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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역사-03] : 로마 제국시대 교회의 예배(313-590)
1. 일반적인 배경
신앙의 자유, 제국 종교로 발전함
여기서 연구하고자 하는 시기의 단계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 이후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 때(590-604)까지이다. 4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법적 처지에 있어 총체적인 변화가 확인된다. 이 새로운 신앙은 조금씩 지도 계층을 포함해서 로마 사회의 여러 계층을 얻는데 성공한다.
교회는 박해를 받는 대신, 이제 제국의 공적 종교가 된다. 외적 모습(외형)으로 고려되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교 제국을 움직이는 지도적 원리로 위치하게 된다. 교회는 자기 자신 앞에서, 흠뻑 젖어 있는 이방 문화를 유사하게 함으로써 이방 세상을 그리스도교 세계로 변화시킬 무한한 임무를 가지게 된다. 새로운 상황은 유익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도 일으킨다. 만족스러운 자유와 안정은 이제 그들 수많은 구성원들의 특질(qualitas)로 도입된다. 바탕에 있어 이방 사상을 철저한 걸러 내는 일을 소홀히 하였고 교회의 책무에 있어 정치적 중재를 방치하게 된다.
신학 논쟁의 시작
다른 한편, 이 때는 ‘신학적 논쟁들’(controversiae theologicae)이 파급된 시대이며, 이것은 종교적 교리의 내용을 넘어서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질서의 다른 요소들도 적용된다. 이처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ago)의 도나투스파(Donatismus)의 경우는(참조 : 도나투스(Donatus, 313-347)에 의해 시작된 북아프리카의 이단 사상으로, 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배교한 주교에 대한 처리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로마 교회에서는, 배교했던 펠릭스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은 체칠리아노(Caecilianus)주교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나, 북아프리카 지역교회에서 70명의 주교들이 도나투스의 영향을 받아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주교 마요리노(Majorinus)를 내세웠다. 도나투스는 일종의 엄격주의자, 완벽주의자로 신앙에 대한 열성을 높이 평가할 만하나 그 견해는 성사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즉 성사는 사효성(ex opera operato)이 아니라, 인효성(ex opera operantis)에 따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단자나 배교자가 베푼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한다(이단자 세례논쟁 참조). 그의 주장은 아오스딩을 비롯한 후대 교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도나투스는 5세기부터 영향력을 잃었으며, 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성사 신학의 투쟁일 뿐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는 로마의 식민주의를 반대하는 국수적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4-5세기는 아리우스(Arius)와(참조 : 아리안파(Arianismus)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250?-336)에서 시작하였는데, 삼위가 모든 면에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고,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창조된 것으로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는 것이다. 또한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단죄된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분명히 하였다. 다시 고개를 든 아리안 이단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또 다시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안 사상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통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참조 : 네스토리안파(Nestorianismus)는 강생한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가지 분리된 위격과 인격이 존재한다는 교리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위격으로 동시에 신이자 동시에 인간이라는 정통교리와 대치된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도 반대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계속 주장하지만, 인간 그리스도 안에는 두개의 다른 본성과 위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본질적 일치’라는 말 대신에 ‘의지의 일치’라는 그리스도 양자설의 용어를 사용한 점에서 특히 교회의 공격을 받았다. 에페소 공의회(431)에서 단죄받았다.)의해 생겨난 커다란 교리 논쟁이, 황제의 적극적인 참여로 니체아(Nicea, 325)와 에페소(Ephesus, 431), 칼체돈 공의회(Calcedon, 451)와 함께 잘 알려져 있다. 그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도나투스파가 진화되고, 펠라지우스파(Pelagianismus)의(참조 : 펠라지우스파는 펠라지우스(?-418)가 주장한 이단설로,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정한다. 그는,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력으로 실행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원도 신앙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그것을 쉽게 하는데 은총이 필요할 따름이며, 은총은 규약의 율법이나 복음서, 예수의 본보기처럼 외적인 것에서 그치고, 인간의 영혼을 비춰주고 개조하여 강화시키는 것은 ‘내적인 은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단설은 고대 윤리학의 정신을 받아들인 것으로 아오스딩이나 후대의 학자들보다 ‘인간의 선성’에 대한 자연적 능력을 높이 생각한 그리스(희랍)의 교회 저술가 끌레멘스의 저서 등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 있는 사고 방식이다.) 새로운 이단이 출현하는데, 이로 인해 여러번의 아프리카 공의회가 소집되며, 생애 마지막의 성 아오스딩의 활력을 소진시켜 버렸다. 아오스딩의 죽음(430)은 아랍 반달족에 의해서, 로마가 아프리카를 지배히던 것이 몰락하는 것과 일치한다.
민족 대이동과 교회의 위치
이 신학적 논쟁의 과정 중에 커다란 역사적 변화를 생겨나게 하였는데, 여기서부터 중세와 근대 서양이 생겨난다. 서구에서 로마 제국은 결국 야만족들의 침략으로 굴복하고 만다. 이 ‘민족의 대이동’은, 그들의 문화적·정치적·사회적 적응과 함께, 교회 생활에 있어서 분명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야만족들의 지배에 기초한 왕국들은 로마 제국의 모든 제도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세속적인 제도의 부족함 가운데, 교회는 사회의 형태와 활동으로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정치적-종교적인 ‘그리스도교 특성’(christianitas)이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수 십 세기 동안 서구 유럽의 문명을 특징짓게 될 것이다.
동방교회의 차별화
‘로마 세상’(orbis romanus)의 다른 절반, 곧 동로마 제국은 야만족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1453년까지 생존하게 된다. 동방교회의 ‘비잔틴 그리스도교 사상’(christianismus byzantinus)은 전례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종교적 분파들 가운데 자신의 기원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항상 서방 교회로부터 차별화시키려 노력하였다. ①부제의 주목할 역할과 함께 교계주의(hieratismus)적 경향, ②궁중의 암시적 의미와 함께 거행의 드라마틱한 느낌, ③예절 안에서 호사함과 화려함으로 이루어진 분위기 등은 이러한 동방 전례의 세 가지 특성을 구성한다.
