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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역사-07] : 전례 운동 * 자료 미정리분
여기서는 교육적 동기로, 상세한 역사적 과정 이상으로 전례 운동의 주제에 관한 발전을 살펴볼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첫 시도들부터 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약 100년간) 이 전례 운동은 ①전례에로의 회귀, ②전례 사목, ③전례학, ④전례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등의 내용으로 나타난다. 이상의 네 가지 굵직한 현안들이 수년에 걸쳐 되풀이하여 언급되면서 그 내용이 풍부해진다.
1. 전례에로의 회귀
솔렘(Solesmes)의 수도원장 게랑제(1805-1897)와 함께 나중에 ‘전례 운동’이라 부르게 될 그 움직임의 첫 싹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례학자 부이예(Bouyer)는, 전례 운동 가운데 게랑제 안에서 기원을 갖지 않은 것은 분명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19세기 불란서 부흥시대(Restauratio)에 위치하는 게랑제는 자기 나라(불란서)의 분도회 규율을 복구하였으며,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적인 투쟁가로서 얀세니즘(Jansenismus), 얀세니즘은 아오스딩의 극단적인 주장을 강조한 신학사상으로, 원죄, 자유, 성총 등 많은 부분에서 비가톨릭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상은 루뱅(Louvin) 대학의 교수였던 얀센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1640)에서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 중 5개조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3년 이단설로 배척되었다. 즉, ①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점, ②하느님은 모든 의인들에게 계명을 주었으며, ③그것을 수행할 충분한 은총을 주었다는 점, ④하느님을 등진 인간은 내적인 은총에 반항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⑤선악에 대한 내적 요청은 필연적이라는 점 등을 그들은 부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외에도 교회 규율, 특히 속죄행위, 영성체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얀세니즘은 불란스와 네델란드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빠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아직까지 얀세니즘의 흔적들이 교회 생활 안에 남아 있다.
갈리까니즘(Gallicanismus), 프랑스 역사에서 이론과 실천면에서 교황권을 제한하려고 했던 운동으로, 19세기의 역사가들이 갈리까니즘이라 붙였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에는 전제 군주국가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 교회는 정돈되면서 정치적으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정치적 국수주의가 발생하고, 지방교회의 일은 지방 주교와 지방 교회에 맡기라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1682년 프랑스 성직자들은 보쉬에(Bossuet, 1627-1704)를 필두로 하여 4개조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①교권에 대한 정권의 독립, ②콘스탄짜(Constantia) 공의회 결의에 준한 교황의 수위권 해석, ③교황권은 프랑스 교회 회의와 관습에 맞게 행사될 것, ④신앙문제에 대한 교황의 결정은 전체 교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 4개조에 잘 요약되어 있는 갈리카니즘은 교황 알렉산데르 8세(1698-1691)에 의하여 배척되었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여 단죄되었다.
갈리까니즘은 나폴레옹의 지지를 받고 프랑스와 미국의 신학교에서도 가르쳤다. 18세기에는 독일에도 이 사상이 유포되어 교회의 갈리까니즘은 페브로니아니즘(Febronianismus)이라 불리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동이 된 정치적 갈리까니즘은 요셉주의(Josephinismus)라 불린다. 또 이런 경향은 이탈리아로 들어가 토스카나 대공국(이태리 중부)에도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교황의 통치권이 전 세계교회에 직접 간여할 수 있음과, ‘속권에 대한 간접적인 간섭권을 주장’(Ultramontanismus)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 메스트르(J. de Maistre)와 라믄네(F. La Mennais)의 영향으로 알프스 북쪽에도 교황권 지지자들이 늘어났다.
