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한 십 대 네 명이 축제가 끝나자 고속도로를 질주합니다. 차에서 술을 마시며 떠들던 그들은 실수로 사람을 치게 됩니다. 당황한 네 명은 ‘신고하자,’ ‘그냥 도망가자,’ 의견 충돌을 하다 시신을 강물에 버립니다. 그리고 ‘무덤 속까지’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1년 뒤 익명의 편지를 받습니다. 내용은 딱 한 줄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놀란 그들은 다시 만나지만 갈고리를 든 남자에게 쫓깁니다.
죽었다고 강물에 던졌던 그 사람이 살아서 복수극을 펼치는 겁니다. 1997년에 제작된 영화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줄거리입니다. 내용보다 제목으로 더 유명한 영화입니다.
‘나는 남들을 잘 아는데 남들은 나를 잘 모른다.’ ‘나는 공평하게 대하는데 남들은 나에게 불공평하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말 그럴는지요? 판단 기준은 대부분 겉모습입니다.
사람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모습은 참조사항일 뿐입니다. 사는 모습, 말하는 스타일, 눈빛 같은 것에 늘 우리는 현혹되고 있습니다. 혈액형이나 체질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당찮은 일입니다.
사람은 신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사람의 내면세계는 심오하고 복잡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잘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고 당신도 나를 잘 모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오해의 늪을 헤쳐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는 것은 분명 경솔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잘못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능력을 기를 수 있을는지요? 첫 단추는 선입관 뛰어넘기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들어온 선입관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변신의 기회를 자꾸 놓칩니다. 상대는 바뀌는데 내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가 없으면 기적도 없습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나와는 무관한 사람’ 모두 선입관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많은 것을 청하게 됩니다. 도와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길 청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기도하면 늘 그 자리가 됩니다. 가끔은 주셨기에 감사드리는 기도도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시각에도 변화가 옵니다. 정말로 많이 주셨구나 하는 시각입니다.
마태 18,21-35 말씀을 보면 “주님, 제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복음의 종은 어리석습니다. 많은 빚을 탕감 받았건만 작은 빚에 연연하다 화를 자초합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탕감 받은 것은 당연하게 여겼고 탕감해 줄 것에는 깐깐했습니다. 용서와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복음의 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감사의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복음 말씀처럼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축복받는 삶이니까요.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