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례역사-01] : 교회 역사 발전 가운데 교회의 전례적·성사적 삶 제1장 신약성서 시대의 예배
전례의 역사 :교회 역사 발전 안에서 교회의 전례적·성사적 삶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때까지, 전례 세계는, 하느님의 신비로움과 영원성에 대한 숙고를, 아직까지 전적으로 신비스럽고 만질 수 없으며 그래서 전 시대를 걸쳐 달리 바꿀 수 없는 고정된 실재로 고려해 왔었다. 사고의 태도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인간론적 바탕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의 균형을 위협하였던 동일한 의도들이 전례를 취급할 때에 아직도 계속된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있어서 분명하게 ‘전례적 단성론’(典禮的 單性論: monofisismus liturgicus)의 것으로 판단된다.(참조 : 신학적으로 다른 이런 환경에서 전례와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은 같은 용어들의 다름아니다. 그 이상으로 ‘전례적 단성론’은 ‘전례적 네스토리아니즘’의 반대되는 경향도 마찬가지로 설명한다. 이러한 사상의 의미심장한 예들은 J. A. 융만의 Missarum Sollemnia, Torino 1963, I, 35-36과 각주를 참조할 것. ‘전례적 단성론’에 대한 올바른 비판을 위해서는 전례헌장 10항 첫 문장을 참조할 것.)
하지만 전례에 관한 그러한 한가지 생각은 역사적 무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생겨날 수도 생존할 수도 없었다. 실재로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전례적 건축물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많은 공동 업적의 결과이며, 전례 생활 가운데 발자취를 남겼던 수많은 그리스도교 세대들의 (항상 의도된 것은 아니라도) 작업의 결과이다.
이제, 연대에 따라 다소간 업적이 있고 운동하며 발전하는 이 역사는 다른 요인들과 교차점에 그리고 상호 영향에 있지 않다면 정확하게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 생활의 더욱 일반적인 구조에 전례의 각 시대를 위치시키는 것에, 그리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사건들과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성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일반적인 배경에는 한가지 근원적이고 규정적인 표징이 있는데, ‘성찬례’(Eucharistia)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에서 모든 예배적, 성사적 행위의 모태이다. 그러므로, 다음 부분에서 보게 되는데, 신학적 숙고의 관점(성사론)보다 거행적 차원(전례신학)에서 성찬례의 발전이 역사적 종합의 규범을 암시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 전례 역사의 언급을 시작하면서 관심을 갖고 봐야 할 것은, 전례의 역사적 뿌리 안에서 설명하고 이해하기를 찾는 ‘입맛을 맞춘 전례’(liturgia condita)로서 뿐 아니라, 믿는 이들 공동체의 적합한 표현이 되어야 하고 시간적·공간적으로 정리된 범위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살고 거행하는 ‘입맛을 맞추어야 하는 전례’(liturgia condenda)로 또한 전개될 것임을 관심기울여야 한다.(참조: 딱 맞아 떨어지고 적합한 예식을 고르고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전례의 근본원리, 변화와 변천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그것을 오늘날 적응하고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의향으로 전례 역사에 의하면, 또한 전례적-성사적 분야에서도, “지나간 역사의 비판적 기억은 미래 사건에로 개방의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제1장 신약성서 시대의 예배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각각의 세대가 전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그 중에 특히 초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장 강하게 흔적을 남겼다 하겠다. 실상 그리스도교 생활의 여타의 방면이나 차원에서, 또한 예배에서도 사도 공동체는 계승되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들에게 신원(identitas)의 한가지 모델이며 역동성의 근원(요인)이 된다.
성서, 전례에서 근거적 중요성
그리스도교 체험의 초기에 전례와 성서의 밀접한 관계를 여기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서가 공동체의 첫 전례서였다는 것, 그리고 ①성서가 설교와 기도를 공유(같은 맥락)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②공동체적 예배가 신약성서의 동일한 수태에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행했다는 것을 덧붙이는 것이 당연하다. 공동체적 전례,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음식나누기’(agapé)는 복음적 전통들의 결정(結晶)의 훌륭한 자리(유일한 것은 아니지만)가 되었다.(참조 : ‘음식나누기’는 전례의 핵심인 성찬례의 근간이 되는 원리이다. 그 나눔의 의미를 오늘날에도 되새겨 강조해야 하며, 우리 문화권의 나눔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강하다.)
하지만 한가지 어떤 절제로 신약성서 안에 나타난 예배의 연구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성서의 기록들이 참으로 중심이 되는 의문들에 일상적으로 대답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배에 관해서는 단지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의 활동 가운데 뚜렷한 특징인 ‘비조직성’은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에도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상으로 초기 공동체들은 전적으로 동질의 것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며, 여기서 그들 전례적 표현들이 필연적으로 표시하는 매우 다른 느낌들이 서로 합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열쇠가 되는 주제는, 초기의 전례가 여기서 엄밀하게 유래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았던 새 계약과 토라(Tora)와의 관계의 문제이며, 이것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희랍계 그리스도인들 그룹과의 대치되는 태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초기 집회들의 전례 형태들에 관해 확보하고 있는 자료들이 소수이고 경우에 따라 부정확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에 관한 신약성서적 원천들을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신약성서는 예배의 관념에 있어 생성과 소멸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체험의 바탕인 ‘자리’(humus)와, 예배의 다른 개념들과의 관련되는 연속성의 윤곽들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의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명시에 있어서,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의 재인식을 표현한다. 종교의 현상은 많은 종교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예배적이고 공통적인 형태의 존립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종교들은 구체적인 문화에 순응하여 여러가지 다양성들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도록 부추키는 종교적 내용에 관한 것을 특히 이 문화에 끼워넣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적 계시는 자연 종교의 더욱 광범위한 확산 가운데 파기의 순간과 일종의 호된 시련을 만들어 버린다. 신약성서는 구약의 유대 전통과 비교해 볼 때 연속성과 파기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획기적인 일을 보여 줄 것이다.