수도제도의 탄생과 발전
이 시대에 교회 생명력이 잘 드러난 것으로 ‘수도 제도’(monachismus)가 탄생하고 빠른 확장이 이루어졌음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제도가 앞선 시대의 순교를 대신하는 것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 제국의 특권으로 호의를 입은 교회에서, 주님 때문에 박해받던 시대의 투쟁과 영웅적인 탄성의 그리움이 있었다.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는, 포기와 고행으로 순교의 증여(드림)를 보충하기를 찾는다. 이어지는 곳에서 아일랜드 수도자들이 설명하듯이, 하얀 순교(수도생활) 또는 푸른 순교(선교생활)가 붉은 순교를 대신하게 된다.
공적 선교의 시작
이 시대에 교회는 자신의 보편적 소명(부르심)과 선교 임무를 잊지 않았다. 4세기의 것이 아닌 것은, 자발적인 운동이 아니라면, 깊이 있는 것이라도 그레고리오 대교황으로 인해, 최고의 권위에 의해 조직된 공적 선교가 될 것이다. 596년에 교황은 앵글로색슨 민족(영국)을 복음화하도록 수도자 아오스딩을 보낸다.(참조 : 6-7세기에 그들은 전례에서 라틴어를 사용했던 증거자료들을 볼 때, 이미 라틴어를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영어 형성에 라틴어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성지순례의 시작
이 시대의 이 간단한 묘사를 맺기 위해, 4세기부터 점차 커져 가고 발전한 ‘순례’(peregrinatio)의 현상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먼 나라들로부터 빈번하게, 예루살렘의 거룩한 장소들 때문에 전적으로 특별한 한가지 신심과 함께, 가장 대중적인 순교자들의 성지(sanctuarium)를 향해 행렬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다양한 성질의 구성 내용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적 뿌리를 향한 가장 성실한 신심에서부터 사회학적 불안정과 ‘여행하려는 근본욕구’(libido itinerandi)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복합적인 현상인 것이다. 의심없이 이 시대에 전례의 발전적인 요인들 중 한가지가 설정된다. 곧, 에제리아(Egeria 또는 에테리아 Eteria)의 유명한 ‘순례 여행기’(itinerarium Egeriae)는 이 세기의 전례적 재발견을 이룬 찬란한 증거이다.
2. 전례 발전의 노선들
4세기 중반에서 7세기말까지의 기간은 전례 텍스트에 있어 커다란 창조성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예배를 위해 ‘기록된 편집’(Textus)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갔다. 전례 기도를 기록함으로써 고정시키려는 경향은 여러 가지 동기들에 기인한다. 첫째로는, 공동체의 성장으로서 대부분의 조직화가 요구되고 양식에의 집중화를 가져왔으며 아울러 점차로 앞선 세기의 ‘전례적 즉흥’ (참조 : ‘전례적 즉흥’(전례적 열린 기도, improvvisazione liturgica)이란 주어진 양식없이, 전례 거행 중 주례자를 비롯하여 예절의 역할 담당자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그날의 전례 주제에 맞게 ‘즉흥적으로’ 기도문을 읊고 노래하던 방식을 말한다. 이 시대에 기록된 양식들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전례가 즉석에서 이루어졌음으로 공동체 내의 현재하는 신앙을 강하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전까지 ‘지침적’이었던 기도형태가 ‘양식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의 현상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무능한 저술가들 기도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이미 성 아오스딩이 탄식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단의 저술가들에 의해 형성되는 기도들이 생김에 따라 ‘공공의 기도’(oratio publica)에서 어떤 통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실상 새로운 아리안 이단과 영지주의 혼합파 서로가 기도의 고유한 양식과 고유한 노래를 달리 보여주며, 동일한 전례 집회에 쉽게 도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지침적인 규범과 함께 지역 공의회로 대처하였다. 다른 관점에서는 기록된 텍스트로 고정시킨 것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에로 전례적 상호 통교를 번성시켰다. 더 좋은 텍스트와 잘 알려진 저술가의 텍스트들은 다른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이처럼 교세가 뻗힌 한 지방의 내부에 통일된 전례 양식들을 창조하게 된다.
1) 전례들의 다양화
4세기 동안 커져 가는 다양화(차별화)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개별 교회(ecclesia particularis)의 전례들은 한가지 고유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이 과정에 기여하게 된다. 곧 지리적 교회 조직들의 발전은 전례의 다양화를 용이하게 만든 것이다. 영향권과 관련되는 지역들에 가장 중요한 도시의 전례가 확장되며, 곧 법이 된다. 더 나아가 문화적 고유한 정체성의 감각(느낌)과 함께 언어적 다양성은 차별화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는데, 전례 분야에서 당연한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교리 형태의 차이점들과 관련되는 전례의 자치적인 발전에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곧, 에페소와 칼체돈 공의회의 결과로 인한 네스토리안파와 단성론자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이후에도 독특한 별도의 전례로 발전하게 된다.
5세기에는 동방 교회에 교회 생활의 활동이 강한 중심이 세 곳이 있었는데, 전례 분야에 있어 열성적인 하나의 창조적 활력을 발전시켰다. 즉 안티오키아(Antiochia),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이다. 세 군데의 총대주교 관할 구역에서부터, 하나의 공통적 전통의 바탕 위에,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전례 질서가 발전한다. 곧, 동방 시리아 전례, 이집트 전례, 비잔틴 전례인데, 많은 분화(가지 뻗음)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서방 교회에서는 차별화의 근본적인 요인이 부족하다. 곧 언어이다. 라틴어는 사실 서방의 문화적, 예배적 전 세계에서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 로마와 겨룰 수 있을 만한 (동방의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처럼) 교회적 총대주교나 대주교좌가 없었다. 하지만, 서방에서도 개별 교회의 예식들이 태어나고 발전하였다. 갈리아 ‘갈리아’는 오늘날의 불란서 지역을 일컫는데, 당대에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스페인과 포루투칼, 서부 독일 일부를 포함한다.