세속주의(Laicismus) 세속주의는 일반적으로 그 자체를 인간중심사상, 합리성, 자유의 이데올로기적인 혼합 양태로 나타내는 자기 완결을 내세우는 폐쇄된 주의, 주장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의 세속주의(saecularismus)는 19세기 이후 영국에서 처음으로 주장된 자연주의(naturalismus) 철학을 지칭하며, 좁은 의미의 것은 평신도의 세속주의로 불리는 교회의 여러가지 사항을 평신도들만에 의해 집행되는 관리운영을 지칭하는 평신도 중심사상(laicismus)의 세속주의이다. 이 사상은, 시민생활, 사회생활, 또는 정치에 있어 종교의 이상적 가치를 부정하고, 교회가 교회당이나 성당 이외의 장소에서 활동함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 저변에는, 강한 반성직 사고가 깔려 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반성직주의(anti-clericalismus) 제창자들은 교육, 결혼, 병원, 교구, 수도원, 교회당, 기타 조직 등 적절히 교회에 속해야 할 역할들을 정부의 관리와 감독 아래 둠으로써 ‘세속화’하려는 것이다. 이 세속주의는 역사적으로, 갈리카니즘, 페브로니아니즘, 요셉주의 및 프랑스와 멕시코의 반종교적 법률의 형태로 드러났으며, 또한 공산주의의 정치 이론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등의 모든 형태들을 반대하였다. 또 그는 교황을 중심으로 가톨릭인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로 인해 ‘로마 전례에로의 회귀’가 시작되었으며, 전례의 영성적, 신학적 풍부한 발견들로 꽃피우게 된다. 재능 있는 문학적 활동을 통하여 그 발견이 더욱 확산되며, 이 활동 가운데 두드려지는 것은, 게랑제의 저서 ‘전례적 지침들’(Institutions liturgiques) Gueránger, Institutiones liturgiques I-V, Paris 1878-1885. 전문가들을 위한 학문적인 저서이다. 과 ‘전례주년’(L´année liturgique) Gueránger, L´anno liturgico, I-V, Alba 1956-1957. 일반 신자들을 위한 대중적인 저술이다. 이 있으며, 이는 또한 솔렘 수도원의 분위기 안에서 그들 영성의 영향을 받아 여러 수도원에로 파급된다. 솔렘의 전례운동과 그 영성의 영향을 미쳤던 곳은, 독일의 보이론(Beuron), 벨지움의 마레수(Maredsous)와 몽세자르(Mont César), 스페인의 실로스(Silos), 영국의 환버거(Farnbourg) 등을 들 수 있다.
게랑제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간주될 수 있다. 곧, 전례는 교회 안에 영의 탁월함에 의한 기도이며, 그리스도 몸의 목소리요 영 안에서 기도하는 신비의 목소리이다. 전례 안에 은총의 특출한 현존이 있으며, 전례 안에 교회와 교회 전통의 가장 진정한 표현을 찾아보며, 전례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약과, 구약에 비춘 신약의 그리스도교적 독서라는 것이다. Guéranger, L´anno liturgico I, 11-24.
이러한 주장들에서 근본적 개념들, 곧 전례, 교회, 성서 독서 등의 개념들이 정립된다. 게랑제에 의해 밝혀진 전례는, 신갈리아 전례들이 수없이 나타남으로써 19세기 불란서에서 소홀히 하였던 로마전례이다. 솔렘의 수도원장인 그가 과연 갈리아 전례와 신갈리아 전례의 가치들을 충분히 인식하였는가? 아니면 거기에 대해 비교 가치만을 주목하지는 않았는가? 혹은 근거도 없이 그것들을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아닌가?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학자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대개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두번째 질문에서처럼 세번째 것도, 게랑제는 얀세니스타들처럼 아오스딩과 교부들과 전례의 표현을 혹평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표현의 사례는 오늘의 성인 감사송1에서 찾아본다. “성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더욱) 빛내시나이다”(‘eorum coronando merita tua dona coronas’)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더 나아가, 그는 위대한 편집가였는데, 역사적 비판이 결여된 상태로 중세의 형태들로, 또 비오 5세(뜨렌또) 미사경본의 형태로 로마 전례를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 로마 전례를 바탕으로 일원화시킬 의도였다. 이는 중세를 통한 19세기 낭만주의의 편애와 함께, 또 로마적 의미로 부흥시키려는 강한 집념의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전례를 밝힌다는 것은 게랑제에게 있어서, ①로마 전례 초기 형태들의 원작자인 교부들의 일관된 글들과 ②전례의 영성적 표현 안에서 교회의 신비를 밝히는 것이었다. 교회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그의 영성을 활성화시켰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로서 교회는 뜨렌또 공의회 이후 개인적 신심과는 상반되는데, 이 개인적 신심을 게랑제가 비판하였다. 몇 가지 불충분한 점들, 곧 게랑제 사후 예배 개혁에 대해 앞선 시대에 좌절하게 만들었지만, 어떤 부정할 수 없는 계승으로 이러한 교회적 의미는 솔렘 수도원의 전례 쇄신을 계속 펼치게 된다.
