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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역사-02] : 제2장 순교자 시대의 전례(2-3세기)
1. 일반적인 배경
새 창조의 시대, 영지주의의 위협
사도들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시대는 변천과 재발견의 시대였다. 교회는 자신의 뿌리를 유대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그리스-라틴 세계로 침투하게 된다. 기원 후 70년에서 140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사상은 여러 지방으로 확대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고유한 창조성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 첫 시기의 발전은 교회의 외적 변화에서보다는 교회의 내적 생활에서 더 명백한 것이다. 아직도 유대-그리스도교적 사고의 형태들이 남아 있었으며, 신학적 토론의 중대함의 중심은 유대 사상과 논쟁하는 것이 계속되었다. 유대 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주변에 영지주의(gnocismus) 분파들이 들끓게 되었는데, 이들은 동방의 이원론을 그리스도교 계시의 몇 가지 요소들과 뒤섞으면서 하나의 종교적 혼합주의를 실천하였다. 그들의 매혹하는 힘은 전파의 교묘한 방법들에 뿐 아니라, 이방의 신비주의적 경배보다 그리스도교에서 취한 전례적 예식 형태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생성하는 그리스도교는 영지주의 안에서 위험한 적군을 만나는데, 이는 고유한 공동체의 내부로부터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위협하였다.
그리스도교를 거부함, 호교론의 발달
첫 십 여 년간 그리스도교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세력있는 하나의 사회적 실재로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확장되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매우 일찍 이방 세계의 관심을 끌었으며, 예컨대 동방에서 유입된 다른 종교적 예배들을 반대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거부하는 태도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적대적 관계의 원인은, 의심없이 그리스도교 사상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 곧 자기 신앙의 절대적 주장의 특성 안에 있다. 이것은 로마 국가 종교들과 개방된 대조에로 피할 수 없게 직면하게 된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유대 사상에 의해 더욱 조장된 것에 있어서는, 그들 옛 신앙을 거부하는 유대-그리스도교인들을 용서할 수 없는 적대의 환경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능동적인 임무가 실현된다.
그리스도교 사상의 심화
2세기말과 3세기초 사이, 이 때에는 생성하는 교회가 외적인 확장에서보다 내적 구조에 있어서 큰 교회 또는 보편 교회로서 확인되는 한 시기가 열리게 된다. 유대적 환경에서 벗어난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은 그리스-로마 세계 전체에서 심화된다. 새로운 상황은 그 자체로 인해 넘어야 할 장애들일 뿐 아니라, 새로운 과제들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회의 습관과 관습에 한가지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예배 세계에 대해 무엇을 준수하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시대 위대한 그리스도교 교육자들의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와 떼르뚤리아노가 대표적이다. 능동적 태도는 이 비판적 인식을 달성하는데 공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해, 신앙의 결속과 확산의 동기
3세기, 여러 박해들 가운데 두 번의 긴 평화의 시기는, 공경의 형태들 안에, 신학적 반성 안에, 항상 더욱 풍부한 문학적·예술적 표현들 안에 반영하는 것으로 복음화하는 강한 행위와 괄목할 만한 지속성이 내적인 조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내적인 결속과 그리스도교 확산의 자극은 이방 사상 자체에 있어 지평의 전환으로 감싸져 있다.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명력은, 우세한 그 때까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능력들의 비판으로 인해 꽃피우게 된다.
신앙의 자유, 신앙적 혼란 야기
3세기 말, 그러니까 이 때는 정치적이고 문화적 분야 안에서 과도기이며, 그리스도교 교회의 분명한 확산기였다. 관계자들의 숫자와 선망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옛 이방 사상을 대체하고 새로운 문명을 잉태하는데 활성화하는 능력을 갖고 제국의 주된 정신적 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새로운 환경 안에 현존했으며, 지배 계급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귀의하였다. 실상 이미 콘스탄티노 이전에, 아직 형태적·문화적으로 이방적 구조 안이지만 제국의 살아있는 세력은 큰 부분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것이었다. 모든 것에 대해 교회의 상황(신학적으로, 금지된 종교)이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예배를 위한 수많은 공간들과 점유에 대해 만족하였다. 이 모두와 함께 ‘은사의 씁쓸한’ 진행이 시작된다. 곧 숫자는 많아지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질(qualitas)은 아니다. 교회의 새로운 처지에서 선천적인 위험들의 징후(전조)처럼, 여기 3세기 오리게네스의 증언을 들 수 있다: “진실로, 사물들을 실재(realitas)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숫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특질에 근거를 두고, 모아 놓은 군중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Origenes, Homilia Lev. IV, 3.
2. 전례 발전의 노선들
첫 2세기 동안 예배의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은 아직 막연하고 희미한 것이었으며, 3세기에 이르러 더욱 활기 있고 분명한 것이 많이 나타난다. 신학적 표현의 발달은 전례의 영역에서 유사한 진행으로 조화를 이룬다. 보편 교회 안에 항상 더욱 결속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필요성의 응답으로 새로운 창조적 자극과 새로운 전례적 형태들이 주목된다.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 사도 이후 시기의 근본적인 특징의 표라면, 순교자 시대의 그리스도 추종자들은 두가지 근본 실재에 의해 표시된다. 즉, 세례와 순교이다. 그의 경우에 이러한 세례의 영성과 순교의 영성은 교회적인 강한 의식에 의해 드러난다. ‘어머니이신 교회’(mater ecclesia), ‘그리스도의 정배’(sponsa Christi)같은 주제들은 빈번하게 3세기의 저술가들 주위에서 찾아본다.