1. 히브리의 뿌리
지금의 탐색들은 성서 외적인 것보다 성서적인 히브리 세계와 함께 기원들에 관한 그리스도교 예배의 유전적인 관계를 강하게 강조한다.(참조 : 전례 역사에 있어 새로운 이 경향은 또 다른 성향에로 속하는데, 얼마전에 유행하던 것으로 희랍 신비 종교들과 그리스도교 예배의 유추에로 도약해 버린다. 이런 입장을 버려두고도 어떤 가설의 이런 종류의 불충분한 과학적 일관성은 기본에 있어 차이점을 보여준다.) 곧 주위의 종교들이 자연 종교들이며, 그들의 예배가 영원한 회귀에 대한 그리고 우주의 끊임없는 생성·소멸에 대한 신화의 예식적 호환인 반면, 유대·그리스도교의 성서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고 그 예배는 ‘기념’(zikkarôn)의 개념에 관해 분명하게 표현한다.(참조 : ‘기억’ 또는 ‘기념’으로 표기하는 이말의 히브리어 표현(zikkarôn)은 희랍어(ánamnesis)와 라틴어(memoriale)의 표현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미 그 안에 ‘거행’(celebratio)의 뉘앙스가 함께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주님’ 안에 그 핵심을 띠고 있는데, 주님은 유일하시고 위격적인 하느님이시며, 당신 백성을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며 당신과의 사랑의 계약을 세우시기 위해 역사 안에 능동적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출애급의 근본적인 체험은, 정치적 차원에서 백성의 자유와 육성의 운동으로서, 종교적 차원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의 수용과 회개의 운동에 적용된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예배의 한가지 새로운 범주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든 예배는 열쇠로서 이 ‘사건’을 기억하도록 전적으로 방향지워져 있다.
결과적으로 앞서 실천했던 예배 형태들은 하나의 ‘재-해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연중의 큰 축제들은, 이 중에서 첫째는 빠스카로서 그 우주적-자연적 뿌리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인데, 역사적 차원에서 한가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이후 세대들에게는 ‘기념적인 것’으로 변모시킨다. 즉 시간 안에서 삼중의 단계(과거, 현재, 미래)에 따라 구성되는 내적인 기념인데, 과거를 되살리며(revocatio), 거행은 어떤 모양으로 참여자들에게 사건을 현존케 하며(praesentiam redare), 최종적인 새로운 출애급의 기다림 가운데(adventus) 미래와 희망의 역동성으로 그들을 모으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전망의 내면에는, 이스라엘의 예배가 역사와 현재 기념의 좌표들 가운데 창조와 자연의 관조적인 관점을 보완하는 것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참조 : 여기에 관한 분명한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설명하는 찬미의 노래 시편 136편을 들 수 있다.)
‘베라카’(berakah)는 의심없이 이스라엘 백성의 전형적인 문학적-종교적 형태이다. ‘베라카’는 유대 랍비 문학의 특별한 의미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모든 기도문구를 가리키며, 일반적 의미로는 보통의 축복기도문을 가리킨다.
①이것은 개인적 양심의 묘사에서 생겨난 다음에, ②공동체 예배에서 기꺼이 받아들여 ③광범위하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④이스라엘 백성의 고유한 것으로 거룩한 실재의 한가지 본래의 자각으로 표현한다. 이것의 형태적 구성에는 출발점으로서 ‘감탄의 연발’(주님은 찬미받으소서...)과, 당신 백성에 대해 호의로 하느님이 이루신 ‘위대한 업적’(Mirabilia Dei)들의 기념과 함께 찬미의 동기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또 창조와 구원 역사라는 이중적인 기본 주제를 습관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영혼의 이러한 창조, 이것은 ‘베라카’ 또는 ‘유대의 축복문’인데,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성찬례(Eucharistia christiana)의 모태성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주님이 당신 백성으로부터 기다리는 예배는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형식적인 찬미, 순전히 외적인 행위에 한정될 수는 없으며, 공경의 한가지 내적 태도만으로도 제한될 수 없다. 실재에 대한 총체적 예배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들음과 계약의 실천적인 충실함 가운데 필연적인 연장을 예견한다.(참조 : 이 점에 관해서는 신명기 10,12-13에서 힘있게 표현하고 있다.)
시켐(Sichem)에서의 커다란 집회는 구원 역사로서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는 거룩한 말씀 가운데 관계를, 그리고 하느님 법에 순종으로 그 말씀에 대한 백성의 응답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참조 : 시켐의 집회에 대해서는 여호수아기 24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역사 가운데 해방하시는 주님과의 만남, 예배 가운데 그것을 재인식하는 (전례) 거행, 그리고 계약에 충실함 가운데 한결같은 응답 등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안에서 완벽한 지속으로 세가지 기초의 순간들을 설정하게 된다. 즉, ‘역사-예배-법’(Historia-Cultus-Lex)의 계보는 구약 성서에서 하느님 백성의 이상(理想)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아주 빈번하게 백성은 이러한 체계 가운데 실천적인 분리를 설정하였는데, 하느님의 의지에 충실한 생활로 인한 필연적인 응답보다는 촉진하는 하느님의 말씀의 예식을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예식주의적 자세는 역사의 내면에서 자유의 현존이신 하느님의 정확한 이미지를 왜곡시켜 버렸다. 예언적 선포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늦지 않았었다. 사실 차례차례로 예언자들은, 피흘리는 범죄와 사회적 부정의 구조를 하느님 앞에서 덮어주고 정당화시키기를 찾는 빈껍데기의 형식주의적인 예배를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그것은 위선적인 예배였는데, 그 예식들에서 마술적인 신뢰를 음흉하게 부채질하는 것이었으며 충실함의 요구와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전적으로 멀어진 위선이었다. 바로 이런 예배가 하느님께는 혐오스러운 것임을 예언자들은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 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 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그들이 나를 공경한다 하여도 사람들한테 배운 습관일 뿐이다.” (이사 29,13.)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 (호세 6,6. 같은 노선의 귀절들을 선별하면 다음과 같다: 미가 6,5-8; 이사 1,10-16; 예레 6,20; 집회 34,18-26.)
