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심판하지 마라
늘 이웃에게 불만투성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난 이 마을 사람들처럼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들을 본적이 없어. 그들은 저질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지. 모두가 자기가 무얼 잘못하는지 모르거든. 그들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결점만을 떠들어 대고 있을 거야.”
우연히 그 곁을 걷고 있는 천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정말로 그렇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저 사람 좀 보라고요. 비록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난 그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자 탐욕스럽고 잔혹한 눈을 보세요. 자신이 무슨 사립 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아보고 있잖아요. 저 입은 또 어떻고요.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잖아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봤군요. 너무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한 가지만은 파악을 못하고 있군요. 그것은 당신은 지금 거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분석하고 비난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마음은 고장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잠시나마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조선의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개국 공신인 무학대사가 나눈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한 자리에 만났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태조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국사와 과인, 오늘 군신의 예를 떠나 모처럼 농담이나 합시다. 어떠신지요?”
“전하, 좋고 말구요.”
“그럼 과인이 먼저 하겠소. 국사께서는 그간 산중에만 지낸 탓인지 흡사 얼굴이 산도야지 같구려. 하하하...”
그러자 무학대사가 말을 받았다.
“하하하, 전하의 용안은 흡사 자비하신 부처님을 꼭 닮았습니다.”
“하하하, 과인은 농담을 청했는데 농담이 아닌 아첨을 하다니요?”
“하하하,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지요.”
우리는 삶속에서 더러운 곳만 보인다면 문제입니다. 시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 자꾸 보이는 것은 내 마음에 사랑이 메말라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은 내가 소인배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내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겠지요.
다른 사람이 존경스럽고 귀하게 보이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비추어진 상대방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고사성어(故事成語)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습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뜻으로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더러는 나 자신에게도 이롭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말을 하기 전에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한다는 것, 그것은 가정과 사회, 교회, 더 나아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초석(礎石)이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 1-5)
주님의 말씀 따라 내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한 주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