형태의 다소간 공통적인 바탕을 두고, 스페인 전례(liturgia ispanica), ‘스페인 전례’는 갈리아 전례 형태에 비슷한 근원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자신들의 고유한 형태를 갖고 ‘모자라빅 전례’(liturgia mozarabica)라 불린다. 이후 이슬람의 침략을 받아 그들 문화의 일부를 수용하여 ‘비시고틱 전례’(liturgia visigotica)로 변화된다.
협의의 의미에서 갈리아 전례(liturgia gallicana), 켈트 전례(liturgia celtica), 밀라노 전례(liturgia milanensis) 등을 들 수 있다. 갈리아 형태의 전례적 노선은, 주목할 동방의 영향을 받았는데, 북아프리카와 로마의 전례를 하나로 묶는 로마-아프리카 형태의 전례와 대조된다.
3세기 이상 동안 로마의 전례는 희랍어로 거행되었다. 로마 교회의 라틴화는, 두개 언어사용의 면모를 필연적으로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현실화된다. 희랍어에서 라틴어로의 구체적인 전환은, 성찬례 감사기도문(anaphora eucharistica)과 비교해 볼 때, 다마소 교황(366-384)의 재임기간 동안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언어의 이 호환이 늦어짐은, 이미 3세기 중반 이후에 라틴어가 로마 교회의 공적 언어로 사용됨으로 인한 관성의 어떤 반사작용(반대급부)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례 라틴어는, 라틴 문학 언어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모형된 고유한 본래의 다양성이다. 그리스도교 계시에 비추어 이해하고 있는 실재를 번역하고 표현하기를 찾기 위해 언어를 창조적으로 끼워 맞춤으로써, 이 라틴 문학에 대하여 고유한 성질(각인)의 신논리와 방법(모양)을 만든 것이다. 로마가 아닌 아프리카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한 첫째 교회였으며, 근본적으로 서방 교회의 신학적, 전례적 어휘들의 대장장이였었다. 라틴어를 처음 사용한 아프리카 교회의 다른 이들은 떼르뚤리아노, 치프리아노, 라탄찌오(Lattanzius)와 아오스딩 등이다.
로마 전례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전례적 행위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고’(per Christum ad Patrem)에 관한 부동의 고집이 눈길을 끈다. 다른 한편 로마식 표현의 간소함과 엄격한 위엄은 가장 詩적이고 감동적인 취향과, 더욱이 일반적으로 동방 전례의, 그리고 갈리아 스타일의 서방 전례의 장황함과 대조된다.
2) 예비자 기간의 발전
4세기 교회의 새로운 상황은 그리스도교 입교의 분야에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반향을 갖게 된다. 교리 교육은 부족한 예비자 기간에 굴복하고, 명백한 위기를 겪게 된다. 사실 교회에 대한 공공의 인지와 함께 많은 수의 사람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결정하는 동기들은 종종 이해관계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개하는 염원과는 멀었다. 상황의 분명치 않은 태도를 알아듣는 데 있어, 공동의 임무에 호흡할 수 있도록 최소한 예비자로 있음의 필요성을 명심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더욱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임 또는 비그리스도인임은 사회에서 개인의 안정성과 좋은 유명세로 조건 지워졌다.
그러나 세례를 뒤늦게 받는 것은 자신에게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모양으로 예비자들은, 전에 세례받았던 이들에게 부과하였던 의무들이 부과되지 않았다. 교회의 참회와 자신의 엄청나고 중대한 과정을 거칠 의무없이 죄의 용서를 획득할 수 있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성사가 항상 집행되었다. 예비자의 이러한 무형질의 대중은 예비자 양성의 기간을 감축하는 것을 전적으로 보증하지 않음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게다가 중병의 순간에까지 또는 죽음과 같은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례받기를 명하였다. 이 실천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의심없이 콘스탄티노 황제 자신의 것이다.(참조 : 그는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임종을 맞이할 때에 세례를 받았다. 다음에 나열한 세례에 관한 권고는, 이러한 이상한 사목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들이다: “오늘 세례를 주도록 합시다... 죄지었던 것을 더 이상 기다리지 맙시다. 그 이상으로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옳지 않게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것이다.”(Gregorius Nazianzenus, Oratio 40 in S. Baptisma, 11: PG 36,371-372); “세례를 위해서, 어느 때가 파스카를 위해 더 좋은 시간인가?... 하지만 너가 늦다면 너는 의심스러우며 시간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아이 때부터 예비자 기간에 있고 진리를 위해 아직 너는 결정되지 않았다... 너의 전 생활을 시험 중에 지내며, 이것을 늙은이가 될 때까지 내버려둔다... 가자! 너의 이름을 주라. 교회에 너를 등록하라.”(Basilius, Homilia 13 in S. Baptisma, 1,5: PG 31,424-436).
새로운 사목적 상황 앞에 교회는, 참된 희망자들에서 그리스도교 회개의 성사에까지 순전히 이름뿐인 많은 수의 예비자들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예비자 기간을 서로 다르게 재구축하게 된다. 그 이후 오히려 사목자들의 관심과 염려는, 파스카 준비의 40일 기간 동안 이 마지막 예비자들의 윤리적, 교의적, 예식적 준비에 마음을 쏟게 된다. 4세기부터 출발해서 사순시기의 설정은 두드러지게 세례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예비자 기간의 범위에서(이 때에는 후보기(electi), 수련기(competentes), 조명기(illuminando)라 부른다.) 이 새로운 범주에로 넘어감의 본질적인 예식은, 사순시기 시작 때와의 일치를 확장하는 ‘이름의 등록’(inscriptio nominis)이다.(참조 : S. Augustinus, Sermo 132, 1(PL 38,735): “이제, 파스카이다. 세례를 위해 당신의 이름을 등록하시오(Ecce Pasca est, da nomen ad Baptismum).” )
후보자(electi)들 그룹에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의 특별한 교육을 제공한다. 곧, 서방보다는 특히 동방에서 더 많은 ‘세례 교리’(catechesis baptismalis)를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의 정보를 제공한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요약된 교육이지만 총체적인 것이며, 성서와 전례를 통하여 수행된다. 교리 교육의 근본적인 내용은 ‘신앙고백문’(symbolum)이며, 후보자들과 두 번의 만남을 독려하고 실행하였는데, 곧 주교의 역할에 의한 ‘신앙고백문 전수’(traditio symboli)와 예비자 각자의 역할에 의한 ‘신앙고백문 공송’(reditio symboli)으로 전 공동체 앞에서 그리고 세례 거행의 부활 전야에 앞서 이루어졌다.