예언자들의 태도가, 예배의 외적 형태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거부로서, 단지 윤리적인 품행의 호의로 설명되지 않아야 한다면, 예언적 비판이, 하느님 말씀의 주의깊은 경청에서 생겨나며 계약으로 존재하는 충실함에 지속하는 ‘총체적인 섬김’으로서, 근본적으로 예배에 관계되고 이상적인 성조(聖祖)를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성전파괴와 유배의 결과로 성전의 예배가 소멸될 때에, 그래서 이에 대한 비판이 흘려 넘치고, 백성 가운데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희생으로서 예배의 범주가 성숙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도자도 예언자도 왕도 없으며 번제물도 희생제물도 봉헌제물도 유향도 없고 첫 열매를 바칠 장소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에서 당신의 자비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하게 된 정신을 받아 주소서. 이것을 염소와 황소의 번제물로 여기시며 수많은 살진 양으로 여기시고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당신께 바치는 제물이오니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완전히 따르게 하소서. 당신께 희망을 건 사람들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렵니다. 그리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당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뵈옵기를 갈망합니다.” (다니 3,38-41.)
결국 이스라엘의 예배는, 과거 해방의 사건들의 기념(memoriale)으로서 희망의 운동과 미래를 목전에 둔 종말론적 긴장을 포함하게 된다. 이 백성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때에도 예배는 ①출애급의 해방되는 체험을 되살렸으며, 동시에 ②하나의 새로운 출애급의 기다림에로 불러 모았으며, 그리고 ③한편 창조의 하느님을 감탄하고 찬미하였으며, ④하나의 새창조의 기다림에로 재촉하였다. 하지만 이 이상(utopia)은, 하느님 친히 마음들의 바탕을 변화시키기를, 그리고 모든 민족들의 공동체에 개방된 하나의 ‘새로운 예배’(참조 : 예레 31,31-34; 에제 36,25-27 참조.) 의 자격을 주시기 위해 당신 영의 충만한 확산으로 인간 내면을 정화시키기를 약속하지 않으신다면,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2. 그리스도교 예배의 기원
신앙과 예배적 표현 사이의 대응에 있어서, 유대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이 다르듯이, 그리스도교 전례는 유대 전례와 구별된다. 신약성서의 전반적인 숙고는 놀랄만한 사실을 보여준다. 즉 일종의 ‘반예배적 특성’(anti-cultualitas), 유대나 이방인 환경의 예배 범주의 경계에서 멀리하거나 파기하는 태도, 하나의 새로운 실재의 현존을 강렬하게 보여주려는 바탕을 지닌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집회의 거행을 위해서는 거룩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성찰한 방법으로, 그리고 특히 예배 용어의 특수한 사용과 적용으로 보인다. 실상 고유한 그리스도교 환경에서는 기술적인 예배 언어들(예컨대 사제, 희생제사 등)을 명백히 피할려는 태도가 있었다. 또는 오히려 이것들을 새롭고 본래의 의미로 사용할 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초기 세대들의 이러한 이상한 ‘반예배적 특성’은, 예배의 면전에서 가졌던 예수의 주관적인 태도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예배에 대한 예수의 태도
① 나자렛 예수는 당신 백성의 예배 체제의 환경 안에서 사셨고 활동하셨다. 안식일에는 “늘 하시던 대로(참조 : "루까 4,16; 이하 다음 성서 귀절 참조할 것: 마르 1,21-39; 3,1-6; 6,2; 마태 4,23; 9,35; 12,9; 13,54; 루까 4,44; 6,6; 13,10; 요한 6,59; 18,20.) 회당의 집회에 참여하셨다. 더 나아가 당신의 때가 되자 신앙심 깊은 유대인처럼 성전의 예배에 참여하고 연중의 순례에 참여하셨다.(참조 : 루까 2,41-42; 요한 2,13; 5,1; 7,2-14; 10,22-23 등을 참조할 것. ② 하지만, 예수께서는 고유한 지고의 자유를 보여주시면서, 또한 도전적인 태도로 이스라엘 예배 질서를 침해하셨다.(참조 : 안식일에 대해서 마르 2,23-28를, 식사전 정화의 전통 예식들에 관해서는 마르 7,1 이하를 참조할 것) 예수의 이러한 주관적인 태도의 동기는, 예배법들에 대한 이론적인 철폐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느님의 고유한 현재화를 원하시는 그분의 자유로우신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로 인하여 회당이나 성전에의 방문도 당신 가운데 현존케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나날의 식사 가운데 예수의 습관적인 행동은 참회 예식이나 전례없이 하느님의 너그러우심과 용서를 실현하신다.(참조 : 이외에도 당신의 개혁적인 의지는 명백하게 예언적 전통의 연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관한 귀절은 마르 11,15-17과 병행구를 참조할 것. 이것은 이사 56,7과 예레 7,3-11의 인용이다. 마태 9,13은 호세 6,6의 인용임.)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자세에서 모든 법이 요약되고 집중하듯이, 예배의 환경에서도 여기에 대해 가치나 무가치를 조건짓는 근본적인 요구들을 상기시키고 분명하게 만든다. 즉 형제에 대한 사랑과 용서이다.(마태 5,23-24; 15,5-9 참조. 여기서는 이사 29,13; 마르 7,6-7에 나오는 예배의 평가를 분명하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마르 12,33.)고 율법학자가 만족스럽게 했던 대답을 받아들이시고, 반면 근본적인 이 원칙을 이해하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을 자주 힐책하셨다.(마태 9,13; 12,7 참조.)