항상 전례와 교부들 안에서 게랑제는, 교회 예배의 텍스트와 상징적 행위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터득하였다. 곧 구약의 그리스도교적 독서와 구약에 비춘 신약의 독서였다. 전례 운동 시작 때의 이 첫 접근의 종착에서 게랑제와 솔렘 수도원에 했던 가장 공통적인 비판들 중의 하나인 ‘심미주의’(aesthetismus)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미주의’는 유미주의 또는 탐미주의라고도 일컫는 것으로, 미(美)의 추구를 지상적 과제로 삼는 사상이다. 미를 위한 미,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입장이며, 원리적으로는 순수주의에 통하여 영어권에서는 순수미학, 순수 유미주의라고도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도 미를 예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귀족적인 유미주의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부르조아적으로는 생활의 향락주의 생활 조건의 미화를 가리키는데 종교적·도피적이며 자연적 인간의 소박미에 안식과 구원을 구하는 것 등 일률적이 아니지만, 인간이 노력할만한 최고 목적은 순수미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솔렘의 몇몇 지지자들은 애석한 일이었지만, 게랑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솔렘에서는 교회 전례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문학적, 예식적, 음악적 아름다움에 맞추어졌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예배의 ‘내면화’가 꽃피우게 된다. 이로 인해 심미주의적 영적 예배를 선호하게 되지만, 전례의 심미적 ‘화려함’ 가운데 거행되는 신비의 ‘영광’에 관한 어떤 것도 나타나게 된다.
2. 전례 사목
말리느(Malines)의 가톨릭 노동자 대회(1909)에서 또한 고유의 전례운동이 조직되었다. 랑베르 보뒤앵(Lambert Beauduin, 1873-1960) 신부가 이를 추진하였는데, 그는 노동 사제로서 이후 몽세자르의 분도회 수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행동가였으며, 큼직한 사실들에 대한 발견가가 아니라 저술가였으며, 게랑제 신부에 의해 시작한 업적을 계속하고 발전시켰다. 게랑제와 같은 특징들로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방향을 띠고 있었다. 곧, 다양한 행동반경과 리듬이 부과되는 본당에서의 전례 사목 방향이었다. 교회 예배 안에 그리스도교 신심과 생활을 고취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수세자들이 전례에 참여하도록 촉진할 필요가 있었다. 말리느의 대회에서 다음의 요구사항들을 만들었다. 즉, ①그리스도인의 책으로서 번역된 미사경본의 확산, ②본당 미사 참여를 통하여, 또 ‘옛 전례 전통’(끝기도, 식탁 축복, 절기의 고유 예식과 기도 등)을 회복하여 저녁기도와 가족 단위의 참여를 통하여 (미사의 기도에 의한 영성체 준비와 감사제를 분리하지 않을 것을 지적하면서) 신심에 대한 더욱 전례적인 작업의 착수, ③비오 10세의 노선에 일치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촉진, ④전례 사목 책임자들을 위한 연중 피정의 계획 등이다.
보뒤앵에게 있어 자기 활동의 두가지 수단이 있었다. 하나는 ‘전례 의문’(Questions Liturgiques, 1910)이란 잡지이며, 얼마 후 본당 전례의 사정을 감안하여 ‘본당의 전례적 의문들’(Questions Liturgiques paroissiales)이란 이름으로 첨가 변경된다.
다른 하나는 성직자들을 전례 지식을 주기 위한 ‘전례 주간’ 행사로 ‘전례 주간의 연수와 학회’(Cours et conférences des semaines liturgiques)로 출간하였다. Cours et conférences des semaines liturgiques I-XV, Louvain 1912-1948.
