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간 목요일]불 (루카 12,49-53)

2016. 10. 20. 오후 5: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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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불 (루카 12,49-53)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 (에페 3,14-21)
형제 여러분, 14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며 한 집안 식구끼리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 (루카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페3,14-21)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6~17)

에페소서 3장 14절과 15절이 성도들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선 자세로 기도하였다(창세18,22; 1열왕8,22; 마태6,5; 마르11,25). 하지만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할 경우에는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한다(에즈9,5; 루카22,41).

마찬가지로 15절'무릎을 꿇습니다'로 번역한 '캄프토 타 고나타 무' (kampto ta gonata mu; I bow my knees; I kneel)에서 '캄프토'(kampto)'구푸리다', '굽히다'는 의미이며, '고나타'(gonata) '무릎'이라는 뜻이다.

15절 본문을 직역하면, '내가 아버지를 향하여 내 무릎을 꿇고 있다' (kampto ta gonata mu pros ton patera; I kneel before the Father)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에페소 교회를 위한 기도가 매우 간절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3장 16절에서 19절영적 굳셈과 충만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중재 기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중재 기도는 에페소서 1장 17~23절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다만 1장 17~23절의 기도는 성도 각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본 단락의 기도는 성도 전체,  곧 교회에 초점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굳세어지게 하시고'(강건하게)에 해당하는 '크라타이오테나이'(krataiothenai)원형 '크라타이오오'(krataioo)13절의 '낙심하다'에 해당하는 '엥카케인'(engkakein)과 반대되는 의미를 갖는다. '엥카케인''용기를 잃게 하다'(discourage)라는 뜻이라면, '크라타이오오'(krataioo) '힘을 얻게 하다'(strengthen)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크라타이오오'(krataioo)는 신약 성경에서 단 네 번밖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루카 복음 1장 80절과 2장 40절에서는 어린 아이의 성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고, 코린토 1서 16장 13절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 '믿음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하고 권면하는 데 사용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본절에서 쓰인 이 용어도 근육의 힘을 배양하는 육체적인 굳셈이 아니라 내적 인간(속 사람; inner being)사랑과(17절,18절) 성령의 충만(19절, 20절)으로 채우는 영의 굳셈을 나타낸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라고 하면서(2코린4,16)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졌었다. 이처럼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기도하는, 영적으로 굳세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에페소 교인들의 '내적 인간'(속 사람)이다. 

'내적 인간'인간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이고,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현존하시는 자리이며, 전 인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이다. 

이제 '~하게 해주시고'에 해당하는 '카토이케사이'(katoikesai)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 굳셈과 충만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중재 기도에 해당하는  14절에서 21절까지에는 모두 네개의 부정사가 나온다. 

16절의 '굳세어지게 하시고', 17절의 '사시게', 18절의 '깨닫는', 19절의 '알게'가 그것이다. 이 네 개의 부정사는 '~을 위하여'라는 뜻의 두 개의 '히나'(hina; so that ~ may; ~하도록)절에 의해 각각 두개 씩 수식을 받고 있다 (16,17절과 18,19절). 

이처럼 원문으로 볼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네 개의 부정사는 사도 바오로의 기도의 핵심을 파악하게 해준다. 그 내용은 먼저 내적 인간(속사람)이 굳세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사시는 것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고, 넷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정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하게 해 주시고'로 번역된 '카토이케사이'(katoikesai)의 원형 '카토이케오'(katoikeo)'정착하여 거주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이 동사는 나그네로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다가 떠난다는 의미의 '파로이케오'(paroikeo)와 달리 한 장소에 정착하여 계속 거주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그 현존과 임재의 처소인 성전 안에 계신다고 할 때, '카토이케오'(katoikeo)가 쓰였다는 것은(마태23,21) 새 시대에 하느님의 성전이 된 성도들에게(1코린3,16.17)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거주'는 회개를 위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표현이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사람 안의 구체적인 공간을 '마음'(카르디아; kardia; heart)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항상 그분과 동행할 때,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고 살 수 있다(요한16,33).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는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의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그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초가 굳어지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두 동사는 모두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이러한 모습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임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은 생물학적 비유와 건축학적 비유가 결합된 묘사인데, 콜로사이서 2장 7절의 '그분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라는 진술과 유사한다. 

