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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일반-05] : 전례의 표징
1. 종교적인 경건한 자세
인간은 육체로 되어 있다. 흔히 인간은 육체를 ‘소유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옷장에 옷을 넣어두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를 어딘가에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에 의해서 표현되기도 하고, 그것은 곧 육체를 통한 ‘언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자세가 대단하지 않는 것으로 무시되어서도 안되고 다른 그 어느 것과 바뀌어서도 안 된다. 육체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 인간 내면의 상태 가령, 주의, 불안, 관심, 감동, 동요, 분노, 고통, 거부, 무관심 등을 표현할 수 있다. 육체적 표현에 있어 많은 부분이 무의식중에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표정을 지니는 얼굴, 팔, 다리의 상태와 동작,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자세 같은 것은 주의 깊은 관찰자나 학문에 정통한 심리학자 앞에서 우리가 고의적으로 감추고자 하거나, 혹은 말로 은폐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게 마련이다. 또한 육체적인 자세 때문에 감춘 것이 드러날까 걱정되어 육체적인 자세를 억제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그보다 더욱 자세가 흐트러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육체적 표현방식들을 자유롭게 두어 우리를 내면의 감정과 무리 없는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우리를 몸의 외형, 우리들이 몸에 대해 지니는 관심, 그리고 의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육체적 표현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육체에 우리가 기꺼이 ‘안주하는지 아닌지’를 증명해준다.
우리 육체에 대하여 우리가 만족하는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다른 상황에 처했을 때 직접적으로 변화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면 그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육체를 인식하고 기꺼이 거기에 안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전례의식을 진행하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느끼고 표현할 것이다. 또한 아무런 생각 없이 쇼핑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 산책을 즐기며 왔다갔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복장 역시도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존경심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호’에서 비롯되는 예의와 소박한 의복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육체를 의식하는 감각을 잃을 것이다. 물론,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많이 모여 미사 드릴 때 제단의 계단에서 경의를 표하며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육체를 겸손히 하면서도 손끝만을 정중히 내놓고 보다 좋은 미사의 정수를 거두어들이려는, 말하자면 가족적인 분위기를 소홀히 하는 행동이 될 수가 있다.
1.1 하느님 앞에서의 자세(기립)
‘서서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서있는 자세를 의미한다. 인간은 땅에 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팔, 다리뿐 아니라 척추에 의해서도 지탱되므로 이것이 없다면 땅에 넘어질 것이다. 서서 걷는다는 상징적 의미에 근거를 두고 ‘똑바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서있는 사람은 육체적 건강은 물론 영혼의 건강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의 두 다리로 건강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몸무게가 그 두 다리로 지탱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이것을 나무에 비유해보면 사람의 척추는 ‘나무 줄기’가 되고 다리는 ‘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두 다리로 대지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매우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어서 어떠한 운명이 닥칠지라도 굽히지 않는 사람은, 확고한 신앙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다. 성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산보다도 강하다. 산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만, 그의 신앙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다.
하느님 앞에 서려면,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는 마치 잔인한 폭군 앞에서처럼 신음하거나 땅 위를 포복하는 형식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땅에서 나를 일으키신다. 하느님은 나를 ‘일으키시어’ 똑바로 서게 하시며 나를 믿도록 도와주신다. 또한, 이러한 신앙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미사 때, 사도신경을 드리면서 서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가짐에 있어서도 이런 뜻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노예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갈라 5,1) 또한 하느님은 죄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보행은 위엄 있고 존경받을 만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건전한 자랑이요, 그분과 그분의 창조,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존경과 경외심을 나타낸다.
1.2 하느님 대전에 미소한 자(무릎을 꿇음)
여러 면에서 보더라도 각자의 신장은 자신의 운명이다. 외모는 시시한 사람을 더욱 커 보이게 할 수 있고 사람의 중요성을 크게 감소시킬 수도 있다. 보잘것없는 키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그 사람을 실망시킬 수 있지만, 반대로 숭고한 행동을 하도록 그를 부축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고 밑창이 두꺼운 신이나 매우 높은 신 뒷굽, 머리 모양이나 긴 모자 따위를 이용하기도 한다. 키가 작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변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면적인 키가 내면적인 위대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신장을 늘이려고 무던히 노력한 결과, 좋은 효과를 보고 뽐내며 돌아다닌다고 가정하자. 그렇더라도 그는 하느님 앞에서는 여전히 미소한 자로 남아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 위로 들어올린다고 할 때, 이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부풀어오른 개구리에 불과할 것이다. 키 작은 것이 낙담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위가 될 수 있다. 겸손의 정수는 다른 사람을 낮춤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춤으로써 이루어진다.