이 운동의 초기 노력은 아주 대단하였으며, 운동의 촉진자들은 탈그리스도교화를 거슬러 투쟁하고 교회를 쇄신하는 전례 사목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지만, 지나친 환상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전례 운동의 확산은 두 번의 세계 대전 동안 부분적으로 멈추었지만, 전쟁 이후 각 시기마다 새로운 용기로 운동을 확대하는 것에로 돌아갔었다. 전례 운동에 관한 사목적 확산은 몽세자르와 성 안드레아 대수도원 뿐 아니라 벨기에 전체에 번졌으며, 불란서에서는 ‘빠리 전례 사목 센터’(Centre de Pastorale liturgique de Paris), 독어권은 마리아락(Maria Laach) 대수도원, 트레비리(Treviri)의 전례 연구소(LiturgieInstitutum),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의 비오 본당과 참사위원들, 그리고 전 교회에서는 ‘전례 국제 대회’(Congresso internazionale di Liturgia)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이후 몇몇의 센터와 연구소들이 생기게 된다.
전례 운동의 발전 가운데 두 번의 급변하는 성장이 나타나며, 잘 극복하지 못하였고 일반적인 것으로 되돌아 가 버렸다. 하나는 전례와 영성에 관한 급변(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전례와 책무에 관한 것이었다. ① 전례와 영성에 관한 문제점이 1913-1914에 페스튀지에르(Festugière O.S.B.)와 나바텔(Navatel S.J.) 사이에 불붙은 논쟁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논쟁의 핵심이 약화되었다가, 1929년부터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라는 회칙이 발표될 때까지 또 다시 날카롭게 된다. 평화로 돌아가지만 근본의 문제들이 남게 된다. 나중에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 오래된 핵심을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전례헌장 9-13항의 내용이 이 사안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전례 영성의 필요성(9항), 미사성제의 전례적 중심(10항), 그러므로 전례 사목의 언급(11항)과 전례 외적 신앙생활(12항)이 필요하며, 전례 신심도 함께 거론(13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돌변은 지금도 항구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전례와 영성의 관계는, 교회의 예배에 대한, 그리고 같은 교회 구성원들의 영성적 활동에 대한 개념에 의존한다. 나바텔과 많은 다른 이들, 그리고 오늘날에도, 전례는 미사와 성사와 준성사의 예절적, 장식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성사들을 받는 것 가운데, 또 영성적 금욕적 활동들 사이에서 전례는 이차적 삼차적 차원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반면 페스튀지에르와 이를 계승한 전례 신학자들은, 교회의 예배가 그리스도의 총합적인 기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신비가 특출하게 드러나는 현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들은,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정의하듯이, ‘성장하고(crescens) 활동하는(activa)’ 참여(partecipatio)와 함께 전례를 ‘인격화’(personificatio)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례에 관한 이 개념에서 교회적-공동체적 의미가 활발하게 싹트게 되며, 뜨렌또 공의회 이후 영성에 관한 본래의 것인, 신자들의 영성 활동의 개인적(개인주의적) 그리고 주관적(주관주의적) 의미에 상반되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객관적 가치들에 열중하게 된다. 전례 운동의 같은 노력은 획득한 가치들을 빈번히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곧, 교회적-공동체적 의미에서 공동체주의(communitarismus)로 넘어가고, 그리스도교 구원의 객관적 가치에 대한 결코 충분치 않은 심취는 객관주의(objectivismus: 정적주의[quietismus] 정적주의는 17세기 후반 스페인의 몰리노스(Molinos)가 주창한 신비주의적 종교 운동으로, 평온한 생활을 좋아하고 무사안일한 태도를 지향하기도 하였으며, 감정의 이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객관주의의 느낌(의미)에 좌우하지 않으며, 객관화된 뜻함(의미함)이 중점을 이루고 그것만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의 형태)와 범(汎)전례주의(pan-liturgismus)에로 넘어가 버린다. 참여와 소위 공동체적 미사에의 독려로 회중없이 거행되는 미사를 논하게 만들었으며, 교회적 예배의 승인으로 신심행위들과 금욕적 실천들을 배척하고 징계하게 되며, 더 나아가 성체공경과 용서의 성사에 대한 신심행위적 접근까지도 배제하고 멸시하게 된다. 결국, 전례가 제일이므로 다른 신심행사를 무시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한다.