그리스도교 첫 세대들은, 동시대인들로부터 ‘무신론자들과 불신앙인들’의 고발을 참아 받아야 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그 예로, 이방인 첼수스(Celsus)가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러, “여러분의 눈은 성전도, 제단도, 거룩함의 형상도 지탱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였다. 여기에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발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2세기 말의 미누치우스 펠릭스(M. Felix)는 “우리가 성전도 제단도 갖고 있지 않다.”(Origenes, Contra Celsum VII, 62: PG 11,1507-1508; Minucius Felix, Octavius 32,1: CSEL 2,45. [CSEL = 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Wien 1866이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당대 이방 종교인들보다 덜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구성상 단순하지만, 아름다움이 부족하지 않고 다양하고 풍부한 하나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한편 이 전례는, 그의 표현 형태들에 있어 지역 교회(ecclesia localis)와 개별 교회(ecclesia particularis)에 따라 차이점들을 당연히 인정되었지만, 여러 교회에서 동일한 본질적인 한가지 핵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전례 사상에 있어서 상당히 관심이 큰 하나의 원천 자료는 로마의 히뽈리또의 저술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으로 규정한다. Hippolytus(이 형우 神父 譯), Traditio Apostolica(사도전승), (교부문헌 총서 6), 분도출판사 1992(이하 ‘사도전승’) 참조. 오리게네스의 동시대인 이 저술가는 개연적으로는 그의 스승인 이레네오(Ireneus)처럼 동방의 기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 가치들의 강렬한 수호자로 보이는데,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옛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기를 원했다. 그의 ‘준수자’(conservator)로서의 태도는 전례 역사를 찾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사실 히뽈리또에 의해 전수된 예식들과 텍스트들은, 사도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작품의 제목이 주장하고 있듯이 실제보다 먼저 10년이 확실하게 더 앞선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
1) 예비자 기간과 세례
입교교육, 복음화의 필요성 · 이단 방어 · 신비주의의 우월성 예비자 교리교육은 2-3세기 교회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된 것들 중의 하나이다. 곧 신약성서에서 초기단계로 실천하였던 것의 체계적 발전인 것이다. 사도행전에 의해 표시된 입교과정, 곧 복음화-신앙(회개)-세례의 과정인 그리스도인이 됨의 기초 과정은 오늘날 오직 한가지 교육적 틀로 인해 보증된다. 이것이 생겨나게 되는데, 여러 가지 원인들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첫째로는 ①복음화하는 중요한 행위와, 새 개종자들과 연륜이 짧은 공동체들의 ‘특질’(qualitas)을 지탱할 의지 등이다. 다음으로는 특히 ②영지주의와 같은 이단 분파들의 커져 가는 위협인데,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부에 이르기까지 침투해 들어왔으며 그로 인해 입교자들의 더 좋은 교육을 부과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③신비주의적 경배의 분야에서 경쟁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예비자 기간의 기원에 있어 아마도 사적인 입교였다가 다음 때에는 고유한 것이 된 다음에 교회에 의해 통제되고 보증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스티노(Justinus)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초기 스승의 경우가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초 교회의 이런 교육은 충분하게 발전하였다. 당대의 예비자 기간을 재설정하기 위한 중요한 원천 자료들이 있지만, 떼르뚤리아노(Tertullianus)와 오리게네스(Origenes)의 자료들을 들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히뽈리또의 ‘사도전승’의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보면, 예비자 기간은 신앙 양성을 위한 하나의 긴 시간인데, 관습적으로 3년간이며, 두 번의 시험을 거쳐야 했다. 예비자 기간의 과정은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 ‘예비자 기간에 들어감’(ingressus in catechumenatum) : 받아들이는 첫 시험은 이미 후보자들의 선택을 실행한다. 이들은 보증인(대부)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에 의해 소개되어야 하며, 그 보증인은 희망자의 회개의 의지를 처음으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시험은 후보자의 결정, 그의 혼인관계들, 그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 등을 조건짓는 동기들을 검토한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결실 안에 양립할 수 없는 일련의 것들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예컨대 매춘하는 집을 계속 갖고 있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3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직업들은 주로 이방 예배, 군인 복무나 제국의 공무 등과 관련되는 것들이었다.
나) ‘교리적 양성’(formatio doctrinalis) : 첫 시험 후에 후보자를 위한 교리교육 기간이 시작되며, 평신도보다는 교회의 ‘교사들’(doctores)에 의해 양성된다. 이 점에 대해 히뽈리또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도전승 18장, 119쪽 참조. 한가지 고유한 예식인 십자가의 ‘수여’(consignatio) 또는 십자가 표지는 교리교육을 하는 이 기간에 나타나는데, 3년의 기간이 특별한 소임의 경우에 단축할 수 있다. 사도전승 17장, 119쪽 참조.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의 교사’(doctor audientium)의 관심 아래 후보자는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총체에로 인도하는 특별한 교육을 받게 된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성서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와 함께 교육받는 이는 전례 독서와 강론을 통하여 더욱 맛들이게 된다. 여기에는 항상 기도와 예비자들에 대한 교사들의 안수를 함께 하는 집회에 포함된다.