참된 예배자들로부터 하느님이 요구하시며 예수 또한 가르치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 전 존재와 생애로 몸소 사셨던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요한 4,20-24 참조할 것. 여기서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를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선포하셨다.(이점을 볼 때에, 마술적인 실현 가능성을 만들려고 하는 생각, 즉 예식적인 행위들을 반복하는 것, 마르 7,11; 마태 15,5.)
기도 때에 말을 많이 하는 것(마태 6,7.) 등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요한의 이 본문은 인간의 정신 안에 외적인 예배와 또 다른 내적 예배 사이를 대치시키기 위해 영성주의적 의미로 기술한 것은 아니다. “그 때에”(in illo tempore)라는 요한의 표현(요한 4, 21.)은 종말론적 의미를 띠고 있으며, 23절의 “지금이 바로 그 때다”라는 말로 분명해진다. 사실, 예수의 위격으로 현재화하시는 한,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따라 하느님을 경배하는 형태를 선포하고 있다.
즉 당신의 방법에 의하면 하느님을 찾는 이들은 알지 못했던 현재까지 ‘성부’와의 친밀함(가까이 있음)에로 동반된 것이다. ‘영’(Pneuma)의 개념은 거룩한 영을 설명하는 것이며, ‘진리’는 예수에 의해 계시된 진리, 여기에로 모든 이들이 참여해야 하는 거룩한 진리를 의미한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이중적 표현은 두가지 구성요소 안에 동일한 의미를 띠고 있다. 즉 정확한 하느님 공경에 있어서, 하느님 당신 스스로에 의해 인간이 할 줄 알게 되기 이전에, 하느님의 영에 의해 충만해지고 침투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다.
참된 예배에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하느님은 스스로 인간에게 능력을 거저 주신다. 단지 이렇게 할 때만 자기 존재의 총체성 안에 인간은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요한 3,21; 1 요한 1,6. 그리고 사랑의 새계명을 완수함으로써(요한 13,35 참조) 자기 자신에 대해 ‘사제’(sacerdos)일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죽으시기 전날 밤, 성전의 파괴가 절박함을 분명히 하시고, 맹렬한 예언적 행위로 또한 모든 형태의 희생제사 예배의 종막을 선언하셨는데, 하느님과 상업적 거래(몸값을 치르고 사심)에 바탕을 두고있다.(마르 11,15-17; 마태 21,12-17; 루까 19,45-48; 요한 2,14-17 참조.)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사도 공동체에 있어서 성전 예배의 제도가 결정적으로 종막을 고했음을 의미한다.(마르 15,38과 병행구 참조)
2) 새 예배의 기초
유대의 신앙고백인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아’, Shemá Israel)이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이 유일하신 주님”임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필립 2,11)이심을 선포한다. 이제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성전과 회당과 유대 예배에 일반적으로 결합하는 탯줄을 즉시 끊지 않으면서도, 반면에 한가지 새로운 현상을 도입하고 있다. 곧, ‘복음’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모든 기록들은, 예배에 관한 그들의 개념에 있어, 다음의 기초가 되는 두가지 확인에 의해 내부적으로 이해된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예배의 이름이 가치를 지니게 되는 이 모든 것은 결정적인 이 사건에 의해 표지되며, 이 사건은 인간들에 대한 호의로 하느님이 실현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에 의해 부활하신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나자렛의 예수이며, 이스라엘로부터 배척당했고 “법에 따라”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당신 자신의 처지에 관해서 유대 종교와 예배에 대한 태도가 구원 사업을 하기에 무능력하며 가치가 부족하다는 확신의 근거가 된다.
이상의 이중적 측면은, 표면상 드러난 놀랄만한 ‘반예배적 특성’ 또는 신약성서, 특히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예배 용어들이 그리스도론에 집중하는 것을 설명한다. 사실 구약성서의 거룩하고 예배적인 용어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곧, 그분은 성전이시며,(요한 2,19 참조)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며,(마태 12,5 이하 참조) 영원한 대사제이시고,(히브 2,17; 7,23-28 참조) 그리스도인들의 훌륭하신 전례가이며,(히브 8,1 이하 참조) 새 계약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다.(히브 8,6 참조) 당신의 전 존재가, 당신 죽음의 봉헌에서 충만하게 된 속죄의 사제적 직무였다. 그 예로, 희생제사이며,(히브 10,5 이하 참조) 그분 자신이 봉헌물이시며,(에페 5,2 참조) 당신 피를 통하여 정화하고 성화하는 희생제사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36; 1 베드 1,19; 묵시 5,6.12; 13,8 참조) 한번 영광(칭송)받으심으로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호의로 사제직을 수행하신다. 이것 때문에 그분 안에 우리는 하느님께 ‘접근’했으며,(로마 5,1 이하 참조) 그분을 통해서 신뢰로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히브 10,19 이하 참조)
그리스도론적 의미에서 예배 언어의 이러한 전환은, 그리스도가 전례적 거행의 친밀하고 항구한 실재이심을 그 이후로 나타내주며, 그 결과로 전례는 신앙의 훈련이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임을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3) 예배로서의 삶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도 바울로의 표현은 “성령 안에서”라는 요한의 표현에서 유사하고 대응한 것으로 찾아 본다면, 그리스도론적 의미에서 예배의 전환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전이도 포함하는 것이다. ‘영’(Pneuma)은 종말론적 삶의 ‘시초’(primitia)와 ‘보증’을 설정하며,(2 고린 1,22; 5,5; 로마 8,23; 에페 1,13 이하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선물로서 미리 맛보게 된다.(히브 6,4 이하 참조) 그 결과로 신약성서에의 신성하고 예배적인 표현들은 영의 행위들과 선물들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양으로 세상 안에서 신앙인의 총체적 존재는, 그리스도의 영의 충실함 가운데 삶으로써 마지막 때의 완전한 예배인 “영성적(정신적) 예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나는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이것이 곧 여러분의 ‘정신적 예배’입니다.” 로마 12,1 이하 참조. 200주년 성서의 주석에 따르면, “직역할 때 ‘이성적 예배’이며,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외적 의식에 치중하는 경신례와는 달리, 일상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성실히 실천하는 ‘생활예배’를 가리킨다.(호세 6,6 참조”라 적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하나의 새로운 예배에로 초대한다. 