무릎을 꿇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작아진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낮추려고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나를 들어올리고 일으키신다.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그분의 아들처럼, 그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창조물의 위치에 나를 앉히려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하느님 앞에서 작게 된다는 의미에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가령, 하느님 앞에서 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내가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일어서서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나 자신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하느님은 나를 스트레스 상태에 놔두지 않으신다.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약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위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외심과 그리스도교의 흠숭지례를 구분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분 앞에서 미소한 자로 굴복시키지도, 무릎 꿇도록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오직 그분은 우리를 들어올리시어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신다.
1.3 경청하는데 효과적인 자세(앉음)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는 일은 이제 보기 드문 자세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고 이쪽저쪽으로 쉴새 없이 움직여가면서 가능한 한 몸을 안락의자에 편안히 하려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마치 고대인들이 식탁에서 드러눕다시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앉아 있기보다는 다리를 쭉 펴고 드러눕기 위해 넓고 푹신한 안락의자를 놓을 수 있도록 주택을 설계하는 것 같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기 위해서는 몸무게가 두 다리와 엉덩이 부분에 똑같이 균형 있게 나뉘어져야 하지만 오늘날의 걸상과 안락의자는 몸을 쭉 펴고 다리를 길게 뻗을 수 있음은 물론 다리를 아예 바닥에서 들어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생각할 때 올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는 것은 바른 몸가짐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정성이 담긴 기대와 주의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준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몇 분 동안 가만히 ‘누워 있던’ 사람이 같은 시간 동안 소박하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으로 그런 자세를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은 편안하게 앉게 한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가령, 교회 안에 편안한 안락의자를 들여놓는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과거의 수많은 교회의 등반이 없는 의자가 묵상을 방해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몸을 쪽 편 채로 평온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이러한 몸가짐이, 묵상하기 위해 매우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된다. 왜냐하면 겉으로 나타나는 몸의 자세가 내면의 집중 정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역시 마음도 집중이 되고 평온해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축일, 감사, 찬양 때에는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성가는 감각적이며 사색적인 특성을 띤다.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안락의자에 누워 시청한다면, 똑바로 앉는다는 것, 즉 적극적으로 듣고 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1.4 목적지를 향함(걸음)
전례에서 걸어간다는 뜻은 단순히 어떤 위치의 변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만일, 보행이 하나의 사건이 된다면 의식을 갖고 평온한 마음으로 걷는 것도, 물론 하나의 당당한 걸음걸이가 된다. 이를테면, 나는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다른 목적지로 갈 것을 결정하고 그리고는 천천히 움직여 그곳을 향하다가 결국 그곳에 도착해서는 멈춰 서게 된다. 나는 나의 전체로 걷고 있다.
요즘은 출발 후에 목적지에 아주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비행기나 자동차로 가기도 하고 걸어서 가기도 한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는 아직도 완전히 도착하지 못했음을 자신에게 반문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나의 육신은 이미 도착했으나, 영혼은 아직도 노상에 있고 아직도 출발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내가 처음에 접어든 길을 다 지나오지 못한 것이며 그저 나의 육신만을 보냈던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여행하려고 그토록 안달을 하지만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탄심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통 움직이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그의 존재 일부분을 노상에 두고 간다. 본질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때로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을 때 걷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다. 이미 서술했듯이 ‘교회에 간다’는 것은 실행할 가치가 있는 하나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을 벗어나 이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이미 뚜렷한 것이다.
하느님은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의 목적지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전 생애의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점차 그곳에 접근해가다가 문턱에 이르러서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대합실에 머물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들어갈 수도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행하는 몸짓, 다시 말해서 무릎을 꿇든지 성호를 그으면서 교회에 도착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 즉 하느님 앞에서의 나의 자리를 찾아서 앉는다.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내가 있고 하느님도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 영혼을 열어 젖히고 “나는 지금 내 집에 와 있다.”라고 느낀다. 전례의식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걸음걸이,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가든지 아니면 행렬을 할 때, 그리고 성지를 순례하는 것 등은 모두 하느님께로 향하는 발걸음이요, 적어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걷든 함께 걷든, 마찬가지이다. 신앙심을 갖고 경건하게 교회에 가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께로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1.5 인간 편에서 하느님께로 향하는(장궤와 경례)
엄격한 옛 전례 예식서에는 경의를 표하는 네 가지 형식이 정해져 있다. 경례, 간단한 장궤, 엄숙한 장궤 - 성체가 현시 되어 있는 앞에 두 무릎을 꿇어 절하는, 그리고 성금요일과 사제 서품식 때 땅에 친구하는 의식이 그것이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마지막 형식은 고대 비잔틴 황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예법에서 따온 것이다.
진정, 극적인 형식으로 표현된 그러한 몸가짐은 “하느님은 전부이시고 저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저 이 몸은 먼지 속에 굴러다니는 존재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저를 땅에서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낮추는 이러한 극적인 형식은 구속사업을 통하여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들의 형제가 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전례의식에서는 성체 앞에서 하는 장궤와 십자가나 사람들 앞에 인사의 표시로 하는 경례만이 이용된다. 오늘날 여러 종류의 다양한 경례에 사람들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다.
