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도 엠브란스 사이렌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이렌 소리가 난다. 종합 병원이 옆에 있는 관계로 밤낮을 불문하고 요란한 소리가 자주 난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 누군가의 생명이 좌우되는 짧은 시간이기에 이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어쩌면 나도 살면서 한 두 번의 겪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병원이 옆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아픈 사람들을 자주 본다. 특히 성당 마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 앞에는 신자이든 아니든 상관 앞이 많은 환자분들이 오셔서 자신의 건강을 기원하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오다가다 환자들과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눈다. 애절해 보이는 분들에게 말 한마디를 거는 것이 선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냉담했던 분들이라면 회개의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갖고 나름 정성껏 대한다.
요즘은 ‘잘 사는 것도 어렵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고 느끼고 있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가에 대한 책은 수도 없이 많지만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한 책들은 별로 많지 않다. 하긴 죽음은 누구에게나 마지막으로 한 번뿐인 경험이니까 학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내용들은 자연스럽게 추상적이다. 그래도 삶의 의미를 진실하게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옛날처럼 의료시설이 미비한 시절에는 죽음을 집이나 자연 속에서 맞이했기 때문에 죽음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경우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느낌보다 인간에 의해 죽음까지도 관리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병자성사를 청하는 경우에 식물인간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산소호흡기에 의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든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거두어서는 안된다. 사제로써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지만 만약 내가 죽음을 앞둔 중환자였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위적인 생명 연장을 통한 죽음의 과정은 엄밀히 말해 효도도 아니고 생명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이상해서일까? 사람이건 동물이건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그 자신도 비참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주위 환경인 생태계에 해를 끼치게 된다. 환자 자신도 고통은 고통대로 다 겪고 뒷바라지하는 가족들의 삶은 피폐일로를 걷게 된다.
죽음을 좀 더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는 없을까? 동물의 경우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조용히 무리에서 벗어나 죽음을 맞이할 장소를 찾아간다고 한다. 가장 원시적인 부족 가운데 하나인 호주의 한 부족에서는 자신이 병들어서 더 이상 공동체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이 서면 벌판에 홀로 나아가 단식으로 삶을 마감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맞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그 과정에 있어서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의 과정이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나 상업화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오늘 하루는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을 하면서 지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