요한의 복음은 3개의 유명한 성서대목과 함께 세례 교리를 위한 기초되는 내용을 전통적으로 작성하였다. 즉,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 4,6-42: 생명을 주는 물에 관한 서술이다.) 태생 소경의 이야기,(요한 9,38: ‘눈을 뜨게 해주는 것’(illuminatio)으로서 세례에 관한 서술이다.) 죽은 나자로와 그의 부활 이야기(요한 11,1-45. 앞의 두 성서 귀절과 함께 현행 단계적 세례입교 예식에 의하면, 사순 3·4·5주일에 갖는 제1·2·3 수련식의 복음 내용들로서 가해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어른 입교 예식서 159항 참조) 등이다. 교리는 안수와 함께 일련의 구마식이 동반되었다. 이 예절은 ‘신앙점검’(scrutini)이라 불렸는데, 후보자들이 악을 거슬러 투쟁하는 동안 하느님께 돌아서는 행위를 받아들였던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신영세자’(neophytus)의 양성은, 파스카 주간(성주간) 동안 발전되는 신비 교리교육과 함께 절정을 이룬다.
3) 참회 체제의 위기
4-5세기에, 앞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보통 사람들의 점증하는 쇄도에 대처할 줄 알았으며, 고유한 참회 훈련을 재구성할 줄도 알았다. 교회는 굳건함과 강경함으로 앞선 시대부터 전수된 엄격한 참회의 훈련을 유지하였으며, 특히 이 참회의 반복 불가능함의 원칙을 고집하였다. 세례받은 자가 교회 참회의 과정을 거쳐야 할 만큼 중대한 죄를 범하면, 특히, 우상숭배, 살인, 간음 등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교회와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기 위해서 하나의 긴 여정(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한 목적에 따라 한가지 ‘참회의 여정’(iter poenitentialis)이 만들어졌으며, 서방 모든 교회에서 거의 공통적이었는데, 여기서는 3가지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①시작 예식은,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일시적으로 공동체로부터 제외되며(ex-communicatio) ‘참회자 예식’(ordo poenitentium)에 등록한다. 그 때부터 단지 ②말씀 전례에만 참석할 수 있었으며, 또는 성찬 예식에 참석했다면, 제대의 봉헌에도 영성체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참회자들은 모든 예식 거행에 있어 주교의 특별한 강복을 받으며, 집회에서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보통 부활의 가까운 때에 참회자들의 화해로, 주교의 권고와 그들 각자에 하는 안수로 이 참회 여정이 종결된다. 로마와 밀라노에서는 성 목요일, 스페인에서는 성 금요일에 참회자를 위한 이 화해 예식을 거행하였다.
동시에 이 예식은 하느님의 용서, 교회와의 화해, 성찬례 친교(영성체)에로 되돌아옴이 허락되는 하나의 ‘성사적 행위’(actio sacramentalis)인 것이다. 하지만 이 ‘참회자 예식’(ordo poenitentium)에 소속됨은 일련의 번거로움과 (자격) 상실을 참아 받아야 했다. 가장 중대한 죄는, 그 결과로서 공동체로부터 무기한 소외되었다. 더 나아가 범죄한 수세자가 교회의 참회 과정을 통과하였다 하더라도 자기 생애의 남은 기간 동안 그 표시가 남았었다. 곧 공적인 책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군복무도 완수할 수 없었다. 또한 성직계에 들어 갈 수도 없으며,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전 일생 동안 결혼 생활의 실천을 끊어야 했다. 곧 실천에 있어 수도자처럼 살듯이 엄격하였다.
이런 엄격주의의 결과들은 서둘러 귀기울이게 하였다. 이 점에 대해 언급할 것은, 세례받기를 늦추는 것 가운데 이제는 노인이 되거나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참회를 연기하는 경향에 이르게 된다. 교회는, 예외적인 이해없이,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에 참회의 연기를 반대하였는데, 임종 바로 전에 화해 성사를 받기 위해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짧은 기간에 한정되어 조금씩 자리가 남게 된다. 이렇게 참회에 대한 비반복성의 전통적 원칙이 지켜졌지만, 이것의 사목적 목적이 공허하게 된다. J.A. 융만에 의하면, “4-6세기에는 교회의 참회 훈련에 있어 진정한 위기가 확인된다”고 하였다. 하나의 새롭고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게 되며, 스스로 실천하기를 늦추지 않았다.
4) 이방 문화와 그리스도교 예배
그리스도교 제국 시대에 교회는, 새로운 풍토에 적응(토착화)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직면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 이방 문화의 환경과 그리스도교 사상 사이에 교환이 격렬해지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가치의 역사적 현상에서 사회적-문화적 환경의 강력한 영향으로, 의식적으로 적응한 요소들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요소들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가) 새 성전들
황제 자신과 그 가족의 기여로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olis), 특히 로마에 예배 건축물들을 건립하게 된다. 라떼란 대성전이 그리스도교 전례의 제일 큰 환경을 설정하게 된다. ‘대성전’(Basilica)은 이방 문화에서 유래한 건축의 일종이며, 그 이름 자체에 (승리의) 개선과 위대함의 스타일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교 사상은 이 시민 건축 안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전통을 만들고 이 전통을 고유한 전례의 요구에 적응하였다. 4세기 이래 새로운 교회들, 특히 로마 도시 교회들의 건립에서 바실리카 스타일이 항상 더 빈번하게 된다.