이것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자세인 ‘세상의 예배’가 그들 생활의 전례이며, 하지만 그들의 내재적인 기준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로마 12,2 참조. 이어지는 귀절들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의 여러가지 다양한 은사(Charisma)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공동체의 내부에서 행사되는 봉사의 이 선물들은, 역할을 하지 않는 선물들을 위한 봉사에로 또한 전환된다. 하지만 이 봉사는, 그들 주님에 의해 안내되고 형성되도록 하는 공동체에만 이 선물을 제공할 수 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모신 이러한 공동체는 세상에서 이러한 “영적 예배”를 봉헌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 거룩한 예배의 교리가 그리스도교 윤리로 필연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거룩한 예배는 윤리적인 차원만 몸에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예배와 상호 호환적이다. 즉 윤리는 삶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로는 열쇠가 되는 전례적 용어로 자신의 사도 직무를 설명하고 있다.(로마 15,16 참조) 하지만 의심없이 관련되는 의미들의 더 조밀한 귀절은 1 베드 2,5이다. (참조 : 1 베드 2,5의 본문은, “여러분도 산 돌로서 거룩한 제관이 되기 위해 영적인 집으로 세워지도록 하시오. 이는 영적인 희생,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기 위함입니다.”이다.)
여기서는 기초가 되는 예배 범주들(성전, 사제직, 희생제물 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에 따라 재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예배란 ‘종말론적 예배’, ‘영적 예배’, ‘그리스도론적 예배’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은 마지막 때의 최종적인 예배이며, 세상 안에서 실현된 것이며, 나날의 생활에서 이루어지며, 영의 능동적인 현존 아래 거행되고, 예수 사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3. 그리스도교 집회와 그 예배적 형태
예배로서의 삶은, 즉 그리스도와 영 안에서 종말론적 찬미의 표현으로서, “이미”와 “아직 아니”의 변증법적 환경 안에서만 존립한다. 사실, 공간적-시간적으로 잘 배열된 내심의 믿는 이들은, 육체성과 역사성의 자신들의 차원을 살고 있으며, 신앙을 공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표징과 상징을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해 삶의 예배, 또는 ‘세상의 예배’는 그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교회적 전례가 필요한 것이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교회, 전례적 집회로 모임
실상 신약성서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전례)거행을 실천하고 전례적 집회에 모인 예식들을 완수하는 것을 본다. ‘교회’(ekklesía)라는 말은 희랍어 성서(70인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막으로 소집하는 것인데, 신약성서에서는 먼저 동일한 한 장소에 모인 신자들의 구체적인 모임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는 한정된 도시에 사는 믿는 이들의 그룹 또는 세상에 흩어진 믿는 이들 모두를 가리킨다. 곧 전례적 집회는 교회의 존재 자체를 보여주는 한 ‘자리’이다.
집회의 입문 예식은 세례
집회의 입문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 예식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한가지 새로운 것(창조적인 것)인데 내용에 있어서 그런 것이지 예식적인 표현에 의해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예식은 동시대 유대의 내용, 그리고 특히 세자 요한의 세례를, 즉 현존하는 다양한 세례 전통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세례에 관한 귀절들이 풍성한 것은 이것은 성찬례에 관한 귀절들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스도교 세례 예식이 즉시 그리스도교 선교의 기초가 되는 한가지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상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나 고린도서에서, 그 공동체들의 모든 구성원들과 자기 자신도 세례를 받았다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 6,3; 1 고린 12,13 참조. 하지만 그리스도교 세례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 시작하였는지 알기 위한 자료들, 그리고 요한의 세례에 대한 채택과 그리스도론적 재해석에 가졌던 마지막 순간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정짓기 위한 자료들은 부족한 실정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 입교 예식에 관한 전승들의 다양함, 이것은 전례역사를 통해 초세기에 이미 존재하던 것들인데, 이것을 현재 유지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식용 욕조의 다양한 형태들에 고유하고 본래의 흔적을 남겨둠으로써, 형태들을 처음부터 받아들이고 공통화하였다.
세례의 단계들
첫 회개들에 대해서 설명할 때, 바로 오순절 그날 이후,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의 기초가 되는 한가지 체계(schema)를 제공하며, 이것은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복음화’(evangelizatio), ‘신앙’(metánoia), ‘세례’(baptismus)이다.(참조 : 사도 2,41; 8,12; 18,8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세례는 이중적 측면에서 신앙의 표지로 소개된다. 즉 복음 메세지인 전해진 신앙의 인호, 동시에 내적 동의로 받아들인 신앙의 인호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굳셈과 일치의 중심을 찾아보는 본래의 집단으로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렇게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그들의 전례적 생활에 관한 소식들을 전해주는 것은 사도행전과 고린토 전서이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
사도 2,42은 초기 공동체 생활의 이상화된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요약된 묘사는 두개씩 묶인 네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①사도들의 가르침과 ②형제적 통교(koinonia), 그리고 ③빵 나눔과 ④기도 등이다. 해설가들은 이 귀절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례적 설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와 보 라이케(Bo Reicke)를 들 수 있다.
‘부지런하다’(proskarterûntes)라는 동사에 뒤따르는 이 네가지 어휘 안에서 이어지는 네부분으로 한가지 전례적 행위의 발전을 재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스타니슬라오 리온네(Stanislao Lyonnet)가 대표적이다.
