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위경(僞經)인 ‘토마스 행전’에 보면, 성령이 토마스 사도에게 인도로 갈 것을 요구했으나 토마스 사도는 이를 거절합니다. “저는 히브리 사람인데 어떻게 인도 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를 타이르셨습니다. “토마스야, 두려워하지 말고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주님, 저는 못갑니다!” 얼마 후 인도 상인이 군다포러스(Gundaphorus)왕의 명령을 받아 기술 좋은 목수를 데리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원래 직업이 목수였던 토마스를 떠올리며 예수님이 상인과 흥정을 시작했고 곧바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상인이 토마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저분이 당신의 주인이 맞소?” “예, 맞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나는 저분으로부터 당신을 샀소!” 토마스는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남인도에 가면 ‘토마스 교회’가 실제로 있습니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로제티(D.G.Rossetti)는 ‘순명은 신앙이라는 나무에 달리는 열매’라 했습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의 순명이야말로 그의 영적 상태를 측정하는 확실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토마스처럼 하느님 말씀에 완강히 맞서기도 합니다. 성경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뜻대로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면 수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내가 아쉬울 때는 하느님께 매달리며 성당을 찾다가도 내가 배부르면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내 편한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한다면 이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주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이비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것이 신앙이라면 어느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 내세우면서 어떻게 구원의 선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 챙길 것 다 챙기고 하느님과 이웃 앞에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는다면 누군들 구원 받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비록 당장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고 교회의 가르침이 미련스럽게 보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요셉과 마리아처럼 묵묵히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레지오 단원이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큰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수고스러움을 순명으로 기워 갚는 우리들이 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발자국 하나하나를 모두 담아두셨다가 영광스러운 그날에 상급으로 주실 것입니다. “예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