다) ‘세례의 가까운 준비’(praeparatio proxima ad baptismum) : 교리교육의 두 번째 측면은 세례를 위한 후보자들의 새로운 시험으로 종결된다. 후보자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 보증인(대부)이 또 다시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비자가, 그의 나날의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기를 노력하고 병자들을 방문하고 과부를 위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의 근본적인 계명을 실천하였는지 인지했던 것을 묻는다. 그리스도인 자세의 더 나은 증거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것’이었다. 세례를 받지 않고 박해 가운데 목숨을 잃었다면, ‘자신의 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혈세). 사도전승 19장, 121쪽; Tertullianus, De baptismo 12.14: CSEL 20,210-213; Cyprianus, Epistula 57,4: CSEL 3,653; Epistula 73,21.23: CSEL 3,784-796 참조할 것.
이 시도가 통과되면, 뽑힌 후보자(간택자, electus)들은 기도와 단식과 예식적 구마로 특징되는 근접한 준비의 단계에 접할 수 있게 된다. 이 시기에 간택자들이 ‘복음을 들었다’(evangelium audiant)고 히뽈리또는 증언하고 있다. 이 때 이후로 아마도 성찬례 가운데 말씀 전례에 참여하는 의무를 전해 준다. 마지막 주간에는 후보자들이 더욱 구체적인 한가지 준비를 받고, 예식들을 함께 하며, 이렇게 세례의 큰 날에 다가가는 것이다.
라) ‘세례거행’(celebratio baptismi) : 세례 예식에 관한 거행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수탉이 울 시각에 먼저 물에 기도할 것이다.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나 위에서부터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불가피한 경우가 항존하고 절박하다면, 현지에 있는 물을 사용할 것이다. (세례받을 사람들은) 옷을 벗을 것이며, 너희는 어린이(parvulus)들에게 먼저 세례를 베풀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스스로 대답할 것이고, 말할 수 없는 (어린이의 경우에는) 부모나 그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그들 대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남자(vir)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 다음 여자(mulier)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여자들은 모두 자기 머리를 풀고, 몸에 지니고 있는 금이나 은의 장신구를 벗어 놓을 것이니, 아무도 다른 어떤 것을 걸치고 물에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감독자(episcopus)는 기름에 감사의 기도를 바친 다음 그릇에 담을 것이니, 이를 감사의 기름(oleum gratiarum actionis)이라 부른다. 그리고 다른 기름을 들고 구마식을 할 것이니, 이것을 구마의 기름(oleum exorcismi)이라 부른다. 한 봉사자(diaconus)는 구마의 기름을 가지고 장로(presbyter)의 왼편에 서고, 다른 봉사자는 감사의 기름을 가지고 장로의 오른편에 설 것이다. 장로는 세례받은 사람들을 한 사람씩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끊어 버릴 것을 명할 것이다: “사탄아, 나는 너와 너에 대한 모든 공경과 모든 (미신적인) 행위들을 끊어 버린다.” 각자가 끊어 버리겠다고 (대답하면), (장로는) 각자에게 “모든 (사악한) 영이 당신에게서 떠나갈지어다” 라고 말하면서 구마의 기름을 바를 것이다. 이러한 모양으로 그는 세례를 받게 될 물 옆에 서 있는 감독자나 장로에게 벗은 채로 인도된다.
[T] 봉사자는 이러한 모양으로 그와 함께 내려갈 것이다. 세례받을 사람이 물에 내려가면 세례를 베푸는 이는 그에게 안수하면서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하고 물어 볼 것이다. 세례받을 사람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즉시 [L] 그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한 번 침수시킬 것이다. 그 다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하고 물어 볼 것이다. 그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를 다시 침수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성령과 성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하고 물어 볼 것이다. 세례받는 이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세 번째로 그를 침수시킬 것이다. 그 다음 그가 (물에서) 올라오면, 장로는 성화된 그 기름을 그에게 바르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성유를 바릅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 사람씩 몸을 닦고는 옷을 입게 한 다음 성당 안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사도전승 21장, 127-133쪽.
그리고 히뽈리또는, 주교에 의해 완결되는 일련의 세례 후 예식들을 말해 주는데, 즉 ①안수 기도, ②감사 기름의 도유, ③이마 위의 (십자)표지, ④평화의 인사 등이다. 세례 후 완결하는 이 예식은 오늘날의 견진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 예식들을 마치면, 신영세자들은 신자들 공동체에 결합하며, 그들과 함께 ⑤성찬례에 참여한다.
문헌들이 충분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니체아 공의회(325년)를 앞선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 입교성사의 예식들과 관련되는 다양한 전통들을 말해 주는 다른 문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Didaché)에서 디다케 문헌에 관한 우리말 역본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 (교부문헌 총서 7권), 정 양모 神父 역주, 분도출판사 1993(이하 ‘디다케’) 참조할 것. 유일하게 세례(침수세 또는 수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례 전후의 예식이 없으며, 성찬례에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처럼, ①앞선 단식과 ②짧은 복음 설명을 함께 하고 있다. 디다케 7장(세례), 55-57쪽 참조. 토마스의 ‘시리아 행전’에는 세례 침수가 앞선 뒤 기름의 도유가 뒤따르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영의 선물(견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3세기에 다양한 세례 전통의 요구가 있었음이 분명하고, 아마도 이미 그리스도교 사상의 첫 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 감사제(Eucharistia)와 주일 집회
초세기들 가운데 성찬 거행의 발전은 3단계로 이해된다. 첫 단계는, ①예수 친히, 이미 있었던 것이지만 그분에 의해 변환된 두가지 예식, 곧 빵의 예식과 포도주 잔의 예식으로 틀이 짜인 잔치 동안 만찬을 거행하신 것을 들 수 있다. ②사도 시대에는 이 두가지 예식을 결합시키고 잔치 끝에 위치시키면서 매우 빨리 한가지 ‘성체설정의 설명’을 실천하였다. ③나중에 대단히 중요한 한가지 변화를 확인하였는데, 아마도 전례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거행의 핵심인 애찬(agape)을 방치해 버린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 변화는 거행 형식들 안에서 다양한 개편을 낳게 되었다. 예컨대, 집회의 주례자석을 제외하고 식탁들이 없어지고, ‘빵의 나눔’과 ‘주님의 만찬’ 같은 신약성서 어휘들의 사용을 그만두었으며, 이미 통합되어 있던 ‘감사의 기도’가 점차 풍성해지고, 이 전체 안에 성찬 거행(celebratio eucharistica)에 그리고 빵의 봉헌에 그 이름을 부여하기까지 한가지 예외적인 중요성이 덧붙여졌다. 사실 2세기 시작 때부터 가장 공통적인 설정은 ‘감사제’였다.