본질적으로 취급된 이 네가지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한가지 구성을 설정하는 것으로 각각 다루기를 선호한다. 아마도 이 두가지 설명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생물학에서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듯이, 이처럼 예배 집회도 자신의 구체적인 개별 발전에 있어서, 스승의 충실한 추종자에 영감받는 각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초적인 차원을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네번째 요소인 ‘기도’ 부분에서, 이것도 역시 유대의 전통적 실천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인데, 예루살렘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보존된 것이며, 다른 세가지 요소들은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것들이다. 이렇듯이 구약성서에서 이미 암시된 차원과 함께 내면적인 병행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을 들음-예배-법에 순종함’이라는 계보에 대해 ‘사도들의 가르침-빵 나눔-형제적 친교’라는 체계가 따른다. 예배와 성사들은, 한 부분에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새 법에 대한 자세와 형제적 친교의 운용과 함께 분명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 귀절(사도 2,42)의 체계적인 묘사를 단순히 모델로 사용하면서, 신약성서의 여러 책들에서 거의 항상 빈약한 모습으로 암시하고 있는 전례적 형태들의 특징을 곧바로 간결하게 찾아 보자.
1) 사도들의 가르침 초기 공동체의 전례적 집회들은 하나의 ‘가르침’(didaché)으로 시작하였다. 트로아스의 모임의(사도 20,7 이하 참조) 전례 거행에서 사도의 살아있는 말씀을 다시 듣게 된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공동체에 보낸 바울로의 사도적 편지인 ‘기록된 말씀’은 모임에서 첫 부분에 위치한다. 서간들 끝에서 기억하는 예식적 입맞춤은 이 부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로마 16,16; 1 고린 16,20; 2 고린 13,12; 1 데살 5,26; 1 베드 5,14)
모인 형제들간에 평화의 인사(입맞춤)는 ①받은 말씀의 날인과 다음에 가질 형제들 간의 ②식사 거행의 준비를 설정하는 것이다. ‘디다케’(didaché)는(참조 : ‘디다케’의 우리말 번역본은, (정 양모 역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교부문헌 총서 7권, 분도출판사 1993을 참조할 것) 예수의 말씀들과 행위들의 기억하지만, 분명하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에 비추어 구약성서의 독서를 적용하고 있다. 예수 자신이 이 독서 말씀을 실현하셨고 사도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셨다.(루까 4,17-21; 7,27; 24,25 이하 참조)
그리스도교 집회의 이 요소에서 안식일 회당에서 실천했던 유산을 찾아보며, 이 유산은 예수에 의해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 일정하게 계속 이어진다.(사도 13,12 참조) 안식일날 실행하였던 회당의 섬김(예배)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즉, ①첫 부분은 십계명을 읊음, 신앙고백문,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문’은 ‘들으라, 이스라엘아’(Shemá Israel)로 시작하는 고백문으로 성서 귀절들로 구성되어 있다.(신명 6,4-9이하; 11,13-22; 15,37-41 참조)
일련의 12개 축복문 12개로 구성된 이 ‘축복 기도문’은 실상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 내용은 오히려 ‘하느님 찬미’의 뜻을 담고 있다. 제목은 ‘쉐모네흐 에스레흐’(Shemoneh esreh)이다.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모임의 ②두번째 부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첫째 독서로서 모세오경에서 취한 것, ‘토라’(Torá)의 독서 등이다. 그리고 ‘하프라라’(hafrarah) 또는 결론부라 불리는, 예언서들 중에서 취한 짧은 독서가 따른다. 설교 또는 읽은 성서 말씀의 주석은 안식일 예절(섬김)의 공통적이고 중요한 한가지 요소이다. 회당의 실천과 새로운 공동체(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말씀의 봉사와의 분리는, ‘토라’의 그 부분과 유대의 전 전통이 ‘토라’를 설명하고 재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제시하지 않은 반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선포하는 것을 요청하고 주님의 말씀이 당신의 실제성 안에 살아 계심을 계속 알리기를 제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1고린 14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집회의 좋은 역할을 위한 일련의 규정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 대해서 몇몇 주석가들은 고린토에 그리스도교 집회의 서로 다른 두가지 형태를 찾으려 하였다. 한가지는 주의 만찬을 거행할 목적으로, 여기서는 믿는 이들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성찬례 거행없이 기도와 노래와 말씀의 선포와 권고 등에 봉헌된 집회를 설정한 것으로, 여기에는 믿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호의적인 사람들도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주석가들이 공감하는 것과는 먼 가설인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마음을 다하고 감사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적 찬가를 노래하라”(골로 3,16; 에페 5,19 참조)고 권고하고 있다.(참조 : 필립 2,6-11; 골로 1,15-20; 2,1; 에페 2,14-16; 5,14; 1 디모 3,16; 히브 1,3; 1 베드 3,18-22; 요한 1,1 이하 등을 들 수 있다.) 근래의 연구들은 신약성서의 서간들에 특히 나타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찬미가 ‘자료체’(corpus)의 흔적들을 재인식하였다. 그러나 초기 공동체들의 이러한 찬미가 잔류물들의 구체적인 전례적 체계를 깨닫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2) ‘공동체’(koinonia) 또는 ‘형제적 친교’(communio fraterna)
이 두번째 요소는, 고유한 전례적 집회의 필요 불가결한 것에 한해, 이중적 의미를 채택할 수 있다. 즉 ‘구심적인’(중앙집중식의) 의미에서 식탁의 ‘공동체’(koinonia)는 공동 식사와 함께 실현되는 친교(통교)를 설명하며, ‘원심적인’(분산적인) 의미에서는 가장 필요한 이들을 위해 선물을 모으는 것을 설명한다. 후자의 경우 로마 15,26 등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다. 초대 공동체는 두가지 관례대로 모으는데, 곧 공동체적 식사와 상호 도움의 봉사이다. 자선의 봉사는 1세기 유대사상에 있어서 잘 알려져 있었고 관습적이었으며, 이것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설명된다. 자선의 봉사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순례객들의 십일조, 외국인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 떠도는 ‘불쌍한 이들의 죽 한사발’, 특히 금요일 저녁 자기 나라의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을 위한 주간 도움을 베푸는 회당들의 풍습 등을 들 수 있다.
