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브란트 「성가족(聖家族)」 1644년 목판에 油彩 60x77cm 암스테르담미술관
오시는 분, 만나기를 원하는 분!
침묵, 고요, 어둠 ! 어둠!
이 그림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묵과 어둠이었습니다.
이 어둠은 그림의 사각 틀을 넘어 마치 무한에까지 이어질 듯 깊고 진하게 느껴져옵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널름거리는 어둠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 안에 품고 침묵 속에 잠긴 고요가 느껴져옵니다.
그 한없는 어둠과 침묵 한복판에 빛이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 빛속에 아기가 누워있고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이 아기를 침묵 속에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두 부부 역시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화가들의 성탄 그림처럼
아기 예수를 요셉, 마리아가 경배하고 있는 모습도 아닙니다.
두 사람 역시 주위의 침묵, 고요, 어둠과 하나되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형체조차 불분명하지만 고요히 자고 있는 모습입니다.
침묵, 고요, 어둠! 하느님의 인간 세상에로의 오심에 이보다 더 적합한 분위기가 있을까요?
어떤 요란한 팡파레가 하느님의 오심을 합당하게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군중이 모여든단들 그것이 하느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팡파레 울리는 방식은 진정한 만남을 원하는 이의 방식이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그 근사한 예식에 어떤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참으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고요히 다가와 가만히 우리 안에 진정으로 자리잡고 싶어하십니다.
참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가만히 살짝 만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한쪽의 신분이 월등히 높다면 상대가 기죽지 않도록 가만 가만히 다가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하나가 되기까지
결코 자신의 높은 신분을 자랑스레 드날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기가 되기까지 우리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인간의 품안에 안길 수 있는 아기, 보살핌을 받아야 할 아기, 사랑을 받아야 할 아기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어둠과 침묵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밤의 한복판, 사랑의 기쁨을 잊은 채,
어둠의 심연에서 헤매고 있는 인류를 향해 그 어둠 한복판에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은 작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원하십니까? 참된 나눔에 목말라 하고 계십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이 침묵과 어둠의 공간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무십시오.
자신 안에 침묵을 발견하지 못하면 세상 어디서도 침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침묵과 어둠은 피하고 빛과 찬란함만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갈증은 자신의 성장이나 부의 축적 등을 통해서는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만남, 이것이 그리워 우리 현대인들은 그리도 몸부림치고 있는 것 아니겠는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 안의 침묵을 느끼지 못하면 타인의 마음에 진정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침묵의 공간 안에서만 나의 거친 열정의 불이 아닌, 전혀 다른 불, 어둠과 오히려 비슷한 고요한 불,
나를 중심으로 타오르는 불이 아닌 다른 빛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침묵의 공간에서 나오는 빛만이 나를 비추고
이웃도 비추어 함께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그림이 빚어내는 침묵과 어둠 속에 자신을 한 번 담그어 보십시오.
침묵 속에서만 전달되는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겨보십시오.
어둠 속에 내 품에 안긴 아기를 가만히 내려다 보십시오.
어둠 속에 안긴 만물의 신음, 사랑받고자 하는 신음이 들려올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곳에 사랑이 움틉니다.
세상을 끝까지 지배할 것 같은 미국이 금융 위기로 휘청거립니다.
노력하는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쥐어줄 것 같은 자본주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 있나요? 뿌리를 잃은 모든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수정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퍼온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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