미사 중에 단일한 표현들만 사용하고, 특히 신체 장애자의 경우는 간단한 목례로도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전례의식이 너무 무성의하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장궤는 의미 있는 표시로서 직접적으로 그의 실제적인 가치를 나타낸다. 천천히 장궤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느님 앞에 몸을 굽히지 않고도 작아진다.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는 동안 곧은 자세를 취한다. 무릎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이 된다는 것과 비천한 자가 아니라 미소한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습관적인 몸짓이 아니라 특별한 상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잊혀져가고 있기는 하나 서기 325년 제 1 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부활절과 맞이한 사람은 무릎을 꿇어서는 안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도 복음주의 교파와 그리스 정교회와 같은 다른 기독교 교파에서는 장궤를 안 하든지 아니면 아주 드물게 한다.
1.6 사람과 사람의 기교(인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어떠한 일도 교회 안에서는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성서 봉독이나 성가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일이 없고,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웃거나 박수를 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인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것이 조금 바뀌었다.
교회는 이런 행위에 보다 관대해졌으며, 우리는 뺨에 입을 맞추거나 농담을 하는 교황들의 인상에도 익숙해졌다. 이러한 것은 우리들의 공동체에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사에서 의식적인 인사가, 즉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로 시작되어,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며 끝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서로 인사하게 되고 헤어질 때는 작별인사도 하기 시작했으며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교회앞마당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사람들은 본당 신부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취침인사, 작별인사에 다시금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사소한 사고에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오히려 관대한 웃음으로 진정시킨다. 천성적으로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아이들이 전례의식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머리를 숙이거나, 한번 쳐다보거나, 혹은 악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인사말고도 교회에서는 전례적인 인사를 한다. 그것은 ‘평화의 인사’이다.
수많은 공동체에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 표현으로 개인적인 인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정된 단체가 전례의식을 거행할 때 이러한 옛 예절을 조용히 행하기 위하여 때때로 잠시 동안 의식을 중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허물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옛날식인 평화의 입맞춤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설교에 대한 옛 주석서에서나 속기록의 원시적인 문구 속에는 청중들의 외치는 소리와 박수의 요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들의 전례의식에서 그들과의 어떤 깊은 차이점을 제거한다면 그 옛날과 비슷한 스타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애와 연대감이 충만이 채워짐으로써 존경과 예절이 더욱더 빈번하게 합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2. 거룩한 행동
지금까지는 성스러운 행위가 이루어지는 환경, 즉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니까 시간, 장소, 사람 그리고 그들의 자세들은 우리가 성스러운 표징에 관해 심사숙고할 때 기초 조건들이 된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무엇’과 ‘왜’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행동, 언어, 물건들 그리고 상징들을 - 간단히 말해서 그것을 통하여 전례의식이 거행되는 바로 그 점을 - 살펴보겠다. 특히, 가톨릭 전례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항상 특별한 역할을 의미한다. 만일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말만을 해야 한다거나 혹은 노래만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비록 높은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마치 같은 시간의 여름학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존재는 감소되고 말기 때문에 우리가 미사에 참례할 때 우리의 인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 육체의 감각, 즉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들이 우리를 세상과 자연의 사물 그리고 동식물 세계의 존재들, 무엇보다도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 놓일 경우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지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언어 자체는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장 깊은 인식은 그와 같은 ‘공감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례 때 그와 같이 심오한 경험을 총체적으로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우리의 자세와 행동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하느님과 접촉하게 한다. 최근 종교회의에서 전례개혁 후, 우리들의 전례의식의 표징과 상징, 행위와 격식이 다소나마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 뜻은 부분적으로 옳은 데가 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혹은 불가사의한 의미들로 차있는 표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국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과 찬양에 새로운 기쁨이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혁의 모형대로 표징이 빈약한 전례, 전적으로 정신적인 전례의식만을 갈망하는 것은 분명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가령 ‘왜, 라디오를 통하여 미사를 듣는 것으로 미사 참례를 대신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 명확해진다. 이 사실은 라디오로 미사를 들어야 했던 환자들을 통해서도 확증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대전에 우리는 단지 귀로서만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2.1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의 표시(십자성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성호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들을 서로 성화 시키려고 한다. 