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월요일(게천절)]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10,25-37)
1890, 빈센트 반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73×59.5),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바오로 사도는 내가 전한 복음 말고 누가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갈라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시편 111(110),1ㄴㄷㄹ-2.7-8.9와 10ㄷ(◎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그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네. 그 계명들은 모두 참되고,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영원무궁토록 견고하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신다.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갈라1,6-12)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1~12)
갈라디아서 1장 6~10절에서 '다른 복음'을 쫓는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강한 어조로 책망한 사도 바오로는 이제 1장 11~17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임을 변증하기 위하여 이 복음이 신적 기원을 가졌음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배후에는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새로운 논지를 전개하면서 사도 바오로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 여러분'(adelphoi; 아델포이)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형제들과는 대조되는, 배교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갈라티아 지방의 이방 성도들을 향해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같은 조상을 가진 다른 유대인들을 '형제' 라고 불렀는데 (레위19,17; 신명1,16; 사도7,2; 로마9,3),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의 종교 공동체에서도 그 구성원들이 서로를 '형제들'로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볼때 초대 교회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을 '형제'로 불렀던 관습은 이러한 유대와 헬레니즘의 두 관습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사용된 '형제'라는 호칭에는 그 인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란 호칭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자신과의 관계적 측면에서,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형제들'로 부른데서 (마르3,31~35)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였다(로마8,29).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더 나아가 이러한 공동의 관계를 기초로 해서 계속해서 '형제'란 호칭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애로써 애정깊은 상호 공조의 자세로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마14,10.13.15; 1코린5,11; 6,5~8; 8,11~13; 2코린1,1; 2,13).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심지어 본서와 같은 갈라티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엄격한 어조 가운데서조차 그들에게 '형제들'이란 호칭을 사용하여 자신과 갈라티아 교인들간의 형제로서의 관계,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됨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지금 그러한 사실조차 잊은 채 배교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12)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가 나온다.
갈라티아서 1장 12절 전체가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사람을 좇아 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1장 11절의 까닭을 상세하게 해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우데 ~ 우테'(ude ~ ute)라는 이중 부정 구문을 사용하여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그리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 곧 신적인 계시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원문에는 '내가'에 해당하는 1인청 주격 대명사 '에고'(ego)가 사용되고 있다. 희랍어에서는 동사에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주격 인칭 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주어를 특별히 부각시키고자 할 때에는 사용한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지방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거짓 복음을 전했던 반면에, 자신은 이들과 달리 신적 기원을 가진 참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에고'(ego)라는 1인칭 주격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 인도되고 있는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우선 왜곡된 거짓 복음에 대한 경계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오로는 앞에서 '우데 ~ 우테'(ude ~ ute)라는 이중 부정을 통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이 전혀 인간적인 것과 관계없음을 강하게 변론한 후에, 새 성경은 '오직' 이란 부사로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그러나'(but)라는 뜻을 지니는 접속사인 '알라'(alla)를 사용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0,25-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0~33)
루카 복음 10장 30~35절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이웃이 자기 동족에 한정된다고 믿고 있는 어떤 율법 교사에게, 그의 생각이 틀렸고, 또한 그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 아님을 드러내며, 또한 그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자 착한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나 레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예리코는 해면보다 250m 낮은 저지대이다. 이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도 많았으며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루카 복음 10장 30절의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에 해당하는 '헤미타네'(hemithane; half dead)는 '절반'을 뜻하는 '헤미'(hemi)와 '죽다'를 뜻하는 '트네스코'(thnesko)가 합쳐서 만들어진 형용사로서, 강도 행각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강도맞은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 주면서, 이웃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마침 그때 백성들을 위해 성전에서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임무를 지닌 사제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예리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도맞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에 해당하는 '안티파렐텐'(antiparelthen;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는 '반대'의 뜻을 지닌 '안티'(anti)와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파레르코마이'(parerchomai)가 결합된 동사인 '안티파레르코마이'(antiparerch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이것은 사제가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우회하여 지나갔음을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그는 자신도 강도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그렇게 헀을 것이다(레위21,1~3). 하지만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 강도만난 사람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도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사제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제는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외면했으며, 백성의 종교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사랑의 실천에 모범이 되어야 할 사제 (민수18,1~32)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도무지 용납이 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또한 레위인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별된 지파의 사람이었는데(민수18,1~32), 사제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유대의 종교 특권층이 속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들이야말로 레위기 19장 18절에 명시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더 잘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레위인도 앞서 지나간 사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외면하고 떠나가 버린다.
한편, 세번째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에 의해 거의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부류인데도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과 앞서 나온 사제와 레위인을 비교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고하며 사악한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루카 복음 10장 33절에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 (esplangchnisthe; he took pity on him; he had compassion on him)는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신약 성경에서 12회 등장하는 이 단어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에게 쏟아부어져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만나 폭행당해 죽어가는 사람을 당연히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은 어려움에 처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생길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에, 사마리아인만이 비극에 처한 자를 가엾에 여기는 참된 사랑의 자비를 지녔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역설과 아이러니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웃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멸시받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유대인'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시 이웃을 한계짓고 구별짓는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이웃의 자세를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
10,30-34).”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라는 계명을 제대로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10월 2일의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착한 사마리아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만일에 그 사마리아인이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선행과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마태
6,1-2).”
‘위선’은 선이 아닌 것, 즉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는 짓입니다.
또 만일에 어떤 대가를
받기를 바라고 한 일이라면, 그것도 ‘위선’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0).”
겉으로는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도 속에 딴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선행과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 될 뿐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런
사심이나 이기심이나 탐욕 없이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라는 말에는,
불행한 일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일’도 하지 않은 자들,
즉 사람도 아닌 자들이
됩니다.
당시에 사제와 레위인은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모범적으로 사랑 실천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비난받아야 할 일입니다.
비유에는 사제와 레위인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사랑 실천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작정을 하고 ‘거부’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그 죄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는,
“이웃 사랑이란, 네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과 다음
말씀이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루카
6,32-34).”
여기서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라는 말씀은,
“그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또는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 주는 일,
바로 그 일에서부터 참 사랑이 시작됩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냥 지나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강도당한 사람이 그들 자신들의 가족이었다면,
또는
친한 동료였다면, 그렇게 그냥 가버리지는 못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서 도와주었을 텐데...
그것이 바로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 그리고 불멸의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곁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인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넘어 인류 문명사에 이웃 사랑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 주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됩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해지는 우리 시대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위선적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복음이 지닌 놀라운 힘을 발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자못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요청하는 애덕의 실천에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적 이유나 제한적 조건을 거는 것은 복음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사람인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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