새로운 전례적 짜임새는 전례적 스타일을 바꾸게 된다. 기념물같고 웅장한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가 배려한 교회 모임 장소로서, 수많고 꽉 채워진 집회를 표현한다. (거행) 장소의 차원과 많은 수의 사람으로 인해 (전례)행위의 변화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말씀과 성찬례 잔치라는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두가지 근본 기둥에서 진짜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4-5세기에 예배 건축물들은 수없이 늘어나게 된다. 이 시대에 황제의 권력은 이방 종교에 대해 빈번하게 성전들의 페쇄와 사형이란 처벌로 그들의 제사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내리며, 그 자리를 거룩한 전례 거행을 위해 공동의·공적인 현존에 내주었다. 곧, 로마 도시 공간을 지배하는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범신전(Pantheon)이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전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로마) 도시 주변도 예배 건축물들로 풍성해진다. 사실 이 시대에 순교자들의 공경이 강한 자극을 받게 된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특히 로마에서 또한 다른 도시에서도 찬란한 대성전들을 짓게 되는데, 그 크기와 아름다움은 일반 건축물들과 겨룰 수 있었다. 그 묘지 교회에 (순교자의) ‘탄생날’(dies natalis), 곧 순교한 날에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모였다. 순교자 공경은, 이후 남은 유해들을 (로마) ‘성 안의’(intra muros) 교회에로 옮겨 왔을 때 하나의 새로운 모습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점에서 순교자 유해의 의문점은 많은 법적이고 사목적인 논쟁을 갖게 된다.
나) 그리스도교의 시간
호의로 베푸는 황제의 순풍과 함께 그리스도교 사상은 조금씩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획득하게 된다. 황제의 입법은 ‘공경하올 태양의 날’(dies venerabilis solis)에 농사를 제외한 모든 시민 활동과 이방의 오락을 금지하게 된다. 이날은 결정적으로 ‘주님의 날’(dies dominica)이란 이름을 받게 된다. 이처럼 태양 숭배와 그리스도교 예배의 정치적 혼합주의를 세우게 된다. 같은 바탕 위에 그리스도교 한해(연중)의 영역에서, 주의 성탄과 공현의 축제가 출현하게 된다. 옛 사람들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일출의 지점인 동쪽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곧 생명의 자리, 행복과 세력의 자리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솟아오르는 태양’(sol nascens)은 신성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사상도, 고유한 성서적 근거에 연결하여, ‘세상의 빛’(lumen mundi), ‘높은 데서 떠오르는’(oriens ex alto) ‘정의의 태양’(sol justitiae)으로 주님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양상으로 태양과 그리고 이후 황제에게 적용되었던 과거의 모든 영광스러운 표현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평화시대 이후로 로마에서 12월 25일이 그리스도교 축제로 나타나는데, 태양과 황제 숭배의 앞시대 이방 축제의 (타협적 또는 논쟁적) 동화작용인 것이다. 12월 25일은 동지 이후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로서 태양신의 탄생일이었다. 이 자리를 빛이신 그리스도가 차지하여 축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동방 교회에서 같은 부류인 1월 6일 축제도 비슷한 기원들을 가져야 했다. 동방과 서방의 이 두가지 축제의 상호 교환은 전례적 시간의 주목할 발전을 예측하는데, 이후 세기들 중에 새로운 조화들로 풍성하게 된다.
4세기에는 성 아오스딩의 표현을 빌리자면, S. Augustinus, Epistula 55, 24: PL 33,215.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묻히고 부활하신 지극히 거룩한 성삼일’(sacratissimum Triduum crucifixi, sepulti, suscitati)이 발전하게 된다. 파스카 축제는, 중심 축제로서, 발렌티니아노(Valentinianus) 1세 황제부터 시작하여 신자 황제들이 갇힌 이들을 위해 특별 사면을 베풀고 그 날을 거행한 이래, 공공 생활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같은 이 시대에 파스카 시기는 긴 주기의 형성과 함께 최고의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사십일간의 ‘사순절’(quadragesima)의 준비 기간, 축제의 지속인 ‘성령강림’(Pentecoste)과 부활시기 50일 기간으로 구성된다.
전례주년의 나머지 부분은 다양한 그리스도교 축제들로 산재해 있는데, 그만한 이방 축제의 날짜에 대응하고 있다. 예컨대, 2월 2일(주의 봉헌 축일)과 22일(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4월 25일(성 마르꼬 복음사가 축일) 등을 들 수 있다. 아마도 이 시대의 사목은 이러한 양상으로 이방 축제를 거부하고, 신자들을 원형경기장과 화려한 공연에서부터 멀어지게 할 의향이었다. 하지만 이방적 유래를 가진 과용들 또한 쇠퇴하지 않았으며, ‘음복’(refrigerium)같은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화되었다. 이것은 죽은 이를 공경하는 뜻에서 거행되는 장례 음식 마련으로 구성된 것이며, 지금은 순교자들과의 통교를 표시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고유한 것이 되었다. 대중적이고 이방적인 깊은 기원들에 관해 이 ‘음복’(refrigerium)은, 당대의 사목을 분명하게 증거하듯이 쉽게 과용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
또한 탄생, 결혼, 매장을 동반하는 전통적인 통과 의례들 안에서도, 그리스도교 사상은 이방 종교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풍성하게 하였다. 예컨대, 태어난 아이에게 하듯이 세례받은 아이에게 우유와 꿀을 먹이는 것, 혼인 때 꽃화관을 씌우는 일, 무덤의 방향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당대 이방 로마인들의 풍습이었다.