2세기 중엽 성 유스띠노는 자신의 첫 호교론(Apologia I)에서 훌륭한 가치의 한가지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호교론 65장에서 세례 뒤를 따르는 성찬 거행의 역동성을 규정하고 있고, 더 나아가 67장에서는 신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 된 ‘태양일이라고 불리는 날’의 공동체 거행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 그 텍스트를 보면: “‘태양의 날’ 라고 일컫는 날 도시와 마을에 사는 모든 이들의 한가지 모임이 거행된다. 거기서 규정된 시기에 따라 사도들의 ‘기억들’(Memoriae)이나 예언자들의 글을 읽는다. 그리고 독서 뒤편에 주례자는 몇몇 권고의 말씀을 하고 훌륭한 이 사례들을 본받도록 초대한다. 즉시 우리 모두는 일어서서 우리의 기도를 올려 드린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뒷부분에, 빵과 물 섞은 포도주를 봉헌하고, 주례자는 자신의 노력들에 따라 또한 그도 하느님께 자신의 기도와 감사 행위(actio gratiarum)를 드리고, 전 백성이 “아멘”하고 외친다. ‘감사제’(eucharistia)로 이루어진 음식들의 분배와 참석이 따르며, 봉사자(diaconus)들이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에게 가져간다. 재물을 가지고 그것(자선)을 실천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자신들이 확신하는 것(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준다. 모은 것은 주례자에게 맡겨지며, 그는 고아나 과부, 병자나 다른 동기들로 필요한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지나가는 나그네 등을 만나게 된다. 한마디로, 필요성으로 찾는 만큼의 제공하는 이가 된다. 이 모임을 우리는 태양의 날 거행한다. 왜냐하면, 이날은, 하느님이 어둠과 물질을 바꾸시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며,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Justinus, Apologia I, 67: PG 6,429-432)
성 유스띠노의 이 두가지 텍스트는 다양하고 분명한 사고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성찬거행의 자연적 구조, 곧 잔치로부터의 명백하게 분리된 결과이다. 하지만 거행(과 공동체)의 삼중적인 내적 차원의 두드러진 모습을 언급해야 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사도 2,42의 내용 요약이 분명하게 말해 준다. 곧, 사도들의 가르침, 친교, 빵나눔, 기도 등이다.
곧 ①말씀, 고유하게 불리어진 ②‘감사제’(Eucharistia), ③친교제(공동체, koinonía) 또는 필요한 형제들을 위한 염려 등이다. 그밖에는, 유스띠노에 의해 알려진 거행의 내적 구조가 실천적으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것은 쉽게 성립된다.
주일의 의미 이미 설정 2세기 중반 주일의 설정은 이미 한가지 통상적인 기초가 되었다. 주일을 부르는 이름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의미의 풍부함을 지적한다. 가장 오래된 이름은 ①‘부활하신 주님의 날’(kyriaké)이란 명명이다.(참조 : 묵시 1,10; 디다케 14,1, 93쪽. 바르나바의 서신은 Barnaba, Littera, XV,9.)
②‘여덟째 날’(dies octavus)에 대해 언급하는데, 유대-그리스도교적 배경에로 다시 들어간 표현이다. 일곱째 날(안식일) 거행하였다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특별한 거행으로서 다음날로 연기하였다. 끝으로 유스띠노는 세상 창조의 주제와 이것을 관련지어서 ③‘첫째 날’(dies primus)로 이야기한다.
3세기 전반까지 호교론자들에 있어 성찬 예식의 발전은, 세례의 경우처럼, 히뽈리또의 ‘사도전승’에 보고된다. 또한 그는 두가지 규정을 제공한다. 첫째는 주교가 하는 축성 다음에, 둘째는 세례의 거행 다음의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가치는 최초로 성찬기도의 동일한 형태를 알게 해주는 데에 있다. 이것은 매우 짧으며, 눈에 띄는 그리스도론적 특징을 띠고 있다. 내적 구성은 다음 요소들을 포함한다. 곧, 주교와 집회 회중간의 시작 대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죽음, ·부활 가운데 되살리는 직접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감사 행위, ‘거룩하시도다’(Sanctus)는 없고 감사 기도문(actio gratiarum)은 곧바로 성찬례 설정 설명을 도입하며,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억과 함께 희생제사의 ‘기념’(ànamnesis)이 따르고, 그리고 공동(communio)의 ‘성령청원’(epiclesis)과 삼위일체적 대영광송(doxologia)과 백성의 ‘아멘’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히뽈리또의 텍스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고정되고 의무화된 양식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라 지침적이었다. 아직 성찬 기도문이 고정된 ‘양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지 ‘지침적’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의 1장 3의 4) 기도 부분을 참조할 것.
