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배신

2010. 3. 31. 오후 3:54:07

글자
 
유다의 배신 !
우리는… ?

참으로 단순하되 그래서  비감함마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그림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유다의 입맞춤을 그린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며 돌을 던져 죽이려 하자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피해가셨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하는데 바로 이 장면
이후 죽은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 다시 유다지방으로 가시는 대목이 나오고,
이 때 제자 토마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모든 제자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멀쩡한 남정네들이 자신의 생업을 팽개치고
가족도 뒤에 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때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자기 한 몸의 구원이었겠습니까? 단순히 출세 영달을 쫓았겠습니까?  
그들 역시 보통의 인간들이었으니 이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들의 무조건적 추종이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그분의 인격 안에서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민족 해방자,
더 나아가 온 세상 백성을 위한 구원자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분과 그 분의 놀라운 사업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친다는 생각을
이 남자들이 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지도자였더라면 토마의 이 말을 계기로 자기 추종자들의 의식을 돋구어
죽음마저 불사하며 자신과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게 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묘한 존재인 예수님은 토마의 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유다로 발길을 향할 뿐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기 그렇게 힘찬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선포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렇게 열광하며 따르던 무리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도 개의치 않고,
군중의 몰이해가 점점 깊어져도 어떻게 해볼 생각도 없는
이 희한한 인물 앞에 유다는 얼마나 당혹했을까요?
자신들의 꿈 아니 이스라엘이 그렇듯 오래 기다려온 꿈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미 십자가를 향해 자신의 걸음을 내디딘 예수님에게 제자들의
이 모든 처절한 심정들을 담은 눈빛은 엄청난 고통이요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인들 그 신명나는 하느님나라가 자신의 살아 생전에 이루어지기를 왜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리될 수는 없는 일! 가장 아끼던 이들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이 길,
오직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예수님은 살아서는 설명할 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던 이가 자신을 배신하는 그 고통마저도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이 그림은 이러한 상황을 참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의 키스를 하면서도 뚫어져라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당신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 얼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유다의 눈이 아니라 먼 곳을 바라보십니다.  
그의 항변에 대답할 수도 없으되 그의 길을 막을 수도 없는 아픔과 그를 향한 끝없는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입니다.
어쩌면 유다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요.
우리가 목숨이라도 내놓을 터이니 무엇인가 확실하게 해보자고요.” 이렇게 외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생각, 처지가 아닙니까?
누가 유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앞에, 고통 앞에  취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닙니까?

성탄이 어제 같은데 벌써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의 강생, 인간으로 오심은 바로 이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얼마나 많은 순간 예수의 길에서 벗어나는지요.  

그러나 오늘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는 세상곳곳에 있습니다.  
부활의 빛은 그들 위에 이미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녀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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