다) 전례에서의 궁중 예절
앞 시대의 황제 숭배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우상 숭배였다. 그래서 절대적인 방법으로 거부되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주인’(kyrios)이라는 호칭을 인정하는 것, 꽃마차로 형상을 꾸미는 것과 그에게 ‘엎드려 절’(proskýnesis)하여 헌신하는 것, 또한 황제 신상 앞에서 불타는 숯불 위에 약간의 향을 태우는 것 등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출현으로 변화되는데, 여사제들에게 부여한 신성한 예우를 단념하게 된다. 아무런 종교적 설명없이 외적인 형식들이 계속되는 것이 있다면, 이것들은 이제 단지 제국의 궁중 예절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새로운 발전이 시작한다. 사실 황제는, 제국의 높은 권위자(제후)들과, 그의 동일한 제국의 권위와, 교회의 주교들, 특히 교황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존경과 특권을 부여하였다. 로마의 주교는 황제 폐하의 지위로 현양되었는데, 반지를 끼는 권리를 가졌다. 또한 무릎을 꿇고 발에 입맞추는 인사를 받아야 했으며, 교회들 안에 자신의 형상을 내놓을 수 있었다. 주교들은 이제 국가의 가장 높은 권위자에 견주어지는데, 권좌와 광채와 분향과 수대 등의 예우를 가질 권리가 주어졌다.
더 후대의 문헌들, 곧 ‘로마 예식서’(Ordines Romani) 같은 곳에는, 궁중 예절에 영향을 받았던 행위들과, 시대가 의문시되는 행위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주례자는 집회를 주관하면서 거룩한 폐하 앞에 부복하는 것, 황제의 궁전에서 ‘침묵하는 이들’처럼 직무자가 말씀 전례 시작 때 침묵하는 것, 또한 ‘불멸의 옷’(제의, vestes sacratae), ‘빨리움’(palium),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dignum et justum est) 같은 환호, 또한 봉헌자들의 행렬과 장엄한 기념으로 드리는 선물 봉헌 예절 등인데, 이들 모두가 로마-비잔틴 제국 궁중 예절에서 차용된 행위들이다. 이러한 양상으로 천상 황제의 거행에 지상 황제에 대응하는 많은 행위와 표현들을 적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반향으로 신자 황제는, 물론 인간이기를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공경하는 하느님의 위엄(폐하됨)을 반영하게 된다.
5) 전례에 관한 신학적 논쟁과 그 영향
그리스도론적 언쟁은, 4세기에서 출발하여 특히 동로마 제국을 동요케 하였는데, 신앙 고백문을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나게 하였다. 또한 이는 논쟁의 방향에 따라 전례적 기도에도 영향을 미치며, 내부로부터 이를 변화시켰다.
①아리안파(arianismus)는 성자가 성부에 하위임을 고집하였는데, 그 반작용으로, 잘못 해석할 수도 있었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영광’(Gloria Patri per Filium in Spiritu Sancto)이라는 전통적 양식이 아니라, 신성한 세 위격의 완벽한 동등성을 확인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Gloria Patri et Filio et Spiritu Sancto)이라는 다른 양식을 전례 안에 도입하도록 유도하게 된다. 하지만 아리안과의 논쟁이, 전례 기도문 안에 몇가지 텍스트를 변화시키게 만든 것 뿐만이 아니다. 백성의 종교적 감성이 강조점이 바뀜으로 인해 깊게 좌초하기도 하였다. 우선 그 이후 사실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결합되었다는 것(그분의 인간적 본성)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본래의 것(그분의 무한한 존엄하심)을 강조하게 된다. 아리안파를 거스린 투쟁은 또한 두개의 새로운 그리스도의 축일 안에서도 보여 주는데, 4세기에 운명짓게 된다. 곧 동방의 ‘주의 공현’(Epiphania)과 서방의 ‘주의 성탄’(Natalis)이다. 그리스도론의 이단을 방어하는 것이 이 두개의 축제 기원의 원인이었다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기 위한 열정은 거기에 대한 확산과 대중성을 용이하게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단에 대한 반응은 기회로 이용되었고 그들의 선포에 자극이 되었다.
②5세기에 네스토리안 이단과의 투쟁은, 앞선 세기의 아리안파의 것과 유사한 결과를 가져왔다.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이, 성모께 기여하는 ‘하느님의 어머니’(Theotókos)라는 타이틀을 반대하는 이들이었다면, 가톨릭 부분에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현양함으로써 새롭게 하는 열심으로 반응하였다. 동방 교회 전체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반대하는 모욕을 바로 잡기 위해 (성모 공경을) 높이 들어 올렸다. 성모를 공경하여, 처음에 순교자들을 위했던 것처럼 새로운 대성전(Basilica)들을 건립하였다. 이 교회들의 건립과 관련되어 두개의 첫 마리아 축일의 기원이 된다. 천주의 모친 대축일(8월 15일)과 이 축일은 이미 500년대 이전에 거행하였으며, 6세기에는 전 동방에 확산되었었다. 현행의 1월 1일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성모축일의 명칭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축일(9월 8일)이 그것이다. 또한 동방 교회의 기원을 가진 다른 두개의 축일이 성탄시기에 보태어지게 되는데, 곧 주의 탄생 예고 축일(3월 25일)과 주의 탄생 예고는 정확하게 주의 성탄으로부터 아홉 달 前의 날짜 계산에 의한 축일이다.
주의 봉헌 축일(2월 2일) 주의 봉헌은 주의 탄생 다음 40일 이후에 해당된다.
이다. 주님 축일 전체 그리고 이 두개의 축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마리아론적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축일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네개의 큰 축일들이며, 동방 교회에서 결정된 것으로서, 아리안 및 네스토리안과의 그리스도론 논쟁의 결과인 것이다. 그 이후 나중에 대 그레고리오 교황 이후 동방의 영향으로 서방 교회의 전례에 들어오게 된다.