먼저 '에르리조메노이'(errizomenoi)의 원형 '리조오'(rizoo)는 식물의 뿌리를 뜻하는 '리자'(riza)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뿌리박게 하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확고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테테멜리오메노이'(tethemelliomenoi)의 원형 '테메릴리오오'(themelioo)는 건축할 때에 '기초를 놓다'라는 의미이다(마태7,26; 히브1,10).  식물의 뿌리와 건물의 기초는 식물 및 건축물이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이중적 표현은 에페소 성도들이 그들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18~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에서 사도 바오로는 당시 이단으로 교회에 침투하고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으로 하느님께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유일한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과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의 정도가 무한함을 암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인들이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체화된 사랑이다(로마5,8).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최고의 저주와 형벌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수용할 만큼 넉넉하게 '넓고'(platos; 플라토스; breadth),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 계속될 만큼 영원히 '길고' (mekos; 메코스; length; 에페4,5),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릴 수 있을 만큼 지극히 '높으며'(hypsos; 휩소스; height), 가장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만큼 충분히 '깊다'(bathos; 바토스; depth; 에페2,1~3)는 것이다. 

어떤 존재도 그리스도의 이처럼 풍성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마8,39). 넓고 길고 높고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대의 주석가들은 본문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로는 하늘을 향하고 아래로는 깊은 땅을 향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큰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해석이 우의적이고 풍유적인(allegorical)면이 없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미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충만'이라는 단어 '플레로마'(pleroma; fullness)는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서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상태이기도 하다(콜로2,10). 

전치사 '에이스'(eis)'~으로'(with)라는 수단의 의미로 번역했으나 목적어를 수반하는 본문에서 '에이스'(eis)지향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에 이르기까지'(up to)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충만으로 채운다'(be filled with)는 번역보다는 '하느님의 충만에까지 채운다'(up to all the fullness of God)라는 번역이 원문의 뉘앙스를 더 살려준다고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을 가지고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재해 있는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이르게 될 영광을 구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1요한3,2).



<가정과 신앙>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말씀을 뜻에 따라서 다시 정리하면,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요한 14,27).
그러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 바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루카 10,6)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과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려고 오신 것처럼 되었습니다.
이 ‘분열’은 가족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2-53).”

한 집안의 식구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갈라지는 일이 생기고,
안 믿는 식구가 믿는 식구를 박해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 말씀에서 연상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함께 맷돌질을 하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자매입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형제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족이라고 해도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갈라지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버려둘 것이다.”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 말은 예수님께서 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식구들이 그렇게 갈라지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식구들이 갈라진다는 말에서 다시 연상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혼인과 이혼에 관한 이 말씀은 가족 전체에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갈라놓으실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맺어 주는 것도 하느님의 권한이고, 갈라놓는 것도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 때에
식구들이 갈라져서 이산가족이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식구들 가운데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에는 ‘포기’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또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시는 분입니다(루카 15,4).
이렇게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가족은 우리가 첫 번째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웃 사랑 실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자기 식구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가정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 식구들을 구원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0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믿음은 도전입니다. 이제까지 확신하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들에 맞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겸허함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식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의 양보다 내가 모르고 살아온 하느님의 지혜의 엄청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는 회심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아집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고, 동시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위험한 기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른다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으로 ‘기억’해 내는 것이고, 이

는 타성에 물든 내 옛 삶을 변화시키는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가치들로 물들어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동의 기억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함께 공감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쳐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위험한 기억’을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 세상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위험에 빠뜨리시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조된 사회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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