이미 유스티노는, 주례자가 ‘자신의 고유한 능력에 따라’ 하느님께 기도와 감사 행위를 드린다고 지적하였으며, 이것은 아마도 성찬 기도의 (내적 구조에 관한) 자유로운 ‘즉흥’ 기도드림의 특징을 말해 줄 의도였던 것이다. 히뽈리또는 대단히 명백하게 이점을 알려 주고 있다: “감독자(episcopus)는, 앞에서 규정한 바대로,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gratias agere)이다. 앞에서 규정한 기도와 똑같은 기도를 바칠 필요는 없으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암기하여 바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각자는 ‘자기 능력에 따라’ 기도할 것이다.” 사도전승 9장, 105쪽.
하지만, 히뽈리또 신학의 몇몇 고유한 표현들이 부분적으로는 성찬 전례의 하나의 근본적인 구조틀(schema)로서, 당대 공동체의 거행 안에 사용에 있어 이 텍스트가 곧바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154년 경 스미르나(Smirna)의 뽈리까르뽀(Polycarpus)는 로마 방문 중에 로마 공동체 안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도록 교황 아니체또(Anicetus, 154/155-166?)에 의해 초대되었다. 100년이 지난 뒤, 시리아본 ‘사도 교훈’(Didascalia apostolorum)은, 손님 주교에게 공동체의 말씀을 지도하고 감사기도를 드리는데 존경을 표하라고 명하고 있다.(참조 : 사도교훈(Didascalia II), 58,3: F.X. Funk, Paderbornae 1905, 168-169 참조.) 이것은, 지역적인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 최소한 그들의 기초되는 관점이나 더욱 중요한 관점들 안에서 성찬 전례의 ‘공통적인 순서’(질서)가 존재했음이 추정된다.
3) 부활과 부활 논쟁
주일은, 한 주간에 있어, 파스카가 한해 과정 중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장 오래된 연중 축제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다. 두가지 요인이 그리스도교 사고 에 있어 이 축제의 중요성에 유입되어 있다. 즉, 한편으로 앞선 날들의 증가로, ①특히 50일간의 ‘가장 기쁜 시기’(laetissimum spatium)로 축제 연장에 의한 시간으로의 확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②‘세례로 더욱 장엄한 날’(dies baptismo sollemnior)인 파스카 전례에 세례의 편입을 들 수 있다. 이점에 관한 다음 증언을 참조할 것. Tertullianus, De Baptismo 19: CSEL 20,217.
부활의 전례 거행에서만큼, 그 구조는, 3세기의 가장 중요한 증언들에 따르면, 동서방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동질성의 것으로 나타난다. 엄격하고 의무적인 단식이 축제 시작 때에 주어진다. 거행의 중심은 밤중 철야(vigilia nocturna)이며, 이것은 전 공동체를 일치시키고 독서·노래·기도 등을 통해서 발전되며, 성찬례의 거행 가운데 절정과 끝맺음에 도달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파스카 축제 거행의 날짜에 의해 생겨난다. 2세기에 소아시아의 공동체들은 이 공동체들은 사도 요한과 필립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가지 전통에 따른 교회들을 가르킨다. 히브리인의 축제와 같은 니산(Nisan)달 14일에 부활을 거행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 ‘14일파’(quartodecimani)의 파스카가 초기 공동체에서 거행의 본래의 형태였고 아시아 지방의 제한된 이탈이 아니었다는 것은 매우 개연적이다.
하지만 같은 2세기에 로마나 팔레스타인, 이집트, 그리스 같은 다른 공동체들은 니산달 14일의 유대인의 날짜가 아니라 이어지는 주일날에 그리스도교의 연중 파스카를 거행하였다. 이 실천에 기초를 놓기 위해 또한 이 공동체들은, 로마 주교들의 계승을 통한, 곧 베드로와 바울로에게로까지 연결되는 사도적 전통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두가지 경향 사이 차이점은 축제의 대상에 관심 기울이지는 않는다. 거행에 대한 부활 날짜의 차이점은 오도 카젤(Odo Casel)이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동방 소아시아의 공동체들은 주의 수난을 강조한 나머지 주일과 관계없이 ‘니산달 14일’에 부활 축제를 거행했던 것이며, 반면에 다른 공동체들은 주의 부활을 강조하여 ‘부활하신 주일(主日)’에 부활 축제를 거행해야 한다는 의견의 차이점이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아시아의 공동체들은 전적으로 부활을 제외한 것은 아니다. 같은 모양으로 주일날에 파스카(부활축제)를 거행하는 이들은, 그분의 수난과 죽으심을 당연히 잊지 않고 주님 부활의 주제를 강조한다. 이것은 강조의 차이점이었으며, 2세기 공동체들 간에 매우 활발한 논쟁, 곧 그 유명한 ‘부활 논쟁’을 일으키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154년에 로마에 머무는 동안 스미르나의 뽈리까르뽀 주교는, 일치에 도달하지 않고 교황 아니체또와의 화젯거리를 취급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 170년 경 사르디(Sardi)의 멜리톤(Meliton)과 제라폴리스(Gerapolis)의 주교 끌라우디오 아뽈리나르(Claudius Apollinar)와 부분 논쟁을 가졌는데, 여기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끌레멘스(Clemens)가 가세하였다. 하지만 토론의 최고 절정은, 2세기말 바로 전에 교황 빅토리오 1세(Victorius, 189-198/199?)와 가졌던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부활 논쟁은 교회 내 분열을 일으키는 모험을 하게 된다. 상반되는 실천의 지지자들과 함께 성 이레네오(Ireneus)의 가장 타협적인 태도가 형성되며, 교회의 일치를 구하게 된다. 결국 어디서든지 로마의 해결책이 받아들여졌으며, 그 이래로 부활 축제는 그리스도교 교회 전체에서 히브리 니산달 14일 다음 주일에 거행하게 된 것이다. 부활 축제의 결정은 니체아 공의회(325년)를 참조할 것.
