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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를 앓는 병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에 소개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인고의 서른여덟 해! 그 병자는 하느님께서
이미 자기를 잊으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이 출렁일 때 그를 도와 물에 들어가게 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가족도 이미 그를 돌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잊히고 버려진 병자일 뿐,
그를 가엾이 여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셨습니다.
수많은 병자 가운데서도 그가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먼저 알아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빛으로 불러내셨습니다(이사 49,9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적 연민에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하실 따름이었습니다(요한 5,19 참조).
차라리 그저 인간적 연민이었다면 유다인들은 그분을 죽이려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단지 안식일을 어긴 불경한
사람이라며 꾸짖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치유가 하느님의
행위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그분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될 때 사람들은 그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당사자도 자신의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치유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강조하시면서 당신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치유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점이 바로 벳자타의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자애와 순전히 인간적인 자비가 서로 다른 점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서도 죽임을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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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예수 나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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