② 두 번째의 급변 상황은 전례와 그리스도교 책무와의 관계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빠리의 전례 사목 센터에 의해 조직된 연구 단계들 가운데, 전례 전문가들과 로마와 기타 지역, 도시 중심과 주변 밀집 등의 환경에서 직무에 종사하는 사제들이 ‘일반 가톨릭 활동’(Actio Catholica generalis)과 특수한 운동들로 인해 모이게 되었다. 이 모임들에서 교회 전례 안에 세속적 가치들을 대다수 도입할 것과, 유럽과 선교 지방의 새로운 상황에 따른 예배를 더 좋게 적응하자는 열망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로 전례 언어의 문제가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이처럼 전례 운동은, 게랑제의 복구(부흥)의 분위기에서 개혁주의자들의 분위기에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보뒤앵과 같은 위대한 전례 선구자들은 쇄신가들이었지 개혁가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개인이나 그룹에 의해서, 2차 대전 이후 이 시대까지 개방된 노선이나, 전례의 자유로운 실험의 노선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3. 전례학
전례학에 관해서는 이 시대에 가장 의미있는 불어권과 독어권의 문화적 분위기에 한정해서 언급할 것이다. 첫 단계로 먼저 불어권에서 전례학 연구는 게랑제의 인식에 거의 학문적으로 단결하기 위해, ‘전례의 역사와 건축’(historia et archeologia liturgiae)이 맞추어 이루어졌다. 두번째 단계로, 두 언어권에서 학문적 노력과 유포의 노력은 역사를 포함한 전례 신학을 고정하게 된다. 전례신학은 또한 교회 예배의 영성과 사목도 또한 이해하게 된다.
① 초기에 위대한 발견들이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교 예배의 기원에 대해, 루이 뒤쉐느(Louis Duchesne)가 주로 활약하였다. 미사와 성무일도의 역사에 관하여, 삐에르 바띠폴(Pierre Batiffol)이 대표적이다. 또 ‘그리스도교 건축과 전례 대사전’(Dictionaire d´Archéologie chrétienne et de Liturgie)이 출간되었으며, 이 대사전은 페르낭 까브롤(Fernand Cabrol)과 앙리 레끌레르끄(Henri Leclercq)의 주도로 이루어진 방대한 사전이다. 모자라빅 전례(Liturgia mozarabica)의 훌륭한 텍스트들도 출간되었다. 모자라빅 전례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페로땡(Férotin)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로 역시 불어권에서 이 단계에서는 이미 언급하였던 보뒤앵(Beauduin)과 페스튀지에르(Festigière)가 연구하고 있었다. 여러 학자들이, 텍스트 비판, 역사적 연구 그리고 다양한 단계의 신학적 작업 등을 기여하게 된다. 그들은 미사와 전례의 다른 주제들의 역사를 밝혀 내고, 베르나르 까뻴르(Bernard Capelle)가 대표적이다. 미사 기도문의 원전들을 찾아내었으며, 브뤼이랑(P. Bruylants) 신부를 들 수 있다. 또 히뽈리또의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과 미사 성찬기도문(Canon)의 텍스트 비판을 출판하고 수많은 전례서와 시리즈를 저술하였다. 봇트(Botte)가 이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많은 것들이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작업에서 확대되고 채택 결정된다.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로마 전례의 역사 연구에 가장 뛰어난 학자들 중의 하나인 미쉘 앙드리유(Michel Andrieu)를 잊을 수 없는데, 그는 모든 개혁의 반대편이었다. 개혁(reformatio)과 쇄신(renovatio)은 구별된다. 교회는 자기 쇄신을 끊임없이 이루어야 하지만, 개혁은 반대한다.
역사를 발견하고 파급한 이들과 전례 신학이 만나 설립한 것이 ‘빠리의 전례 사목 센터’(1943)이다. 여기에 특별히 로게(Roguet), 마르티모르(Martimort), 지이(Gy), 주넬(Jounel) 등이 이 연구소와 관련이 있다.