자식의 이마에 십자성호를 긋는 어머니는 자식을 축복하는 것이요, 또한 자신의 이마에도 성호를 그어 자기 자신을 축복하려고 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경우에 실제로는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축복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 교황일 수도 있으나 -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축복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에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십자성호는 그것을 통하여 성화하기 위한 하느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표시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축복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축복은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의 일부에 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모는 ‘가정교회의 사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마 위에 긋는 단순한 십자성호 이외에도 폭넓은 다른 격식들이 있다. 우리가 이마와 입, 그리고 가슴 위로 십자성호를 그을 때, 두 가지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첫째는 천주성삼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 “우리의 생각과 말과 느낌 - 머리, 입, 마음 -을 거룩하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른바 큰 십자성호는 우리 몸 전체를, 다시 말해서 십자가 표시를 몸 전체로 감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성호를 그을 때 머리에서 발까지는 물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성호를 그어야 한다. 적어도 십자성호로 우리를 완전히 감싸는 하나의 큰 동작처럼 느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인호를 찍어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물이 되게 하신다. 전례개혁이 있은 후, 우리는 더욱 간소하게 그러한 표시를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 자각해서 행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축성식이 거행될 때 화살기도, 십자성호로 또는 가슴을 치면서 우리의 신심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분한 마음으로 성스러운 은혜를 응시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여러 동작보다 자각해서 행하는 작은 표시가 더 낫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어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우리 자신이 성화된다는 뜻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2.2 성화의 표징(축복)
본질적으로 모든 십자성호는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는 풍부하면서도 엄숙한 동작으로 축복을 구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면을 지닌다. 이때, 축복은 우리가 행동함으로써 우리들에 의해 일어나는 듯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받는 그 무엇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성화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분이 주시는 선물 또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축복처럼 그토록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전례의식은 없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오른손으로 허공에 십자성호를 긋는 것인데, 이것 외에도 성수, 성체, 십자가의 유물, 심지어는 혼배 예식 때 입은 영대를 갖고 하는 축복과 안수, 혹은 양손을 벌리고 하는 기도도 있다. 특히 세 번 거듭하는 주교의 장엄축복과 로마와 전세계를 향하여 내리시는 교황강복이 있다.
중세에는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 거의 잊혀진 축복이 형태가 있는데, 이는 손에 십자가를 쥐고 강복하는 것이다. 이런 격식은 만일, 아름다운 십자가가 영혼을 축복하는 데 사용된 후, 젊은 신혼부부에게 하나의 징표로 그리고 집안에 걸어 간직할 수 있다면, 오늘날 매우 뜻있는 형태로 다시 부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라는 일반적인 형식 외에, 사물이나 건물 혹은 공동 사용물을 축복해야 할 경우를 위한, 다양하고 특별한 기도문들이 있다. 구약성서에는 오래되고 존중할 만하며 아름다운 축복형식이 있는데, 이것은 아론의 축복이다(민수 6, 24 - 26 참조).
이러한 축복의 형식이 그리스도교의 전례에 사용될 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유대교와 같은 뿌리임을 동시에 상기시켜 준다. 사제의 첫강복이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어떤 축복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무엇을 상기시켜 준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게 축복이 되는 임무보다 더욱 아름다운 임무는 없다.
2.3 생명의 표징(성수 뿌림)
자신과 타인을 축복하는 특별한 방법은 성수를 뿌리는 의식이다. 자신을 축복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교회에 들어오고 나갈 때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는 관례이다. 불행히도 급히 서두르는 습관이 이러한 동작의 본질적 의미를 소홀하게 한다. 성수를 찍어 긋는 십자가는 우리가 세례 받을 때를 상기시킬 것이다. 그리고 성당에 들어오고 나갈 때, 어느 날 교회 공동체에 첫발을 내디뎠음을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성수를 찍을 때는 세례 받은 기억에 대한 짧은 세례갱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 속해 있으면서 당신 집안에 같이 있다는 느낌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많은 곳에서 교회에 들어오고 나갈 때, 손으로 성수를 찍어 자신의 가족들에게 나누는 관례가 있다. 아마도 원래는 이것이 성수 그릇 부근에 군중의 혼잡을 피하게 하려는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 동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례로써 유일한 하느님과 결속된다. 마찬가지로 교회 주위에 묘지가 있는 여러 지역의 신자들은 잠시 그곳을 찾아와 성수로 친척들의 무덤을 축복하는 관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함에 있어서, 죽는 날까지 살아 존재하는 생명이 세례성수로써 부여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이외에도 묘지에서, 관에 성수를 뿌리면서 “하느님께서 세례로 시작하셨던 것을 당신 안에서 완성하신다.”라고 말한다. 성수의 진정한 의미는 단지 세례의식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성수를 뿌림에서 나타난다(이처럼 축일미사가 시작될 때, 오늘날에는 많이 행하지는 않지만 “성수를 내게 뿌리소서.”에서도 나타남).
조금 뒤늦게 교회 안에 도입된 바 있는, 물건에 성수를 뿌리는 것은 단순한 축복의 의미 외에는 별다른 뜻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것들을 사용할 시간을 위해 하느님의 도우심을 기원하는 것이다. 결국, 다른 모든 성스러운 표징들이 가치가 있는 것은 성수로 축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에서 자동적으로 일종의 마술적인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표징이 나타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며 하느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행하신다는 것을 권장해주는 데 있다.