③그러나 아리안 사상을 반대하는 반응에 다소간 관련되는 전례적 사실에 확인된다. 곧 영성체 횟수의 감소가 여기에 해당된다. 4세기 서방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이 현상은, 동방에서는 더 상당히 두드러진 것이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점을 빈번히 슬퍼하였다. 역설적으로, 신자들의 불충분한 성찬례의 실천(영성체)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종교적 관점으로 그것을 말하는 양상이 아마 본래의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사용하였던 언어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특성의 인간적이고 친밀한 관점이 아니라, 거리감을 가리키고 그분의 신성함을 명시하는 관점들을 강조하는 주장을 볼 수 있다. 성찬례에 관한 표현들의 그 예로, ‘두려움의 식탁’(mensa terribilis), ‘무섭고 떨리는 희생제사’(tremendum et terribile sacrificium) 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논쟁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본래 이것은 단성론자들의 것인데, 이들의 사상은 분명 아리안 사상을 반대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의 신적 본성만을 인식하게 되며, 그들의 전례에서 성체성사 앞에서의 떨림과 두려움의 이 감정들을 더욱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6) 그리스도교 예배의 음악과 노래
최근에 발견된 옥시린코(Oxirinco)의 파피루스는 부분적으로 아마도 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음악으로 옛 그리스도교 찬미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전례 거행에 사용하였던 초세기 공동체의 멜로디와 리듬에 대해 많은 것을 현재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예배의 측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수백 가지의 전례 텍스트들이 있다. 4세기와 5세기의 수많은 증거들은, 신자들에게 매우 쾌활한 행사로 노래를 소개해 주고 있으며, 열성적으로 실천하였다. 유명한 텍스트를 인용하여, 예컨대, 1 고린 14,15를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영으로도 찬미 노래 부르며, 정신으로도 찬미 노래 부르리라’이다.
회중에게 설교하는 사목자들은, 시편 노래 가운데 말씀의 봉사에 멜로디의 직무 역할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고대에는 종교적 영역에서처럼 인간의 심리적 영역 안에서 예외적인 능력을 음악에 부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음악에 대해, 인간의 정신(영) 안에서 ‘정화의’(catartica) 기능을, 선악의 정신들과 관련지어서는 ‘악에서 멀어지는’(apotropaica) 기능과 ‘영의 능력의 내림’(epiclettica)의 기능을 말할 수 있다. 신화에 대해 그리스도론적 의미의 전환으로 시작하는 것에, 이 모든 이방의 주제가 그리스도교적 차원에 유사함을 보존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교부 시대에 일반적으로 예배에서 음악적 도구(악기)들의 사용을 강하게 반대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목자들은 그것들 안에서 우상 경배와 세속 공연에서 마음을 끄는 호소를 보았는데, 신자들은 분명하게 거절해야 했다. 공동체가 읊고 노래하는 시편에서 다양한 음악 도구들을 불변으로 암시하는 것에 대해, 교부들은 한마음으로 상징적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하였다. 곧, “소위 인간이 완벽한 음악 도구이다.”라고 하였다.
4세기에 회중의 더욱 능동적인 참여의 열망에 대한 응답으로, 동방 교회에서 소위 ‘응송집’(antiphonarium)이라 일컫는 일종의 노래집이 출현한다. 이것의 진정한 본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동일한 응송 노래가 더 발전한 것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전통적 방법에 따르면, 독송자는 시편이나 찬미가의 귀절들을 부르고, 반면 합창단의 반복구(일명 후렴)는 더욱 활력있고 드라마틱한 특성을 가졌는데, 이는 집회 회중이 서로 대응하는 두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상호 교환하며 노래를 반복하고 노래에 다양한 색상과 활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환호(소리)’(jubilus)는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사가 없는 한가지 형태의 노래이다. 이것은, 이집트 사제들이 신성한 이름들에 대해 소리내어 읊었던 축원들을 가리킬 수 있는데, 희랍인들에게는 경악을 일으키는 커다란 거부감을 주었다.
유대인 전통도, 노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마디나 음절을 음악적으로 발성화하는 용법을 보존하고 있었다. 성 아오스딩의 시대에, 이 발성화하는 것들은 전례적 노래에서보다 세속의 노래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있었다. 사목자들은 모든 세속적인 특성을 이 노래에서 제거하고 거기에 영성적 의미를 부여하길 노력하였다. 히포(Hippon)의 주교(성 아오스딩)에게서 예외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한 무더기의 텍스트들을 찾아보는데, 여기에 나오는 노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적으로 표현할 의향으로 가사없이 나타나 있는데, 내적인 기쁨과 사랑의 항구한 표현을 보여준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 사이에도 이러한 종류의 주제에 관한 풍부한 풍조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 매우 빈번하고 강도 높게 노래의 주제가 공동체의 효력있고 통합하는 표현으로 추정된다.
3. 성사 신학
이 시대에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 곧 성 아오스딩과 가-디오니시오를 언급해야 하는데, 똑같이 신학을 풍요롭게 하였으며, 성사들에 관한 그들의 신학적 숙고의 발전에서 수세기를 통하여 그들의 흔적이 나타나게 된다.
1) 성 아오스딩의 영향
성사의 관심에 관한 커다란 세가지 핵심들은 성 아오스딩에게 나타난다. 곧, 도나투스파에 직면하여 이단과 분리주의자들의 세례 문제, 펠라지우스파를 거슬러 유아세례의 문제, 그리고 성찬을 유효하게 받기 위한 신자들의 나날의 양성의 문제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히포의 신학자는, 4세기의 희랍 교부들을 통하여 성사적 주제에 관한 오리게네스(Origenes)의 주목할 만한 공헌을 동화시킬 줄 알았다. 성사신학의 기초들을 세우기 위해 그에 의해 사용되었던 ‘신플라톤적 범주’(categoria neoplatonica)들은 급박하게 서방의 사상가들보다 동방의 사상가들에 더 가깝게 위치한다. 예컨대, 성 암브로시오에게 있어 그의 작품인, ‘신비론’(De mysteriis)과 ‘성사론’(De sacramentis) 안에 집요하게 응용된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아오스딩은 그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분명하게, ‘성사’(sacramentum)와 ‘능력’(virtus) 또는 ‘성사의 실제’(res sacramenti)를 구별함으로써 ‘성사’(sacramentum)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였다. 성사는 하나의 비가견적 실제의 가견적 표지이며, 여기에 표지의 가견성과 의미(뜻함)의 비가견성 사이의 유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편지, Epistula 98, 9(PL 33,36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Si enim sacramenta quamdam similitudinem earum quarum sacramenta sunt, non haberent, sacramenta non essent.”