이 센터는 전문가들을 위해 방브(Vanves)에서 연구 과정을 조직하고, 베르사이유(Versailles)에서 전례 주간을 열었는데, 2차 대전 이후의 전례적 재탄생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센터는 또한 몽세자르 대수도원과 ‘빠리의 고급 전례 연구소’와 함께, 세계적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집’(La Maison-Dieu) 잡지와 ‘기도의 법’(Lex orandi)이란 시리즈 발간을 시작하였다.
② 독어권에서 바탕은 특히 묄러(Möhler)에 의해 북돋워진 교회론적 쇄신에 의해 준비되었다. 여기서는 전례 운동의 둘째 단계라 불리는 것에 한정해서 볼 것이다.
여기서는 마리아 라흐(Maria Laach) 대수도원이 그 중심이었다. 주로 1918년부터, 그리고 이후에 먼저 일데퐁소 헤어베건(Ildefonso Herwegen) 수도원장과 함께, 전례의 인식을 확산할 목적으로 ‘기도하는 교회’(Ecclesia orans)라는 선집(選集)을 발간하였다. 이 선집의 첫번째 권은 로마노 과르디니(R. Guardini)의 ‘전례의 정신’(Vom Geist der Liturgie)이란 책이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전례 운동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결정적인 모양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연구가 오도 카젤(Odo Casel)이었다. ‘예배 안에 구원적 신비가 현재한다’는 그의 연구 결과와 이 이론의 확산은, 이 세기에 지속되는 가장 유능한 신학적 이론들 중의 한가지를 세우게 된다. 그는 ‘전례학 연보’(Jahrbuch für Liturgiewissenschaft) 발행의 책임자였으며, 이 책들 안에 자신의 연구 결실들을 소개하고 있다. 쿠니베르트 몰베르크(Kunibert Mohlberg)도 마리아 라흐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텍스트(전례 원전들) 시리즈와 연구물 시리즈 편집의 책임자로 있었다. 이 출판물들은 나중에 ‘전례학의 원전과 탐구’(Liturgiewissenschaftliche Quellen und Forschungen)라는 하나의 시리즈 간행물로 통합된다. 과르디니 이상으로 마리아 라흐와 그의 업적과 관계되는 회원들이 또한 출현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될거(Dölger), 바움쉬타르크(Baumstark), 매이어(A.L. Mayer) 등이 활약하게 된다.
또한 융만(J.A. Jungmann)을 빼놓을 수 없는데, 독일에서 전례 운동에 공헌한 그의 기여는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까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봇트(Botte)는 “이 세대의 가장 큰 연구가는 의심할 바 없이 오지리 사람 예수회원 융만”이라 하였다.
빠리의 전례 사목 센터와 어깨를 견줄 만한 곳으로, ‘트레비리(Treviri)의 고급 전례 연구소’(1947)였다. 이 연구소의 업적을 쌓은 이는 봐그너(Wagner)와 특히 피셔(Fischer)를 잊을 수 없다. 1951년부터 이 연구소가 발행한 잡지는 ‘전례 연보’(Liturgisches Jahrbuch)이다.
③ 빠리의 전례 사목 센터와 트레비리의 연구소에 의해 조직된 국제 전례 회의들을 통한 공통 임무로, 이처럼 자주 경쟁 관계였던 불란서와 독일을 전례가 하나로 만들었다. 마리아 라흐에서 1951년에 시작하였으며, 전 세계의 연구가들이 모였다. 1953년에 제3회에서는 교회 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성삼일’(Triduum paschale) 개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56년의 아씨시(Assisi) 모임은, 세계의 고위 성직자들과 사목자들의 참여로, 또 전례 개혁을 위해 조성해 왔던 확산과 기다림의 분위기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대회들은 미래에 갖게 될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의 기초에 투사된다. 또 교회가 (전례에 관한) 하나의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고 공의회의 (전례)헌장을 작업하고 승인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던 연구가들 사이에 팀 정신을 갖게 해주었다.