사도 6,1-6에서 알 수 있는 사항은, 비록 희랍 과부들이 분배의 불평등에 불만을 터뜨렸지만, 자선은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한가지 실천이었다. 1 고린 11,17-34도, 비록 생각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공동체의 식사와 집회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을 위한 염려 사이의 연관성을 소개해 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음식과 자선헌금의 연결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적 식사가 소모해야 할 재물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공동체 식사의) 모든 ‘식구’들은 축제 때에 기여하도록 요청되었다. 같은 노선에서, 주일날 모임의 분위기에서, 예루살렘의 필요한 형제들에 대한 도움으로 사도 바울로 의해 실행된 자선헌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고린 16,2; 로마 15,26-28; 갈라 2,10; 2 고린 8-9장; 사도 24,17 참조.
공동체 식사와 상호 도움의 봉사 사이의 내면적 관계는, 전형적인 이중적 설명으로 결정화되었다. 이것은 만찬에 대한 설명과 빵을 많게 한 설명으로, 식사를 주관하신 예수의 동일한 행동으로 결속된 이 두가지 모두는, ①‘감사를 드리시고’, ②‘빵을 나누시고’, ③‘그것을 나누어 주신’(또는 ‘그것을 나누어 주게 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 식사는 빵을 많게 하는 것을 계속하고 연장하여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봉사’(diakonía)라는 말처럼, ‘공동체’(koinonía)라는 말은 동시에 ‘음식을 친교하는(함께 나누는) 공동체’와 ‘상호 도움의 봉사’를 묘사하는 것이다.
3) 빵을 나눔
의심없이 이것은 전례적 집회의 절정이며, 여기서 예배의 그리스도론적 전이가 높은 밀도를 띠게 된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전하십시오” 1 고린 11,26. 라고 사도 바울로가 말한 바와 같다. 이 문장에는 이처럼 내용의 풍부함이 담겨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과거, 부활하신 주님의 현재, 다시 오실 주님의 미래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예배의 설정된 삼중의 차원인 것이다.
‘주님의 만찬’ (1 고린 11,20 참조)이라는 이름은, 최소한 고린토인들에게, 성찬이 저녁 무렵에 거행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형제적 ‘친교’(communio)의 도입 표지에 의한 ‘애찬’(agápe)에 대해서 불화의 동기로 그리고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보호로 변화되는 일상적인 식사에로 동반한다. 처음에 유대 거행의 체계에 따르면, 빵과 포도주잔의 예식은 저녁식사(만찬)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매우 빠르게, 아마도 첫 10년 내에, 이 두개의 예식이 결합하였으며, 규칙적으로 식사 끝에 위치하게 되었다. 설명문의 대칭되는 양식은, 문학적 일치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래 그 시대의 유대 관습과 조화에 의하면 축복의 잔 위에 가장 중요한 ‘베라카’(berakah)를 읊었기 때문에 식사 끝부분에 선택된 것이다. 더 나아가 희랍인들의 환경에서 그것은 ‘연회’(symposium)의 때였다. ‘빵의 나눔’으로서 주님 만찬의 명시는, ‘성찬례’와 말 그대로의 ‘저녁식사’와 분리의 결과로 정확하게 드러난다. 사실 사도 20,21은 결정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성찬 거행의 동일한 구조 안에서 이처럼 급박한 발전은 저녁식사의 설명에 관한 두가지 전통(희랍과 팔레스타인)으로 이해된다.
이제 성찬 거행의 ‘장소’와 ‘시간’에 대해 간단히 고려해 보자. 공동체들은 개인들의 집에서 또는 ‘거룩한 공간’(성전, 회당 등) 밖에 모였다. 집회의 내적인 역동성(활동성)은 손님 대접의 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예루살렘에서는 분명히 몇 채의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공동체가 모이곤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요한 마르꼬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다. 사도 12,12 참조.
예루살렘 밖에는 로마와 에페소의 브리스카(Prisca)와 아퀼라(Aquila)의 집과(로마 16,5; 1 고린 16,19 참조) 라우디케아의 닌파(Ninfa)의 집과(골로 4,15 참조) 골로세(Colosse)의 필레몬의 집이 (필레 2 참조) 알려져 있다. 가택의 환경은 그 형태로 특징이 지어지는데, 단지 모이는 공동체 인원수와 구성원들간의 상호 관계에 의한 것뿐 아니라 거행의 기초가 되는 형태들, 즉 말씀과 공동의 잔치에도 기인한다. 집회의 주기 리듬과 거행의 날에 관해서는 신약성서의 본문들은 매우 빈약하다. 개인 집에서의 나날의 모임과 음식물을 분배하는 것에 대해 짧게 암시하고 있지만,(사도 2,46; 6,1 참조) 처음부터 안식일 다음날인 주간 첫째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 되었으며, 이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부활을 거행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 기금마련 같은 트로아스에서의 집회는(사도 20,7 참조) 바로 그날(주일날), 분명하게는 성찬례 모임의 체제로(1 고린 16,2 참조) 자기 고유의 것을 실행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처음으로 주님의 날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본다.(묵시 1,10; ‘디다케’ 14장 참조)
1 고린 11,20에 나오는 주님의 날(hè kyriaké heméra)과 주님의 만찬(kyriakón deípnon)은 둘다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을 취하며, 이 둘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 ‘주님의 만찬’은 시간의 삼중의 차원(과거, 현재, 미래)으로 당신의 현존을 되살리며, 묵시록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둘러싼 동일한 비젼을 현재시킨다.
