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금요일]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루카 10,13-16)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2~13)
욥기 38장 4~1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의 신비를 소재로 사용하여 당신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셨다.
이제 욥기 38장 12~2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창조로 조성된 우주를 친히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들어 당신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신다.
그 가운데서 12~15절은 욥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아침을 오게하여 땅에 빛을 비추게 하셨음을 밝힌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은 욥이 태어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아침을 동트라고 명령한 적이 있느냐는 힐문조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평생에'로 번역된 '헤미야메카'(hemiyameka)는 의문사 '하'(ha)와 '~로 부터' 란 의미의 전치사 '민'(min)과 '날'이란 뜻의 명사 '욤'(yom)의 복수형에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너의 날들로부터'(since the days)가 된다.
여기서 '날들' 이란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욥의 출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더 나아가 죽음이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 즉 평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이 시간속에서 단 한번이라도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너의 명령에 의해서 되어진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욥을 비롯한 인간들이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세상의 모든 만물은 전적으로 절대자인 하느님의 섭리와 통치에 따라 운행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는 밤과 아침 사이에 있는 새벽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확하게 앎으로써, 매일 매일이 유지되고 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런데 혹자는 '새벽'에 해당하는 '샤하르'(shahar)를 신화에 나오는 '새벽별 신' 과 연관시켜 새벽 시간에 정확하게 나타나는 신격화된 샛별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샤하르'는 '날이 새다' 라는 뜻의 동사 '샤하르'(shahar)에서 유래하여 '새벽'(여호 6,15; 시편57,9; 호세10,15)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아침이 오기 전 여명(서광,먼동)을 가리키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자리'로 번역된 '메코모'(meqomo)의 원형 '마콤'(maqom)은 '어떤 지정된 장소'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새벽에게 그 자리'(새벽의 처소)란, 곧 새벽이 하느님께서 정하여 준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나 다른 자연의 질서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13)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새벽에게 명하여 빛을 땅끝까지 비추게 하고, 그 빛으로 악인들을 제거하고, 불의한 자들을 털어내 본 적이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날이 밝아서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과 '악인이 쫓겨나는 것'을 평행 관계에 두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악인들이 주로 아무도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악을 도모하고, 모두가 잠든 밤에 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하느님께서 이 땅 곳곳에 빛을 비추시는 것은 악인들이 자신들의 악을 그치도록 하기 위함임을 나타내준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0,13-16)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14)
'코라진'(chorazin)은 '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오늘날 발견되는 유적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라진'은 예수님의 초기 활동 지역이었던 '카파르나움' (Capernaum)에서 약 3km 이내에 인접한 도시였다.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벳사이다'(Bethsaida)는 '어획 장소'(고기잡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동북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성읍이었다. 원래 명칭은 '벳사이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서, 헤로데 필리보 임금이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붙여졌다.
이곳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의 고향이기도 했다(요한1,44; 12,21). 특히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곳이었다(마르8,22).
하지만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가장 큰 이유의 배경에는 루카 복음 9장 10~17절의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으며(루카9,11), 또한 황량한 빈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루카9,13~17).
이것을 볼 때,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였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과 기적을 베푸신 활동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믿음에는 보잘 것 없어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에 해당하는 '우아이 소이'(Uai soi; Woe to you)에서 '우아이'(uai)는 엄숙한 경고나 고통, 분노 그리고 동정심 내지 연민의 감정이 서려 있는 탄식을 표현하는 의성적 감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심판과 보복만의 선언이 아니고, 불신앙에 대한 책망 속에는 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안타까운 심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마태15,21; 마르7,24.31),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완고하고 사악함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 선고를 받은 사악한 이방 도시였다(이사23장; 에제26~28장; 요엘4,4~8).
'티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방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티로'는 B.C.2750 년경에, 그리고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서 유명하며,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아모1,9; 요엘 4,4~6)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이사23장; 에제26~28장)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보다 갈릴리의 도시들이 더 사악하고 완고한 곳이라고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티로'(Tyro)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라는 지명을 거론하시면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이 바위보다도 더 마음이 굳어지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비가 와도 조금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바위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루옷'으로 번역된 '삭코'(sakko; sackcloth)는 낙타의 짧은 털과 같은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이며, 흔히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맨 살 위에 바로 입었다(2사무3,31; 1열왕21,2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인 회한(悔恨)을 표현하기 위해 '재'(먼지; ash)를 머리 위에 끼얹거나(애가2,10),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3,6), 재 위에 드러 눕기도 하고(에스테르4,3), 그 위에 뒹굴기도 하였다(미카1,10).
이렇게 구약에서 회개의 행위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던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인 '티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완고하고 사악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0장 14절에서 '심판 때에'에 해당하는 '엔 테 크리세이' (en te krisei; at the judgment)라는 말로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관으로 재림하셔서(사도17,31; 2베드2,9) 죄악에 대하여 엄격히 심판하시지만, 허락되었던 특혜와 특권을 감안하셔서 더 많이 받은 그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는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도시는 나 자신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하면 된다.
인간이 회개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 대전에 언제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은총과 현세적 축복과 영적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더 큰 내세의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의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송영진 모세 신부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거의 같은 말씀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 12,47-48).”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 죄를 지은 사람은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지은 사람도 벌을 받게 됩니다.
덜 엄하더라도 벌은
벌입니다.
몰라서 죄를 지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죄는 죄고, 악은
악입니다.)
똑같은 죄를
지어도,
계명과 교회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성직자들이 받을 벌과
일반 신자들이 받을 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성직자들이 더 엄한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성직자들은 신자들보다 더 충실하게,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인들에
대한 경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겉으로 보기에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이 말들은 모두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고,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들을(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삶으로(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려고 온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말로만 회개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말로만 사과하고 후속 조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잘못했다는 것을 정말로 인정한다면,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 조치가 없다면, 그 사과는 거짓말이 될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상이다.’
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한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혈통이나 종교가
‘구원’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천주교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6-17).”
쭉정이는 껍질만 있고, 속은
비어 있습니다.
겉모습은 알곡과 비슷하지만, 속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쭉정이는 ‘비슷하지만 아닌 것’, 즉
’사이비‘입니다.
신앙생활을 겉으로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이비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사이비 신앙인은 사실상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만심에 빠지면 안 됩니다.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라는 말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 라는 말은,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사람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우리를)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그동안 쭉정이처럼 살았더라도 회개하면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