여기서 또한 전례 운동에 관한 다른 나라들의 학문적 공동 작업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공동 작업이 옥스포드(Oxford)의 운동과 영국의 전례 연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이태리에서는 교회 안에서 음악 쇄신이 도움을 주었으며, 스페인에서는 옛 스페인 언어와 그레고리안(노래)에 관한 기여가 있었다.
4. 전례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여기서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와 비오 12세(1939-1958)의 문헌을 지적할 수 있다.
① 비오 10세 교황은 전례적 관심으로 인해 이미 교황직에 오르기 전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교황이 된 뒤 석 달만에 종교음악을 쇄신하고 그레고리안을 복구하기 위해 자의교서 ‘신속하게’(Tra le sollecitudine, 1903)을 발표하였다. 2년 후 빈번한 영성체를 촉진하기 위해 헌장 ‘거룩한 뜨렌또 공의회’(Sacra tridentina synodus, 1905)를, 또 5년 후 아이들에게 영성체를 자상하게 허락하는 것에 관한 헌장 ‘개별적인 것’(Quam singulari, 1910)을 공포하였다. 1911년에 성무일도의 개혁과 주일 전례의 재평가에 관한 사도헌장 ‘하느님의 숨결’(Divino Afflatu)을 내놓았으며, 1913년에 전례주년과 성무일도에 근거한 개혁의 새로운 차원을 드러내는 자의교서 ‘지금부터 두 해’(Abhinc duos annos)를 발표하였다. 이 문헌들은 DP I, 3.5.7.8.10에서 찾아 볼 수 있다. [DP = Documenta Pontificia ad Instarurationem Liturgicam Spectantiam, ed. Bugnini, I(1903-1953) Roma 1957, II(1953-1959) Roma 1959]
비오 10세 교황의 전례적 가르침 가운데 분명하게 세 가지 노선이 주목된다. 즉,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를’ 노래하고 기도하는 것을 취급하는 것” “거룩한 전례 거행들 안에서 전례가 부차적 차원으로 또 음악에 봉사하는 것처럼 드러나는 중대한 남용같은 것은 단죄받아야 한다. 반면 음악은 전례의 한 부분, 전례의 겸손한 여종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DP I, 3.42. 이기 때문에
①성음악의 쇄신, ②어린이들의 영성체 참여: 이로써 신자들과 난간 사이 수세기의 장벽을 부수고, 또한 영성체에 관한 교리를 개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찬례의 성사적 참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성찬 영성체가, 그리스도와의 결합과 인격적 정화와 활기에 매인 것만큼,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의 참여에 연계시키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DP I, 5.3.12.16; 7.8.11s.14 참조. ③전례주년과 성무일도에 관한 개혁 등이다.
비오 10세의 전례 쇄신의 의미는 다음의 내용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가장 생생한 열망은, 모든 노력들로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을 꽃피우는 것에로 돌아가며 모든 신자들 안에 지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무엇보다 먼저 성전의 거룩함과 위엄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자들의 필수 불가결한 첫째가는 원천(샘) 안에서 그리스도교 정신을 찾기 위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교 정신은 교회의 거룩한 신비와 공공의 장엄한 기도를 거행하는 능동적인 참여를 말한다.” DP I, 12. 그는 또한 “나의 백성이 아름다운 전례로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비오 10세 이후 보뒤앵에게 ‘능동적 참여’는 전례 사목의 주제가 된다. ② 비오 12세 교황의 풍부한 가르침 중에는 두개의 문헌이 두드려진다. 곧, 전례 운동의 대헌장이라 일컬어지는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와 앞에서 언급하였던 ‘아씨시의 국제 전례 모임의 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단지 ‘하느님의 중재자’ 회칙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하지만 이 회칙은 비오 12세에 의해 종점에 도달한 전례 쇄신의 몇가지 자료들을 회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자료들은, 성무일도에 관한 성직자 양성의 교육(1945), 몇가지 경우에 견진 거행 허용의 선택을 사제에게 확대하는 것(1946), 2개 국어 대조 예식의 증가, 특히 1947년 회칙 발표 이후의 것으로, 부제직, 사제직, 주교직의 질료와 형상의 결정(1948), 부활 전야 예절의 개혁(1951), 성찬례 공심제의 개혁(1953, 1957)이며, 또 같은 해에 저녁 미사의 도입, 성주간의 개혁(1955), 2개 국어 대조 독서집(1958) 등이다. 비오 12세 교황의 전례 업적은 1958년의 ‘성음악과 전례에 관한 훈령’(Instructio de musica sacra et liturgia)으로 완성되며 오늘날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회칙 ‘성음악의 가르침’(Musicae sacrae disciplinae)과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의 규정에 따른 것이다.
