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커피를 내려주는 사제들

2022. 10. 17. 오전 9: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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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동 성당에 온지도 달포가 되었다. 아직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지 입술이 늘 터져있다. 그래서 신자들께 정말로 미안하다. 얼른 적응을 잘해서 멀쩡한 얼굴로 신자들을 대했으면 좋겠는데...


요즘 평일미사 후에 카페에서 히드리아노 신부와 커피와 차를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다. 성당에 와서 미사만 하고 내빼는 신자들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다행이 신자들이 성당에 머무르다 가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커피를 직접 내려서 판매한다고 하니 동창신부가 말한다. “모양 빠지게....”

신자들이 사제에 대한 기대치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점잖고 품위 있고 때로는 거룩해 보이는 신부를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난 학교를 떠나서 본당으로 발령 받게 될 것이라고 교구장으로부터 통보를 받았을 때 고민했다. 본당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서 내린 나름의 결론은 신자들의 이야길 많이 들어주고 웃으면서 다가가고 하루에 적어도 1시간 이상의 성체조배와 기도를 하는 사제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분명히 요즘 나의 모습은 권위와는 담싼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권위라는 것이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신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습 속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집도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신 예수님의 외모에서 과연 품위를  찾아 볼 수 있었을까? 분명히 아니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럼 예수님과 달리 외적으로 근엄해 보이는 율법학자들에게는 왜 권위가 없었을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그분의 말과 행동을 통한 인격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권위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반면에 율법학자들은 성서를 거의 완벽하게 외우고 율법의 모든 조항을 꿰차고 있었고 자신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적인 단점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삶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권위는 단순히 아는 것을 가르치는데서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권위가 서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셨고 사랑의 삶을 사신 분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때로는 사목자에게도 권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사제로써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남에게 가르치는 대로 자신은 사는지, 신자들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설령 사목자가 많은 업적을 이루더라도 교우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뜨거운 가슴을 갖고 신자들에게 마음과 사랑의 커피를 내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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