4) 전례와 영지주의와의 투쟁
영지주의의 현상은, 특별히 2-3세기에 생성되었는데, 전례적 영역보다는 신학적 범주에서 깊은 반향을 가져 왔다. 단지 영지주의와의 분쟁에 비추어서 이 시대에 완성된 몇가지 전례적 발전이 설명될 수 있다.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5, 182-184 ‘그노시스’ 항목을 참조할 것.
영지적 운동의 근본적 특성들 중의 한가지는, 의심없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대한 멸시를 적용하는 이원론(dualismus)이다. 이방과 유대 환경의 거칠고 물질주의적인 개념들에, 교회는 처음에 저항하였고 ‘영적 예배’(cultus spiritalis)를 강조하였다. 영적 예배는, 거룩한 장소나 성전도 현란한 외적인 나타냄도 필요하지 않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감사제’(입술의 희생제사, Eucharistia)와 믿는 이의 삶 가운데 꽃피우는 공경으로 완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종교와 그리스도교 예배의 외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도 방어하는 것에 의무가 부여된 것을 느꼈다.
이러한 변화는 2세기 말경 리옹(Lyon)의 이레네오(Ireneus)의 저술에서 발견된다. 호교론자들과 같은 노선에서 이레네오는 마음의 내적 봉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의 영험주의(spiritualismus) 앞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물질적 요소들을 강조하고 수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단을 거슬러 반박하는 몇 가지 수단들 가운데, 이레네오의 저술에 참으로 적합한 것으로, 그는, 성찬례가 물질적 창조 가운데, 곧 실재상의 빵과 포도주 가운데 자신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창조의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서술에 이르기까지 의미상의 지속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에 의하면, 성찬례(감사제)는 하느님의 축원인 한가지 천상적 요소에 의해, 그리고 같은 하느님의 업적에 물질적 창조의 역할인 한가지 지상적 요소에 의해 내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Ireneus, Adversus haereses, 4, 18,5와 5, 2,3 참조.
먼저 빵과 포도주의 물질적 선물에 대해 언급하고, 곧바로 그것들에 대한 감사 행위가 선포된 것을 강조한다면, 이제 그리스도교 거행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 관심이 분명히 기울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의 변화가 우연은 아니다. 먼저 ‘성찬례’(Eucharistia)라는 어휘를 선호했다면, 지금은 ‘희생제사’(sacrificium)와 ‘제헌’(oblatio)의 사용이 더욱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 2세기말까지 제대에 봉헌물을 가져오는 실천을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서방뿐 아니라 동방에서도 다음 세기에 발전하였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 가운데 이 변화는 거행 장소의 성질 가운데 일련의 개편들을 적용하게 된다. 먼저 주교 또는 주례자 주위에 모인 공동체에 강조점을 두고, ‘주교좌’(cathedra)가 공동체 관심의 중심에 위치했었다면, 이제부터 제대가, 희생제사의 장소인 만큼 무엇보다 먼저 주된 중요성을 항상 획득하게 된다. 일찍이 더 이상 간단한 나무 식탁이 아니라 돌로 된 것이며, 이것은 확장되는 의미와 발전의 성장하는 단계에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변천을 겪게 된다. 융만(J.A. Jungmann)은, “그리스도교 제대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5) 그리스도교 예술의 시작
3세기, 곧 평화의 긴 시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적이고 외적인 발전이 성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예술 표현의 분야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간여할 줄 아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영역에서, 출애굽기 20,4의 (우상)금지를 기초로 하여, 예술의 형상적 현실화를 거부하는 강한 흐름이 주목된다. 그러나 한 때 호의적인 흐름이 같은 3세기에 이미 형상화하는 반대 경향을 성취하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누군가에 의해(또는 부부에 의해) 자유롭게 배치된 한 방에 모이곤 하였다. 3세기초에 하나의 중요한 변천을 보여준다. 즉 예배의 장소로 개인 집들을 변형시킨 것이다. 공동체의 수적 증가는 항상 개인 집에서의 그리스도교 거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세기 초기에는 예배를 위해 전적으로 설치된 건축물들이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두라-에우로포스(Dura-Europos)라는 이 유명한 건축물은, 232년 경의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인 보통의 집이며, 주위의 다른 집들과 구조상 다르지 않다. 이 집의 고고학적 발굴은, ‘가족 교회’(ecclesia domestica)로 바꾼 하나의 일반적인 집이 세례의 프레스코(fresco) 벽화로 장식된 것을 보여 준다.
3세기 중반에 상황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거주하는 집과는 달리 특수하게 둘러싸인 설치가 시작된다. 그리스도교 건축의 탄생인 것이다. 계속 이 세기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처럼 그리스도교 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개방하면서 묘지(catacumbae)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묘지 방의 벽과 천장은 이제 그림의 다양한 채색으로 장식되었으며, 형태에 있어서 명백하게 당대의 세속적 예술 규범을 따르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 원천들, 특별히 성서의 것에 영감을 받았다.