2.4 성스러운 소명의 예식(도유)
오늘날, 도유식은 더 이상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종의 표징이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관들이나 왕들의 도유식은 매우 친근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전사들에게 육체를 강하게 하기 위함이요, 병자들에게는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기름에 향료를 섞어 육체를 매력 있게 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관습을 회상할 수가 있다.
견진성사로써 우리가 고귀한 백성에 속하게 되는 도유식은 이와 비슷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세례와 견진은 처음에는 동시에 거행되었으나, 오늘날 도유식은 이 두 가지 성사에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견진성사에서 그것은 거룩한 의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
이러한 사실은 특히 사제직에 부름을 받는 서품식 때에 좀더 뚜렷하게 표현된다. 이 때문에 도유식은 사제나 주교의 서품식에서 보다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열거한 도유식에서 보면 힘을 기르는 작용이 맨 먼저 적용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 힘은 병자들의 도유식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느님은 병든 자들에게 건강을 주신다. 이는 단순히 병을 치유하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는 총체적 의미로서의 ‘건강’이다.
전례의식의 역사를 살펴볼 때, 도유식은 인간의 성화뿐만 아니라 전례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특별한 물건의 축성을 위해서 필요했다.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보아서 도유식을 통하여 교회, 제단, 성작 그리고 종들을 하느님께서는 축성하신다. 그 자체로도 큰 뜻이 있는 이러한 관례들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성한 것과 속된 것 - 마치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지도 성화되지도 아니했던 것처럼 - 과의 분명한 구별이나 뚜렷한 분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가 ‘기름 바름을 받았다’ 라는 사실을 항상 새롭게 언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 - 그리스도는 기름 바름을 받은 자라는 뜻 -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도유식을 통하여 축성된 손으로 신성한 것을 모독할 수 있는 그 어떤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온당하게 ‘성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인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는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기름 바름을 받은 것이다.
2.5 권위와 축복의 표징(안수)
어떤 직책을 부여하기 위한 안수는 우리 전례의식 가운데 보다 뜻있는 행위 중의 하나이다. 이 행위는 그처럼 뜻이 충만하기 때문에 어떠한 설명이나 주석을 달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어떠한 기도도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방침이다. 사제 서품식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일련의 사제들이 길게 일렬로 서서 한 사람씩 서품자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나서, 엄숙하게 다시 제단 위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길고도 조용한 의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위 속에 존재하는 의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시대부터 사제의 임무를 합당한 봉헌기도와 더불어 주교에 의한 안수로써 위임한다. 부제, 사제 그리고 주교들은 사도들에게까지 소급하는, 사도로부터 이어받은 안수를 통하여 결속된 인간의 연쇄 고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런 관점에서만 성직자들의 특권을 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공통적 사도직의 서품이라는 의미에서의 견진성사 역시 도유와 안수로 거행된다.
초대 교회에서는 고해성사 때의 사죄경 역시 안수로써 확인했다. 창살이 달린 고해소의 사용이 넓게 보급되고 나서 고해신부가 들어올린 손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된 표징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사제가 축복할 때 하는 안수는 새 사제의 강복시에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축복하는 형식 중에서 공동체 위로 양손을 벌리는 행위는 오늘날에도 매우 의미가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 위에 그의 양손을 펼치고 계시다는 것과 세례와 병자를 위한 도유에서처럼 그분이 우리의 안녕을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린이와 병자, 혹은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이러한 표징은 분명 큰 뜻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2.6 정화의 표징(씻음)
손을 씻는다는 것은 별다른 주석이 필요하지 않는 상징 중의 하나이다. 총독 빌라도의 행동과 그 행위의 자명함은 “나와는 무관하다.”라고 말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죄가 없으면 정화의 표시가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비논리성은 설득력이 없다. 봉헌기도 때에 사제가 손을 씻는 행위는 봉헌할 예물을 받은 후, 손을 씻을 필요성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징적인 가치는 더욱 깊다. 사제는 성찬기도 전에 다시 한번 집중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나서 ‘순결한 마음’으로 지성소 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와는 다른 상황에서 예컨대, 성지주일에 성지가지를 나누어주고 난 후, 그리고 재의 수요일에 재를 뿌리고 난 후에, 또는 견진성사 때처럼 기름을 사용하고 난 후에 사제가 손을 씻는 행위는 오늘날에도 역시 실질적인 타당성을 나타낸다.
