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던 기억을 한다. 고지식하고 미련할 정도로 한발 한발 삶을 걸어온 시간들 속을 돌이켜보면, 나는 신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상 내가 살았던 삶이 신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살겠다는 작은 의지가 깔린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 과정들이 눈물고인 길들이었고, 서럽고 버거운 길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지렁이처럼 꿈틀대면서 아주 작은 도움에 감사하면서 한발 한발 걷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뗑깡을 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외줄타기가 너무 힘들고 숨이 막혀서 지치고 버거울 때는 쉬었다가 가기도 하고, 옆길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니, 그렇게 정답만 맞추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말들을 하는 고지식한 삶의 교훈들은 그 외줄타기의 시간에 참으로 도움이 되는 말들이고, 위로였던 것 같다.
그 외줄타기의 시간을 지나서 이제는 늪을 벗어나서 마른 땅에 도착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지난 시간의 참을성과 인내의 결과가 주는 것이 달디단 보람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에게 대한 대견함과 신뢰였던 것 같다. 자신이 옳았건 틀렸건, 신의 뜻이던 아니건, 그 과정을 밟아내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에게 스스로 박수를 쳐줄만한 일들이었고, 아주 작고 미약한 사람들의 도움들이라고 아직도 나는 생각한다.
그 덕에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결과에 눈을 돌리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결과를 속임수나 남의 등을 쳐서라도 번듯하게 얻어내기 보다는 과정들을 고지식하게 밟아내면서 살아가는 삶의 알찬 뿌듯함을 배워나가면서, 동시에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의 소중함을 배워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결과들은 시작의 산물이니 중요한 것들 일런지도 모른다. 그것에 의하여 삶은 평가받고 이야기거리가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기울이는 노력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노력들을 아끼고, 그 과정에서 눈을 돌릴 수 있고, 뗑깡을 부릴 수 있고, 한눈을 팔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숨 한번 쉬고 남은 길을 마저 가는 삶이라는 길을 긴긴 안목에서 다시 조망해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어떻게 사는 것인가? 이 질문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이며, 아무도 묻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살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며,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고지식하더라도 한발 한발 자신의 삶을 걸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일들을 고통의 외줄타기 시간에 배웠다.
그 시간들을 살아낸 내가 무슨 시간을 못 견딜 것인가? 그런 자부심이 자랑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마지막 자신감으로 바닥을 든든하게 버팅기고 있으니.. 그채로 간다. 삶의 끝까지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살아왔던 길들이 이어지는 길들을 살아간다. 외줄타기를 하면서 넘어온 길들에 아직도 외줄만 남아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걸어오지 않은 길들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더라도, 그것이 나의 길인 한 그채로 그 삶을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완전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누구나 무엇이던지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주고받던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외줄타기를 하며서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스스로의 자기 길을 걸어봄으로써, 그것이 절대로 남의 길과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하고도 깊게 맛보고 나면 길들은 자기 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땀과 피가 배인 길들이 어떻게 남의 길과 비교가 된다는 말인가? 낯선 부러움들은 아마 예의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