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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 사해 부근의 쿰란에는 독실한 마음으로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늘날의 수도 생활처럼
공동체를 이루고 엄격하게 고행하며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공동체에 입문하려면 물로 씻는 예식, 곧 정화 예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는 회개를 전제한 죄의 용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께는 세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시어
세례를 청하실 때, 요한도 당황하여 그분을 말리려 하였습니다(마태 3,14 참조).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요한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세례를 통하여, 죄인들과의 연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듯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와 결합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종은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음으로써 민족들의 빛이 됩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민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이를 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인들과 건강한 이들만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이의 주님이 되실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와 능력은,
높은 이들의 복종을 받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죄스러운 모든 이를 받아들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우리와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고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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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너는 내 아들(더 위드 4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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