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

2012. 4. 8. 오후 1: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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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전에 사제생활 60년을 하신 신부님과 사제생활 50년을 하신 신부님들의 축하식이 있었습니다. 60년을 하신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아보니 60년이 엿새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사제생활 이제 이틀 한 것 같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언제나 즐겁게 지내셨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사시는 신부님이셨습니다. 그런 분이기에 60년도 6일 같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날 신부님들께서 한결 같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지나고 나면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남은 생애 좀 더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발 씻김 예식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적성에 있을 때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발을 씻겨 드리면 세숫대야가 새카매지곤 했습니다. 보통은 미리 발을 씻고 오시기 때문에 씻겨 드리는 제가 큰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색다른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발을 씻고 온 것은 물론이고 발에 로션까지 바르고 오셨습니다. 발을 만지는 느낌이 맨들맨들 미끌미끌하였습니다. 씻고 오시는 것 까지는 좋지만 그래도 로션은 나중에 바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번 부활을 맞이하면서 수고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전례분과에서는 성삼일 전례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수고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성모회, 여성구역에서는 부활 나눔 음식 준비와 부활 계란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선교분과에서는 부활을 맞이하면서 3주 동안 가두선교를 하였습니다. 사목회와 남성구역 그리고 선교축구회에서는 성모동산에 나무심기를 함께 하였습니다. 행복은 행복해지고 싶은 열망이 있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 준다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하십니다. 이번 부활절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나누려고 했던 모든 분들에게 주님 부활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먼저 무엇이 있어야 가능할까요? 어떤 분들은 유다의 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려하지 않았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죄 없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렸던 빌라도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구원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의 그릇된 욕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유들은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부활은 근본적으로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늦은 가을 찬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생명을 잃고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은 쓸쓸하고,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지나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수구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추운겨울 눈이 내리면 떨어져 뒹굴던 낙엽은 눈 속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은 슬픔입니다. 정해진 수명을 다하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해도, 오랜 병고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죽음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준비 안 된 죽음도, 억울한 사연으로 인한 죽음도, 전쟁과 폭력 그리고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절망입니다.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권세와 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능했던 사람도, 아무리 잘났던 사람도 죽음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부자와 가난한 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슬픔이고, 죽음이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새 봄에 얼었던 땅을 뚫고서 여린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노란 개나리가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빨간 진달래가 피어나는 산을 봅니다. 길가에 심어진 벚나무가 화사하게 꽃잎을 날리는 것을 봅니다.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은 황량한 들판에 따뜻한 봄볕은 희망의 싹을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강을 건너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신 것이 부활입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절망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슬픔을 넘어서 기쁨의 문을 여는 사람들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절망의 문턱에서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둥지를 향해서 일어서는 사람은 이미 부활한 사람입니다.

부활은 무덤에 묻혔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었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12살 소녀를 다시 소생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 아닙니다. 두꺼운 얼음 속에 있었던 십만 년 전의 씨앗을 다시 꽃피울 수 있습니다. DNA를 복제해서 예전의 생명체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생과 복제이지 부활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기쁨이며, 희망인 것은 단순히 그것이 죽은 생명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제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요, 죽음은 더 이상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과거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물질 만능주의, 이기주의의 어두운 면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깊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죽음의 문화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더 심해져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고통 받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뛰어난 최첨단 대중 매체와 언론 아래 살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소외되고, 진실한 친교와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모든 생명의 공존과 소통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생명의 일치는 모두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종교, 정치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사랑과 희생 봉사의 생활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일상생활,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더는 죽음 아래 있지 않고, 부활의 생명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며칠 있으면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2012년 부활의 삶은 우리의 투표 참여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방송과 언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말로 비판만 하는 것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사도와 같은 삶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한 표는 거대한 힘이 되어서 우리의 사회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의 모든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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