이와는 전혀 다른 의식으로서 성목요일의 세족례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의 나타내는 의미는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겸허하게 봉사하기 위해 일반신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겸허’라는 뜻은 마태오 복음 23장 11절에서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듯이 봉사할 수 있는 용기라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관 복음사가들은 성찬의 제정을 상기시키는 반면, 복음사가 요한은 그의 입장에 서서 세족례에 관해 언급한다. 그 이후로 계속하여 그리스도교의 전례 속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이러한 두 사건은 성스러운 표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 중에 하나만이 성사의 가치를 갖는다. 우리는 지나치게 지배하려고 하고, 너무도 봉사하지 않기 때문에 과연 우리가 세족례를 하나의 성사로 인정하고 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목요일이 세족례는 일년 내내 그리스도인들의 지배욕 때문에 부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2.7 나누는 것과 준다는 것(분배와 영함)
전례에서는 종종 분배하는 것과 주는 것, 그리고 관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사를 집행하고 축복을 내리며 성체를 분배하고, 그리고 올리브 가지와 초를 나누어준다. 이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언어행위 역시 습관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의식과 상징에 대한 조직 및 관리 이상의 그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다.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하나의 예가 있다. 오늘날 성체분배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가령, 밀가루를 반죽하여 주형틀에 구어 연판처럼 얇고, 작고 동그랗게 제병을 만들어서 분배한다. 물론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따로따로 준비되어 있다. 옛날처럼 보통 크기의 빵을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잘라 나누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변화의 타당성은 분명하다.
신자들의 수가 많을 경우,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례는 단순하면서도 용이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렇지만 표징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의 힘이 감소되어 있다. 빵을 나누는 대신 분배한다는 것이다. 나눈다는 행위는 성체에 대한 일상적인 관례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매일매일 빵을 나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완벽한 평형의 원칙에 따라 똑같은 각자의 몫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서 함께 나누는 것을 배웠던 사람들이다(이것은 정치적 현실에까지 관련될 수 있는 의미를 지님). 미사에서 상징이 축소된다는 뜻은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해야 할 자세에 대한 감소된 양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포도주에 관해서도 비슷하다. 실제적이면서도 매우 명백한 이유들 때문에 포도주는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선물을 주고받는 데 있어서 우리의 무능력과 관례가 있는 것이 아닐까? 결혼식이나 가정미사 등에서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마태 26,27)라고 했듯이, 술잔을 다시 권하는 것을 경험했던 표징에 민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포도주는 큰 기쁨이 된다.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를 통하여 계속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전례에서는 물론이요, 오늘날의 일상생활에서도 나누며 주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실 수 있을 것이다.
3. 성물
우리는 전례의식을 거행할 때,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매일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고 할지라도 만일 사제가 둥글고 큰 빵을 조각으로 자른다거나 술병에서 술잔에 포도주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성가시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례에 사용하는 물건들을 통상적이 아닌, 제한된 입장에서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만일 많은 사람들에게 성체를 영해줄 때, 많은 포도주가 필요할 경우에는 아름다운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술잔에 따라야 할 것이다. 종교적 활동에 대한 우리들의 감수성은 타당성을 지닌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은 전례에서 사용함으로써 축성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도 그것들을 통하여 축성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하나의 ‘성사, 성화를 가져오는 행동’이 되게 한다(이러한 작은 형태의 행동 때문에 전통적으로 ‘준성사’라고 함).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사물과 대상물에 대한 인습이 사물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세련된다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성체 속에 있는 빵과 바로크 양식의 많은 제의들에서 그것들의 본래의 역할을 알아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표징들’이 실제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다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올바른 일일 것이다.
빵과 포도주, 악기, 제의, 향과 같은 것들의 의미는 그 용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동화작용의 능력을 가지고서 숙고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어려움 없이 기초적인 이해는 얻어지리라고 본다. 원래 많은 사물들은 그 자체에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전통과 더불어 자신의 강력한 상징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듯 술잔은 처음에는 단순한 작은 물병이나 컵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손바닥을 오므려서 쉽게 물을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신심의 뚜렷하고 중요한 표징을 이 술잔에서 알아보는 것이다. 가령, 가정미사에서 같은 몇몇 상황에서 매일매일 사용되는 물건들을 전례의식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특별한 축일 때에는 가문의 가보로서,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항아리 같은 것을 미사에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3.1 활력과 기쁨을 주는(빵과 포도주)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밀도있고 의미 있는 상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그러한 것들의 상징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기 위하여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신명 8,3)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기를 거부한 것은(마태 4, 1-4) 모든 사람들이 유일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것을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위한 ‘생명의 진정한 양식’이요, ‘세상의 생명인 빵’이 되셨다(요한 6,51). 일반적인 상징으로서의 ‘빵과 포도주’에 관해 생각해볼 때 ‘빵과 물’에 대해서도 토론이 오고간다. 가령, 어떤 사람을 감옥에 두고 빵과 물만 주고 내버려두는 것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로 하여금 어렵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과하고 살기에는 너무 적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유, 사랑, 기쁨이 없는 삶은 참된 삶이 아니라, 무위도식하는 생활이다. 때때로 청교도들은 성찬 때 예수님께서 취기를 돋우는 음료인 포도주를 사용한 사실로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빵과 물이면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빠뜨리기 쉬운 상징적 의미 하나가 떠오른다. 빵과 포도주의 상징 속에는 세상을 포기하는, 그 어떤 금욕적이고도 청교도적인 표징이 들어있지 않고 삶에 대한 존중과 기쁨의 표시가 들어있다. 이것으로써 포도주가 우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축제도 열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특히 우리의 삶을 축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생명력과 그리고 동시에 죽음을 극복한 삶의 승리를 찬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1요한 3,14) 이미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향연(아가페)에 대해 이야기했다. 빵과 포도주의 상징은 우리가 그것을 시편 104 장 15절에서 발견할 만큼 오래된 것이다. 거기서, 빵은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해주고’,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한다. 이렇듯이 그리스도보다 여러 세기 앞서서 이미 성사는 성스러운 표징들이 나타내는 바를 설명하고 있다.
