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죽음/1320년/오스트리아 Wilhering의 시토회수도원 소장
부활의 빛으로 본 십자가!
사순절이 고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어떤 무거움과 비장함, 의미심장함 이런 느낌들을 느끼게 하는 사순절입니다. 대단한 단식이나 절제도, 어려운 이웃과의 그럴싸한 나눔조차 하지 못하며 사는 일상의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왠지 무엇인가를 해야 할 듯한 느낌이 드는 계절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분명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의 나라로 들어감을 알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또한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십자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왠지 힘든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란 우리에게 무겁고 힘들고 우리 인생을 터무니없이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불행한 것이라는 인상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도 아니며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런 반응일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능하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 그림을 한 번 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계시지만 무겁고 처절한 느낌은 없고 굽혀진 무릎은 지금이라도 훌쩍 날아 내릴 것같이 가볍게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달고 있는 나무는 푸른색이요 둥글게 굽어있어, 가지가 잘려있는 상태임에도 살아있는 생명나무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 그리고 가슴에서 흐르는 피는 죽음을 알리는 처참한 형상이 아니라, 주변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 피는 생명나무로 스며들어 생명나무의 수액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십자가 맨 아래 삼각형으로 잘린 부분은 나무속이 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은 십자가가 죽음의 표지, 혹은 단순한 고통의 표시가 아니라 이미 부활빛을 그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무게 때문에 피하고 싶고 가위눌리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한 구원과 해방에로 이끌어주는 참된 길 그리고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과 진정한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복음서를 손에 든 요한이 서있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이분들의 표정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통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 합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이의 아니 비할 바 없이 귀한 이의 십자가 아래 서있는 그 참담함이 차마 바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성모마리아와 성 요한의 시선은 한 곳 예수님의 발에 고정되어 무엇인가에 몰입되어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12세기 의 한 시토회 수도자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지극한 사랑에 매료되어 예수님과 온전히 같은 마음이 되어버린 두 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한 수행자의 체험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이 그림은, 매일의 삶속에서 겪는 나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이 십자가를 전혀 다른 색깔과 빛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한복판, 이 두 분과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곳에 사랑이 움틉니다.
실직자들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겪고 있는 깊은 좌절의 늪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야를 넓히며,
사회는 그들에게 더욱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수정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옮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