그러므로, 성서 여기 저기서 그리스도교 집회의 흔적들을 찾아 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 기록을 가로지르는 종말론적 긴장은, ‘주 예수님, 오소서’(Marana tha)라는 외침과 함께 주님 만찬에 대한 희망의 동일한 역동성을 포함하고 있다.(묵시 22,20; 1 고린 16,22; 디다케 10,6 참조)
묵시록에 나오는 찬가와 파급된 선포는 초기 그리스도교 집회들의 주일 전례를 바탕으로 잘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이처럼 주님의 날에 갖는 천상 전례와 공동체 전례의 체험 사이의 관계를 예견할 수 있다. 연중 ‘그리스도교 과월절’의 축제 거행에 관해서 신약성서는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어떠한 논거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1 고린 5,6-8의 본문은, 처음 보기에는, 고린토에서의 그리스도교 빠스카의 거행을 전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가 사용하는 대조법은 과월절의 주제로 그것을 전개함으로써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며, 고린토 공동체에서 빠스카의 그리스도교적 거행을 고유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4) 기 도
사도 2,42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언급은 아마도, 사도 4,24이하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들이 주도하는 공동의 기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끊임없이 지속하였던 유대의 전통적 실천을 가르킨다. 여기 전형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초기의 세가지 특징(사도의 가르침, 친교, 빵나눔)과 함께, 이 세가지 특징은 명백히 유대의 바탕을 갖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유대인의 하루 중 세번의 기도의 때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세번의 기도의 때는, 이것들이 사도들에 의해 실천되는 것을 본다. 즉, 제9시의 기도 또는 오후의 희생제사(tamid),(사도 3,1 참조. 제9시는 오후 3시 경에 해당된다.) 제6시의 기도 또는 정오,(사도 10,9 참조, 제6시는 낮 12시 경이다.) 제3시의 기도나 아침 희생제사(tamid)의 시간(사도 2,1; 2,15 등이 여기에 관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 제3시는 오전 9시 경을 가리킨다.) 등이다. 다른 부분 사도 2,46에서는 성전에의 ‘부지런한’ 참석을 보여주며, 사도 21,26은 바울로의 정화의 예절과 성전에서의 희생물 봉헌을 설명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동안이나 성전(예배)에 충실하였는지 알 수 없다. 모든 모양에 있어서 부활 신앙은 공적인 유대사상의 환경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특징짓고 있다. 또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론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봉헌한 한가지 고유한 자기들의 ‘희생제사’(tamid)의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 이후 점차 새로운 내용으로 유대사상의 예배적 관습을 재해석하고 본래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미 1세기 말에 세번의 매일 기도 가운데 ‘주님의 기도’(Pater noster)에 대한 규정을 찾아 볼 수 있다.(디다케 8장 참조)
의심없이, 사도들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는 ‘기도할 줄 아는’ 백성에서 태어 났다. 유대 전통은 기도에 관한 자신들의 양식들을 갖고 있었지만, 표현에 대한 어떤 자유도 알고 있었고 호의적이었다. 그 전통의 항구한 한가지 특징에 있어서, 사실 구두 전통(구전)은 내적 구조를 통하여, 매우 정확한 양식-연결을 지나서, 그리고 이어서 기도들의 형식화를 위한 자유와 창조의 자리를 지탱하는 주변에서 전해지길 의도한다. 유대사상은 자신의 매일 기도 가운데 내적으로는 저변에 한가지 구조를 지향하는 이러한 자유를 사용하였으며, 창조성을 넘어선 균일하게 개방된 형식화를 만들어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에 대한 유대의 방향은 ‘양식적’이라기보다 ‘지침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의 종교 환경의 경계에서 하나의 파기를 표시하고, 공동체들 가운데 다양한 열의의 분위기에서 살았던 것이 사실이라면, 유대적 실천의 기초가 되는 요소들을 보존하고 되찾고 적응할 줄도 알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그들의 기도가 정착되어 있고 또한 창조적인 파급으로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스승의 말씀에 있어서, 주님의 기도나 성찬 설정문의 양식과 같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과도하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예수 친히 하신 말씀 자체’(ipsissima verba Jesu)를 보존할려고 염려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공통 기본 구조의 환경에서 다양한 형식화가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린토 공동체의 추한 현상에(1고린 14,1-33 참조) 예언이나 이상한 언어의 은사가 추한 모습을 보여 공동체가 오합지졸이 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오히려 집회에서 장황한 말이 아니라, 이성적인 몇마디의 말로 예배의 통일성과 질서를 가질 것을 지적하고 있다.
임기응변이나 자발성의 어떤 여지가 끼어들 수 있는지 규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가 사도의 통제 아래의 한 분야로 공동체의 전례를 고려했고, 내적으로 불화한 하나의 공동체에 주님 만찬의 거행 형태를 부인하는 것에까지,(1고린 11,17 이하 참조) 그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분간하도록 힘썼으며, 참되게 그리고 그릇되게 드러난 것을 구별하도록 하였다.
체계없이 실행하는 것과 한가지 체계만을 고집하는 것 사이에 자유와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조화된 종합이 위치한다. 이것은 신약성서 시대에 예배의 모델을 특징짓는 것이다. 목적은, 세상에서 부활하신 분의 몸처럼 항상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건설(oikodomé)는 oikodomé는 건축, 건설의 뜻과 함께 교화, 강화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한 공동체적 의미를 함축하는 oikos는 집, 거처, 처소 또는 가족, 식구 또는 백성, 후손, 가문, 재산 등을 가리킨다.
풍부함과 창조적 자유이든지, 통제와 필요한 분별이든지 이것들이 올바른 것임을 드러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