가장 오래된 현존들 가운데 요나, 방주의 노아, 사자들 사이의 다니엘, 부활한 나자로 등의 모습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모든 형상들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 한 인간이 자유를 얻게 되는 성서적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적 해석으로 읽게 되면 이 성서적 설명은, 믿는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위대한 희망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빈번하게 착한 목자와 스승 예수의 형상이 반복된다. 성서나 복음서에서 취한 장면의 표현에서도 그리스도교 예술가들은 당대 문화의 가족적 모습에 영감받은 것이 지속되며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재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것으로 예를 들면, 착한 목자는 오르페우스(Orfeus, 하프 연주의 명수)의 그리스적 주제에 영감을 받았고, 요나의 성서상의 모습은 잠자는 엔디미온(Endimion)에서, ‘그리스도-태양’의 모자이크는 그리스도 헬리우스(Christus Helios)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마지막 것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전의 유적 발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속의 문화와의 동일한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대에 주제 체계를 선포하고 그리고 이어지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상황(313년 이후)에서 그리스도교 예술에 의해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순교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표현하는데 성취했던 것은 그들의 문화에서 가족적인 예술적 형상이나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의미에서 당대의 문학적 문헌들과 현존하는 기념물들의 주제들을 대조하는 것은 흥미있고 의미있는 일이다. 예컨대, 떼르뚤리아노의 ‘세례에 관하여’(De baptismo)와 사르디의 멜리톤의 ‘부활 강론’(Homilia pascalis)을 지하묘지(Catacumbae)나 두라-에오로포스의 가족 교회의 벽화들과 비교하는 것 등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수평적 이해에서 우리는 교리와 그리스도교 전례의 큰 주제들을 발견한다. 근래에 발견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 와야 했듯이, 성찬례와 그리스도교 입교에 관한 설명들이 대부분이다.
3. 첫 3세기 동안의 성사 신학
신약성서의 기록들에서 교회 7성사의 공통적이고 고유한 개념을 뽑아 낼 수는 없다. 유추해서, 그리고 다른 종교들의 예식과의 불연속성으로 처음부터 교회 안에 세례와 성찬례 같은 생활하는 행위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성사’(sacramentum)라고 불리게 되며, 동일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교회 규범에 포함되는 성서의 책들에서처럼 결정적인 확증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사건’이 그리스도론의 연구 작업을 앞서 있듯이, 교회의 삶과 공동체 안의 성사들의 구체적인 거행이 성사적 형식들을 앞서 있는 것이다. 관련되는 신학적 숙고에 앞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공동체적 ‘실천’(praxis)으로 1 고린 11,23이하 참조.
무엇보다 성찬례의 생생한 실현이 전해진다. 하지만 신약성서 안에서 이미 밀접하게 결합한 두가지 관점을 되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 신학’(theologia narrativa)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세자 요한의 활동에서 예수 세례에 관한 공관 복음의 묘사에서, 성찬례 설정의 성서 귀절들에서 또는 사도행전 저자의 다양한 세례의 설명에서 신학과 성사적 구성이 함께 등장한다. 더 나아가 같은 설명들이, 기원의 설명을 가졌던 구체적인 공동체에 의해 살았던 가치와 전망의 부차의 것에 신학적으로 재구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서 안에서 성사들의 일반적인 이론을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처음의 흔적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로는, 구원을 작용하는 행위들인 한에 공통의 관점에서 세례와 성찬례를 결합시킨다.(1 고린 10,1-4 참조) 또한 에페소서에서 어떤 모양으로 혼인과 세례를 배치시킨다. 에페 5,21-33 참조. 요한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똑같은 십자가 안에서 성찬례와 세례의 기원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한 19,34 참조.
1) 초세기의 ‘신비’(Mysterion)와 ‘성사’(Sacramentum)
주제에 관한 재발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성사(sacramentum)에 희랍어 단어 mysterion의 적용 과정과, 계속해서 라틴어 sacramentum으로 희랍어를 번역한 그 과정을 재설정한다는 것은 어렵다. 다른 한편 초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성사적 사고들의 발전과 어휘에 대한 이방적 신비들의 가능한 영향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mysterion은 신약성서에서 약간 빈번한 개념이며, 그 개념은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다. mysterion은,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안에서 준비된 역사이며, 처음에는 비밀이었다가 ‘충만한 때에’(때가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 mysterion의 본질적인 부분은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구원경륜(oikonomia)이며, 여기에서 mysterion은 이미 계시되고 실현된 것으로 그러나 당신의 결정적인 완성의 기다림 가운데 아직 있는 것이다. 이런 모양으로 현행의 역사 안에 육화하신 하느님 신비에 관한 것처럼 교회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사 범주의 이어지는 신학적 근본을 위한 출발점과 정당한 기초를 찾아본다.
