌리신 씨앗은 좋은 것이어서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선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이어서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열매 맺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잘 열매 맺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의 밭이지만, 그 밭에는 미움과 세상 걱정, 타인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상처들이 자라게 됩니다.

세상의 쾌락과 욕심으로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하는 밭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땅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입니다. 모든 곡식이 땅에서 자라듯 우리 안에 심어진 주님의 말씀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

느님의 숨결이 닿아서 만들어진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천상의 밭으로 자랍니다. 말씀을 마음 안에 품고 인내로 여러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은 좋은 땅이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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