3.2 존귀함을 담는 그릇(성작과 성반)
그릇보다는 내용물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교양 있는 행위로, 단순한 삶을 교양 있는 삶으로, 그리고 종교적 실천을 신앙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동을 세련되게 하고 주의 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성숙도는 전례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과 이웃을 대하고, 그리고 사물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측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본질적 가치를 지나치게 존중하던 시대에는 전례 또한 사치스럽게 될 위험이 있었다. 수세기 동안 거룩한 그릇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릇에다 보석과 금으로 세공하는 데에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같은 ‘종교적 사치’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비품들이 목적을 위해 쓰여진다면, 가격과 재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나, 형태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하지 않다. 하느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은 자상한 마음씨와 노고이지 사물의 물질적 값이 아니다. 과거에는 포도주나 성체를 담기 위해 성작을 사용했다. 성체는 수놓은 일종의 두꺼운 베일로 덮인 성작 속에 담아 모셨다.
오늘날에는 제병, 빵을 담는 데는 성반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성반을 사용함으로써 미사 때 제대 위에 형태가 다른 두 개의 성작이 없어도 된다는 잇점이 있다. 한편, 두 개의 그릇 형태가 뚜렷이 구별되는데, 낮고 넓은 모양의 성반은 제병, 빵을 담기 위해 쓰이고 반면에 성작은 마시기 위해 쓰인다. 이렇게 형태 또한 다른 기능을 나타내고, 따라서 그릇은 내용물을 ‘나타내게 되며’결국 하나의 ‘표징’이 된다. 최근에는 성작의 모양 또한 바뀌었다.
과거에는 사제를 위한 단 한 모금의 포도주만을 성작에 담았으나, 오늘날에는 영성체 때 많은 사람들이 성작을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용량이 더 큰 성작이 필요하게 되었다. 성체 현시대는 오늘날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없던 시대에는 성체에 대한 묵상이 영성체를 대신하는 가장 좋은 지향으로 행해졌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체의 현시보다는 자주 성체를 받아 모신다. 이것이 양식으로서의 빵의 본질을 나타낸다.
3.3 거룩한 말씀의 자산(성서)
축일의 전례의식을 거행할 때 복음서를 봉독하기 전에 규정에 따른 행렬이 있다. 사제 또는 부제가 봉독할 장소로 복음서를 가져간다. 그리고 장엄미사 때에는 향로까지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책은 신성한 것이며, 그 책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서는 소중하게 다뤄야 하고 성문화한 신성한 자산으로 취급해야 한다.
예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한, 특별한 장소인 강론대, 독서대가 있다. 그렇게 해서 미사성제는 두 가지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말씀의 선포인 말씀의 전례와 빵의 거룩한 잔치인 성찬의 전례인데 그것들은 거행하는 장소가 따로 있다. 단순한 전례의식이나 장소가 협소한 경우에는 이러한 구분을 포기할 수도 있다. 수많은 교회, 즉 하느님의 집에서 성서를 암시해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거처하는 집에서도 성서를 읽을 경우,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경외의 표시로 책장 속에 성서를 꽂아둘 좋은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실제 미사에서는 단지 두 권의 책을 사용한다. 성서 원전과 기도를 위한 미사경본인데, 이렇게 책에서도 말씀이 누구에게로 향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공동체에게로 향한다. 본당에서는 다양한 청원형식의 기도와 몇 가지 특별한 기도문, 그리고 강론집을 상용한다. 그러나 사제가 한 무더기의 책을 재미로 뒤적거린다거나 무심코 책을 넘기는 그러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또한 손으로 씌어진 원전들도 작은 상자 속과 우아함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제대 위에서 종이와 책들을 사용하는 태도는 성스러운 행위에 적합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모든 관점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다소 과장된 듯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가 성문서에 의한 종교이며, 그 안에 표징이 드러나는 문학적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언어학적 모든 역사는 책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성서’는 역시 책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애독자가 된다.