mysterion이란 말은 초기 교부들의 것에서 신약성서의 것과 비슷한 윤곽을 보여 준다. 복수로 사용하면, 기술적인 용어로서 거의 항상 이방의 비의적(秘義的) 예배를 설명한다. 고유하게 그리스도교적인 사용에서는 mysterion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실현된 하느님의 유일한 신비이며, 이어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인 한에서 예수 역사의 개별적인 사건들도 가리킨다. 2세기 동안 예컨대 유스띠노에게 있어 세례와 성찬례와 관련해서 mysterion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수용하는 하나의 다른 단계의 폭, 곧 구약의 전형적인 모습과 형태를 묘사하기 위해 소개된다. 오리게네스에 있어 mysterion의 개념은 말씀(Logos)에 대한 삼중적인 적용 또는 표시를 보여 주는데, 곧 육화를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성서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sacramentum은, ‘무엇에게 종교적 보증을 빌려주다’는 의미로 서약의 경우, 깃발에 하는 군대 선서의 경우, 거룩함에 하는 축성의 경우처럼, 공통적이고 일반적으로 함축적인(참조 : 함축적인 의미로는 sar, sacer, sancire에 그 뿌리를 두고 연결되어 있다.) 용어의 라틴말이다. 재판에서 패할 경우 거룩함에의 봉헌물처럼 남아 있어야 할 신성한 자리에 재판 전에 위탁하는 돈의 총체를 또한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떼르뚤리아노가 창작한 말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 군사의 선서’(sacramentum militiae Christi)처럼 그리스도교 세례에 이 sacramentum을 적용했고, 구원을 보여주고 거기에 참여케 하는 예배 사건으로 성찬례에 처음으로 적용하였다.
하지만 그는 sacramentum의 범주에 비추어서 이 행위들을 결코 추리하지 않았다. 아직 없었던 하나의 신학이었다. 더 나아가 다른 저술가들처럼 떼르뚤리아노 자신은, 희랍어 mysterion으로부터 전수받은 의미의 단계에 머물렀으며, 여기에 따라 sacramentum은 감추어진 한가지 실재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거룩한 표지들에 적용하였다. sacramentum에 대한 의미들의 다양한 유효성은 후세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 용어는 세례와 성찬례를, 또한 다른 실재들을, 성서처럼 예비자 기간, 성수(축복된 물), 세족(례), 사도신경, 주의 기도, 단식, 부활 축제 등등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라틴어 용법에서도, mysterion에서 mysterium의 선택보다 sacramentum이라는 단어 선택의 이유에 대해 여기 질문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먼저 라틴어 sacramentum은, 희랍어 mysterion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가운데 받았던 성사적 의미를 표현하는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단어 mysterion의 단순한 번역어 mysterium은 라틴계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이방 예배를 설명하는 말로 사용하는 고집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희랍어 mysterion과 라틴어 sacra, arcana, initia와 연결된다. 두 번째 단계로 그리스도교 사상의 강화와 이방 사상 세력의 퇴화와 함께 두려움없이 이방 신비의 유추에로 흐르게 된다.
2) 3세기의 세례 논쟁
교회 안팎으로 논쟁은 역사를 지나면서 전례적-성사적 발전의 중요한 한가지 요인을 설정하였다. 3세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단 중에 누군가 가톨릭 교회로 회두하기를 갈망할 때 그들의 세례 문제를 직면해야 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는 단순한 화해에 만족하였으나, 아프리카(떼르뚤리아노의 족적 위에)와 매우 일찍 소아시아의 대부분은 새로운 세례를 부과하였다.
이 두가지 가치 체제는, 관련있는 위치의 강경한 두 방어자들이 표면적으로 나타날 때까지 한 십년 동안 심각한 논쟁에로 넘어가지 않고 병존할 수 있었다. 두 변호자들은 카르타고(Cartago)의 치프리아노(Cyprianus)와 로마의 스테파노였다. 강렬한 대립은, 성사 신학 안에 해명의 자리를 점차적으로 만들어 주면서 각자의 상대에게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도록 강요했던 것이 유용한 결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떼르뚤리아노의 생각에 따르면, 세례는 교회의 예외적인 고유한 것이며, 그것 밖에서는 하느님에게도 그리스도에게도 도달할 수 없으며, 그래서 교회 밖에는 참된 세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은 규범 안에만 있다(fides in regula cogita est).”라고 말한다. 이는 곧 ‘정해진 것만 믿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치프리아노의 추론은, 떼르뚤리아노로부터 개방된 노선에서 정확하게 대치하고 있다. “어머니 교회를 갖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참조 : Cyprianus, Epistula 74,7: CSEL 3,804; De catholicae ecclesiae unitate 6: CSEL 3,214) 라고 묻는다. 치프리아노의 과민반응은, 특히 로마의 주교가 “전승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교회의 것으로) 개선되지 않는다(Nihil innovetur, nisi quod traditum est)”라고 한 자신의 태도가 올바르다고 한 원칙에 반응한 것이다. 치프리아노는, 전통에 호소해야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숙고와 추론도 말하도록 역시 내버려둬야 할 것도 역시 있음을 다른 이야기 중에 주장하면서, 로마의 이론을 공격하였다.(Cyprianus, Epistula 71,3: CSEL 3,773)
두 명의 이 주된 주인공들의 동시대 순교는 ‘아프리카 분파’의 가능성을 피하게 하였다. 이 세례 논쟁은 약간 예기치 않은 결론을 남겨 두었다. 치프리아노의 위계에 따른 아프리카의 주교들이 이단들에 의해 부여된 세례를 무효 확인했을 때, ‘분파적’이었던 만큼 그 안에 ‘이단적’인 특성이 있음을 강조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세례를 무효화한 근본적인 이유는, 성사의 토대인 교회가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신학적 작업, 특히 성 아오스딩(S. Augustinus)의 것은 로마 실천의 의미에서 이것을 논의해야 할 점으로 분명하게 만들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