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_020.jpeg)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갈라 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시편 139(138),1-3.13-14ㄱㄴ.14ㄷ-15(◎ 24ㄴ 참조)
◎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
○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고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인 마리아더러 언니를 도우라고 일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신다. (루카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 (갈라1,13-24)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5~16)
'따로 뽑으시어' 에 해당하는 '아포리사스'(aphorisas)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는 '경계를 지어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동사로서 '갈라내다'(마태13,49), '분별하다'(마태25,32), '따로 세우다'(사도13,2)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목적으로(15절)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따로 세워 임명했음을 의미한다. 즉 이 단어에는 단순히 사도 바오로의 개인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택하심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하신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란 표현은 하느님의 선택이 사도 바오로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할 때,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루어진 신비한 것이며 불변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표현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녔던 소명 의식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된 표현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사49,1; 예레1,5). 즉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성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아드님을'로 번역된 '톤 퓌온 아오투'(ton phion autu)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그분의 신성(神性)이야말로 복음 선교의 주요 내용임을 드러낸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당신의 아드님을', 곧 '하느님의 아들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계시해주셨습니다'라고 번역한 '아포칼맆사이'(apokalypsai)의 원형 '아포칼맆토'(apokalypto)는 본래 '덮개를 벗기다', '베일에 가리거나 덮인 것을 열어젖히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이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구원과 관련하여 이런 의미에서 발전하여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대해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마태11,25; 루카10,21; 1코린14,30).
본문은 분명히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계시를 받은 사건(사도9,1~19)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는 '아포갈맆토'동사 대신에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지닌 '호라오'(horao)동사를 사용하고 있다(1코린9,1; 15,8).
'호라오'동사가 외적인 경험을 나타낸다면, 본문의 '아포갈맆토'는 내적인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때 내적 계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번역하면 '나는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로'로 번역된 '유테오스'(yutheos)는 '즉시'(immediately)라는 뜻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또 이방 선교 사명에 대한 명령을 받은 '직후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사람'이란 표현은 '살과 피로'(with flesh and blood)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피를 나눈 가족(혈육)을 지칭하기 보다는 피조물인 연약한 인간을 지칭한다(마태16,17; 히브2,14). 즉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복음 (루카10,38-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
루카 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앞의 10장 25~37절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루카 복음 10장 27절에서 언급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보기를 역순으로 하나씩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의 교훈은 '이웃 사랑의 모델'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느님 사랑의 모델'은 '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대의 랍비의 문헌들은 여자들을 탐욕스럽고 호기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며 수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여,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은 '불신자나 야만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예수님 당대의 여자들은 그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과 이야기하고'(요한4,27), '여자들을 가르치고'(루카10,39), 그리고 '병든 여자를 치유하기도'(루카13,10; 마르1,31)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버림받고 소외받은 대표적 계층인 여자들을 수용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남녀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루카19,10).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타라는 여자가'에 해당하는 '귀네 데 티스 오노마티 마르타'(gyne de tis onomati Martha; a woman named Martha)에서 '여주인'이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여성형 고유명사 외에 '한 여자'에 해당하는 '티스'(tis; certain)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gyne; a woman)는 처녀든, 기혼이든, 그리고 과부든 모든 연령 계층의 여자를 일컬들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루카는 '한 여자'라는 기록을 첨가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0장 39절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앉아'에 해당하는 '파라카테스테이사'(parakathestheisa; sat)는 '옆에 놓다'를 뜻하는 '파라카티죠'(parakathizo)의 수동태 분사이다. 수동태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발치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말씀을 들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은 당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즉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당대의 통념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여인들의 지위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인 하느님의 말씀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 민족 등의 모든 구분과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전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되는 '에쿠엔'(ekuen; and heard; listening)은 '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kuo)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마리아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루카 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분주하였다'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periespato; was distracted; was cumbered)의 원형 '페리스파오'(perispao)는 '둘레',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와 '당기다'를 뜻하는 동사 '스파오'(spao)의 합성어로서,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마르타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분주하고 들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10장 41절과 42절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마르타는 음식 준비도 하면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즉 마르타의 마음은 현재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신경을 뺴앗겼던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40절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의 말 속에는 음식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혼자서 편안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 얄미운 심정이 들어 있다.
마르타의 이러한 요청의 뉘앙스는 몹시 바쁜 와중에 있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과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연민을 품은 애정을 가지고(반복된 호칭의 의미), 마르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여기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에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메림나스'(merimnas; you are worried; you are careful)는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마르타는 음식을 무엇을 준비할까, 좌석배치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지금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걱정하는구나'로 번역된 '토뤼바제'(thorybaze; upset; troubled)도 '어수선하다', '어지럽다'를 뜻하는 '토뤼바조마이'(thorybazomai)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서, 음식 준비로 인해 분주하고 어수선한 마르타의 심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는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택한, 말씀 경청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당시 마르타가 했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주도록 일러달라는 마르타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선택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has chosen)은 항상 중간태로만 사용되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마이'(eklegomai)의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혹은 '그녀 자신을 선택했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에는 마리아가 '좋은 몫'('아가텐 메리다'; 'agathen merida'; what is better; good part)을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파이레테세타이'(uk aphairethesetai; will not be taken away)는 부정어 '우크'(uk; not)와 '제거하다', '가져가 버리다'의 뜻을 지닌 '아파이레오'(aphaireo)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 나란히 쓰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타의 항의조가 담긴 요청이나 예수님의 권고로 인해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몫을 선택하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타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8-40).”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는 말과
루카복음 9장 53절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라는 말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보면, 예수님은 거부당하기도 하고, 환영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쪽에서 보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우리 스스로 거부하는 일이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모셔 들이다.’
라는 말에서 묵시록에 있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예수님과 함께 먹는다는 말은
구원을 받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문을 열어 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
대접을 받으려고,
즉 먹을 것을 달라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먹이시려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님께 음식을 드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여
주십니다.
그런데 마르타에게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쏟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되지만,
뒤에 예수님께서 마르타를 타이르시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일에
묻혀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일을
줄이거나 중단하지 않고 다른 해결책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와 함께 일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도
겉으로만 보면 타당한 해결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동생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중단시키는 일이
됩니다.
즉,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인데 그것을 감히 중단시키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주님을 접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을 하는 셈이 됩니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을,
“너는 가장 필요한 일은 잊어버리고 필요하지 않은 일들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시작했지만,
너무 많은 일을 하다가
그만 주님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주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일’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상황...)
설마 그렇게 될까? 라고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우리도 흔히 그렇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또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봉사 활동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하고, 여러 가지 성당 일을 하는데,
그 일들에 매여서 그 일들만 신경 쓰다가 그만
자기가 그 일을 왜 하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열심히 달리고
있던 마라톤 선수가 달리는 것만 신경 쓰다가
자기가 왜 달리고 있는지,
또 자기가 어디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지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더 이상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도 목적지도 잊어버렸으니 계속 달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 제자들은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했고,
많은 마귀를 쫓아냈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마르
6,12-13).
한마디로 말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많은 일’을 한 다음에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고생한 제자들에게 그 보상으로 휴식을 주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자기들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다시 묵상하고, 점검과 반성을 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피정’을
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일만
하다가 지치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닌데,
그 일의 목적과 이유를 잊어버리는 것은 더욱더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성당을 왜
다니는지, 신앙생활을 왜 하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하고 있는 일을 멈추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 자체는 인정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