이 마지막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1947)는 교회의 전례 운동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으로 가르침이 완결되고 짜임새 있는 전례 교리를 소개하고 있다. 근본의 주제에 관해서, 이 회칙은 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의 서곡이 된다.
이 교황 문헌의 근본 내용을 밝혀 주는 가장 잘 실현된 주제들을 강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그리스도 신비체의, 머리와 몸의 공공의 총체적 예배로서, 또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사제적 중재의 특출한 현존으로서 전례의 신학. DP I, 41.20.22 참조. 나) 교회 예배의 내적이고 심오한 차원인 전례의 영성: “신성한 예배의 외적이고 감성적인 순수 측면으로, 또는 장식하는 예절적인 것으로 전례를 고려하는 이들은 완전히 실수하는 것이다. 반면 전례를 교회 교계가 예식들의 꼴을 만들고 명령하는 법이나 규정들의 총합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덜 실수하는 것은 아니다.” DP I, 41.25. 또한 24-27.192 참조할 것. 다) 범전례주의와 예배의 평가절하 사이에 기회주의자가 아닌 신학적 균형, 주관적 신심과 객관적 신심,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성찬례의 거행과 예배,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DP I, 41.65.199.28-37.82-103.65-135.8-10.204s. 그리고 DP I, 41.24-27.192.170-183 참조.
이 회칙의 균형 잡힌 같은 태도는, 신학적으로 ‘부족한 면모들’을 완성한다면, 미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곧, 신학적으로 부족한 면모들은, ①신자들의 사제직에 관한 교리가 적합하게 발달하지 않았고 부족하다는 것과 ②전례 참여의 본질적인 것, 예컨대 DP I, 41.82-103 참조. 아마도 핵심이 되는 분위기는 두드러진 결핍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③전례 거행의 상징적 표징들에 대해 때로는 미완성의 신학인 외형주의(extrinsecismus), 예컨대, 이처럼 전례적 상징들은, “예배를 촉진하고... 교육하고... 기도한다.” 비오 12세 교황은 보나(Bona) 추기경의 말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DP I, 41.23.100.105-107 참조: 전례적 상징을 보태는 것을 신자들의 영성적 능력에 두었다). 하지만 십자가의 희생은 분리된 종류의 상징들 안에 현재하게 하고 드러내 준다(DP I, 41.69 참조). ④믿는 것을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을 믿는다는 금언인 ‘기도의 법, 믿음의 법’(Lex orandi, lex credendi)을, 교회 신앙의 결백한 숙고로서 또한 자기 성숙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이해하는 것, DP I, 41.47 참조. ⑤신비적이고 교화하는 의미 사이에 요동치는 전례주년의 다소 난해한 소개 DP I, 41.152-158.163 참조. 등이다.
아씨시 대회의 참석자들에게 하신 교황 비오 12세의 말씀은, “전례 운동은, 신자들의 전례생활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현재의 시간 위에 하느님 섭리질서의 한 표지로서, 당신 교회 안에 성령의 횡단으로 표명되며, 무엇보다 신앙의 신비와 은총의 풍요로움에로 사람들을 가까이 다가가도록 제시된다.” DP II, 71.2
이로 인해 교황청은 전례 운동을 촉진하였으며, 실수와 불완전으로부터 이것을 보호하였다. DP II, 71.2.38. 교황청이 전례 운동을 촉진한 다른 증언들을 보면, 회칙 ‘하느님의 중재자’ DP I, 45.48와 교회에서 위험한 상황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요청되는 성무일도의 ‘충고’(monitum) DP II, 81 등에도 나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