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수요일]불행선언 ((루카 11,42-46)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자고 권고한다.(갈라5,18-25)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20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21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바리사이들과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 율법 교사들에게 불행하다고 선언하신다. (루카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갈라5,18-25)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22~23)
갈라티아서 5장 22절의 '열매는'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os; fruit)는 성령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와는 구별되는 말인데, 성령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이 인간 안에 작용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을 9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롭게 된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마땅히 드러내고 추구해야 할 덕목인 것이다.
갈라티아서 5장 19절의 '육의 행실'에서 '행실'에 해당하는 '에르가'(erga)가 복수형으로 쓰인 것에 반해, '성령의 열매'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카르포스' (karpos)는 단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주어진 은혜들이 그 자체로서 통일성과 완전성을 지니고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 love)는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한다(요한3,16; 로마5,8). 따라서 여기서 '아가페'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처럼 우리도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 13장에서 사랑의 진리를 장엄하게 외치고 있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1티모1,5).
② '기쁨'을 뜻하는 '카라'(chara; joy)는 저급한 인간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 오는 순간적이며 육적인 기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기쁜 마음을 의미한다(로마14,17; 15,13).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을 말한다.
③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이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화해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느님과의 평화를 말한다(로마5,1). 이러한 평화가 우리 자신의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의 상호 의존성은 코린토 2서 13장 11절과 콜로사이서 3장 14절과 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 속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그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면(필리4,7), 우리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도 평화가 충만하게 된다.
④ '인내'에 해당하는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 patience)는 '길다'라는 의미의 형용사 '마크로스'(makros)와 '마음', '감정'을 뜻하는 '튀모스'(thymos)의 합성어로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계속하여 참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관용할 줄 아는 성품을 뜻하는 말이며,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로마2,4; 1베드3,20)에 근거를 두고 있다.
⑤ '호의'를 뜻하는 '크레스토테스'(chrestotes; kindness)는 '친절한 성품',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려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의 자비하심, 곧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친절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루카11,27; 에페2,7). 성령의 열매로서의 '호의'는 이러한 하느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⑥ '선의'를 뜻하는 '아가토쉬네'(agathosyne; goodness)는 선한 성품과 행동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적인 선을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되고 있다(로마15,14; 갈라5,22; 에페5,9; 2테살1,11).
⑦ '성실'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 faithfulness)는 신약에서 '믿음'(마태8,10)이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믿음'으로 번역된 이유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나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여기서는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미덕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이나 '충성'보다는 '성실함'이나 '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충성'은 수직적이고 상하 관계의 뉘앙스가 있다. '성실'이나 '신실함'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자질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하면 좋다.
⑧ '온유'에 해당하는 '프라우테스'(prautes; gentleness)는 이웃을 향한 윤리적 관용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하는 자에 대해 위협적인 보복으로 분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며(2티모2,25), '폭력'의 반대말이다.
⑨ '절제'에 해당하는 '엥크라테이아'(engkrateia; self-control)는 하느님을 향한 것도 타인을 향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한 미덕이다. 이 말은 특히 갈라티아서 5장 19절에 언급된 성적인 문제들에 있어서의 절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막는'에 해당하는 '카타'(kata; against)는 '~에 반하는', '거스르는', '~에 대항하는'이란 뜻을 지닌 전치사이다. 그리고 '법'에 해당하는 '노모스'(nomos; law)는 '율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 곧 '성령의 열매'를 거스려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율법'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결코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며 (갈라5,18), 오히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맺어진 이러한 덕목들은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기 때문이다(갈라5,1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42-46)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46)
루카 복음 11장 46절은 율법 교사들이 저주를 받는 세 가지 이유중에 첫번째 이유이다. 그들은 자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옥,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지 않는 파렴치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힘겨운 짐', '지기 어려운 짐'은 무엇인가? 이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원로들의 전통과 율법 교사들의 해석을 가리킨다. 그들은 심지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 대한 십일조 규정을 세부적으로 제정했고(루카11,42), 그 결과로 당대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기 위해 땔감까지도 계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여겼고(루카11,37), 하지만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었고 복잡하여 일반 사람들이 일일이 암기해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부담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태23,3).
여기서 '대다'에 해당하는 '프로습사우에테'(prospsauete; touch)는 가볍게 만지거나 살짝 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현재 직설법의 형태로 부정어 '우'(u; not)과 함께 쓰여, 마치 무거운 짐에 손가락 하나 살짝 건드리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율법 교사들의 파렴치한 악행이 관행처럼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이러한 모순되고 불의한 모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율법 교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의무를 무겁게 부과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율법 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그들은 그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드러나지 않는 무덤>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4).”
민수기에 이런 율법이
있습니다.
“들에 있다가, 칼에 맞아 죽은 이나 저절로 죽은 이,
또는 사람의 뼈나 무덤에 몸이 닿은 이는 모두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민수 19,16).”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전 예배나 공동체의 집회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율법 규정대로 정결 예식을
행하면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추방됩니다(민수 19,17-20).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란,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남을 부정 타게 하는 것들을 뜻하고,
이 말은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언행을 본받는 사람들이
죄짓는 줄도
모르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그렇게 남을 죄짓게 만드는 자들은
하느님의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특별히 엄중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2-3).”
무덤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남을 죄짓게 하는 죄’ 가운데 하나의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당시에 바리사이들은,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더라도
‘십일조’만 잘 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이 말씀에서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너희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2) 너희는 사람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마태오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신앙생활을
‘말로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많지만 그 ‘삶’은 형편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여기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은,
신앙상담이나 법률상담 등을 하면서
그 대가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일은 겉으로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이천 년 전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천 년 전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반성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지만,
일차적으로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쳐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리사이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더욱 엄한 벌을 받겠지만,
다른 사람의 유혹이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도
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죄를 지었더라도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죄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예를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계명을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불효가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이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실제로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생길 때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사랑’을 거스르는 일은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정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이른바 독설을 뿜어내십니다. “불행하여라!”라고 선언하시고, 그 이유를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오죽하면 속이 불편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라는 항변을 했을까요?
치부를 들추어내고, 상대방을 면전에서 모욕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분노를 자아냅니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당혹감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분노와 앙심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상대방의 ‘리듬’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잘못을 비난하고 훈계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감정의 리듬에 따라 먼저 장단을 맞춰 주고 공감해 주면,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자아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가끔 돌직구를 날리는 충격 요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선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 사람들에게 도덕적 표양과 지도자로서의 표양을 보여야 하는 이들에게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분노[義憤], 또는 공공의 분노[公憤]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상식과 기본이 무너진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인이 보여 줄 것은, 개인적인 분노나 원한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익을 해치는 악에 함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덕은 하느님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지, 불의에 순종하고 이기적 자기애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