아오스딩에게 있어 이것은, ‘말씀의 근본 가치’이며, 이 말씀은 질료적 요소를 비추어주고 설명하는 것이고, 동시에 가견적인 말로서 성사적 발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 Tractatus Joh. Evan. 80,3(PL 35,1840)에서 말하기를: “Detrahe verbum, et quid est aqua nisi aqua? Accedit verbum ad elementum et fit sacramentum etiam ipsum tamquam visibile verbum.”
이 ‘표명된 말씀’(verbum)은, 아오스딩에 의하면, 구원적 계시에 긴밀하게 연계된 말씀이며, 성사의 구성상 본질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그리스도의 업적’(opus Christi) 또는 ‘사도적 가르침’(disciplina apostolica)의 업적에 의한 설정은 성사의 본질적 요소이며, 누군가 세례를 줄 때 세례를 그리스도 자신이 주게 되는 양상의 것을 주목하게 한다. S. Augustinus, Tractatus Johan. Evan. 6,1,7; PL 35,1428.
성 아오스딩의 기여로, 성사 신학은 치프리아노 시대이래 성사의 직무와 효과에 관한 토론점들을 밝혀 내면서 중요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는 중요한 두가지 성사, 곧 세례와 성찬례의 근본적 상관관계를 신앙과 관련시켜 명백히 하였다. 특히 교회와 성사들의 본질적인 관계들을 분명하게 하였다. 이처럼 성 아오스딩은 결정적인 모양으로 그리스도교 성사들의 객관적 가치들을 설정하였다. 곧, 이 성사들이 교회의 의향에 따라 성사적 행위를 수행한다면, 교회의 신앙은 직무자의 개인적 불충분을 항상 보충한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 성사의 유효성을 결정짓는데 직무자의 신앙이 아니라, 교회의 ‘표명된 말씀’과 신앙인 것이다.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성 아오스딩은, 성사적 발생과 인간 집전자들의 윤리성에 의한 성사의 독립성 사이의 구별 작업을 하도록 재촉받았던 것이다.
교회론과 성사신학의 정확한 관계를 세움으로써, 성 아오스딩은 그때까지 획득하지 못했던 하나의 견고함을 이 마지막에 제공하였으며, 이것은 이후 세기들에 단련된 예외적 영향을 설명한다. 최소한 서방 분위기에서 저술가들은 대개 성 아오스딩의 신학을 반복하고 설명하는 것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오스딩의 성사론에 있어 근본이 되는 교회론적 깊이를 억제하고 잊게 된다. 곧, 이 망각은 성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대한 결과들을 가져오게 된다.
2) 위-디오니시오
디오니시오(Dionisius)의 가명 아래 감춰진 아레오파고(Areopago)의 재판관인 이 저술가는 전 중세기 동안 대단한 매력을 갖게 하였다. 그의 문학 작품은, 5세기말 몇년과 6세기초 10여년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복음적 메세지와 신플라톤적 전통을 조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의지들 가운데 한가지를 보여준다. 그의 사상 전체를 보면, 그의 신학이 영성적 세력에 있어 아오스딩의 것보다 하위의 것이 아님이 확인되는데, 덧붙여 말하자면, “디오니시오는, 아오스딩이 같은 양상으로 느낄 수 없는, 흥취(분위기)와 영성과 그 깊은 평화와 복됨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아마 서방 신학의 마음 안에 아시아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존이요 이것이 잔존하는 것일 게다. 그는 거룩함(sacralitas)과 성사성(sacramentalitas)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진리와 아름다움의, 신학과 미학의 명백하고 실현된 종합인 것이다.” H. U. von Balthsar, Gloria, Una esterica teologica, II, Milano 1978, 131. 발다살은 디오니시오에 관한 커다란 관심으로 한개의 장(pp. 125-187)을 그의 신학에 할애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인 디오니시오는 그 내용의 신비적이고 유일한 특성에 순응하기를 찾는 언어로, 논쟁적인 직면을 피하고 하나의 관상적인 신학에 전념하였다. 비일시적인 ‘이론’(theoria)의 파수대로부터 영원히 선하신 하느님의 확산을 관조하고, 또는 디오니시오 자신이 빈번히 표현하듯이, 이 신성한 확산을 ‘거행한다’(celebrare). 그에게 있어 모든 신학은 거룩한 전례의 한가지 유일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례에서처럼, 그것은 인간적이고 교회적인 행위이며, 그의 거행은 신성한 계시에 대한 한가지 응답이며, 기초가 되는 것은 미학과 예술의 범주들이며, 이처럼 디오니시오의 전례 신학에 있어 이 미학적 범주는 그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꿰뚫어 점령하고 있다.
신성화(divinizatio)의 과정은 세 가지 측면(단계)를 포함한다. 곧, 정화, 조명, 완전함 또는 하나됨(합일)이 그것이다. ①세례는 ‘조명받은 이’(illuminatus)들을 거룩한 백성인 신영세자(neophytus)로 받아들이는 ‘신성한 탄생’(natio divina)을, 또는 빛의 ‘성사’(sacramentum)를 설정한다. ②또 합일의 성사, 거룩한 기름의 성사 그리고 더 나아가 주교 축성과 수도자 성별의 성사 등 이 성사들은 일치의 완전함을 부여한다. 성사적 행위를 통한 신성화는 무아경(ecstasis)의 ‘무의식’ 안에서 절정을 이루어야 하는, 의식(자각)의 한 과정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디오니시오는, 이 부정적이고 지치지 않는 신학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보편적 규칙이다. 상징들의 질서 가운데 이해력은, 탁월한 실재들을 현재화하는 형상과 형태들을 설명하고 교정하고 안내해야 한다.
그는 상징을 두가지 형태로 구별한다. 즉, ‘유사’의 형태와 ‘비유사’의 형태가 그것이다. 유사의 형태는 단순한 이들과 초심자들의 교육에 더 잘 적용된다. 비유사의 형태는, 형식들의 감춰진 거부에 있어, 부정성의 의미에로 더 적절하게 지향하며, ‘형언할 수 없는 분’과의 일치에 더 잘 적용되는데, 그분에 대해서 (협의로 말하자면) 아무 것도 언급할 수 없으며, 단지 부정적 어휘와 침묵으로만 부를 수 있을 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