3.4 직무를 수여 받음(전례복)
직업 가운데 어떤 것은 유니폼을 지속적으로 입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이탈리아 말에 “직무를 넘겨 입다.” 라는 말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만일 특수한 어떤 옷이 기능이나 혹은 직무를 나타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표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에게 하나의 직무를 수여하고 또한 그에게 의무를 지게 한다.
옷 때문에 생겨나는 이러한 변형은 때때로 젊은이들을 놀라게 한다. 예를 들면, 성격이 명랑한 젊은 본당신부가 제의를 입고 엄숙하게 제의방에서 걸어나올 때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어떤 직무를 수여 받은 사람이 자신의 직무를 이행할 때, 일종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가 유머 있게 자신의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직무를 수여 받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씨는 우리가 그들의 위엄을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게 만든다. 이것은 물론 긍정적인 사실이다.
전례를 집행하는 사제나 부제 그리고 봉사자, 때로는 성가대 또는 제의방지기의 제의나 전례복들은 큰 성당 안에서는 우리와 매우 먼 거리에 있어,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의 제의가 먼 거리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축일에 입는 제의의 점진적인 발전은 전례문화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과거에는 제의에 장식과 자수를 놓는 것이 통례였으나 오늘날에는 더욱 간소한 형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에는 더욱 간소한 형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질이 좋은 천이나 줄무늬, 우아한 형태는 낮게 평가하기 쉬운 표징이나 상징들-예컨대 십자가-보다는 그 선호도가 높다. 제의 상호간의 조화는 성당 건축에서 외형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많은 봉사자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전례의식에서는 전례복에 대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축제의 성격에 따라 제의의 구별을 두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령, 가정미사 때와 같이 몇 명 안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제의를 입지 않을 수도 있다. 영대는 사제가 쓰는 가장 단순한 전례복이다. 그러나 평일과 축일의 차이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몇몇 공동체에서 하얀 와이셔츠 위에 영대를 걸치는 것이 매일의 전례의식 때 입는 유일하면서도 경제적인 제의가 되어버린 것은 서운한 일이다. 미사집전을 위한 제의가 평일에 비해서 축일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3.5 음률로 선포함(종)
시각적인 관점과 청각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교회를 건립했다. 시각적인 알림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되새기며 하늘 높이 치솟은 종각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청각적인 알림은 공동체를 미사나 기도에 끌어들이는 거대한 종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알림은 먼 곳에 있는 자들과 믿지 않은 자들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러한 알림은 무엇인가를 권유하고 기억시키기도 하며 다시 듣고 싶어야 하는 것이지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좋은 악기이다. 교회의 거대한 종은 거의 음이 잘 조율되어 있다. 그래서 능숙한 오르간 연주자도 오르간 연주가 종 연주에 혼합될 때, 종 연주에 적합한 음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단에서 사용되는 작은 종은 때때로 오르간과 함께, 혹은 노래반주로도 연주되기도 한다. 성목요일과 부활 전야제, 그리고 침묵을 지켜야 할 시작과 끝 무렵에, 또한 종교행렬 때에 봉사자들의 작은 종은 특히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은 종은 축일미사 시작 때나, 혹은 정해진 시각에 오르간 연주자와 공동체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사용한다. 전례의 개혁과 더불어 이러한 신호는 더욱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종종 이해하지 못했으며, 성가와 기도에 의해 가려있던 이런 것들이 이제는 쉽게 보게 되고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에도 더욱 자취를 감춘 이러한 소리는 의식적이면서도 조화로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알프스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옛 전원주택에서는 점심식사에 사람을 부르기 위해 사용했던 종각을 볼 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가옥입구에 시간을 알리는 종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 있다. 종은 적어도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는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분명히 각자가 타종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는 그러한 옛 악기인 종에 대해 아직도 애착을 느끼고 있다.
3.6 음악으로 드리는 찬미(악기)
전례에서의 음악은 전례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물론 음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소중한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임이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연주가와 악기의 관계는 신체와 춤의 그것과 같다. 악기는 조화로운 멜로디를 조절함으로써 인간의 목소리를 풍요롭게 한다. 오르간은 매우 복잡한 기계동작에 의해 수많은 기교를 부릴 수 있는 악기로서, 오래 전부터 악기 중의 악기라고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바로크 시대 이후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으며, 이미 그 당시는 오르간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오르간을 독점해서 사용해왔던 사실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그것은 분명, 소리의 풍부함, 소리의 확장, 그리고 음색의 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악기와도 비교가 될 수 없었으며, 또한 한 사람의 연주자로 매우 커다란 공동체의 노래를 반주할 수 있었던 악기는 오르간 이외에는 찾기가 무척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근대적인 전자악기는 오르간과 성능을 겨룰 수는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다른 어떤 악기도 오르간처럼 제 2 의 공명상자와 같은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연주실이나 교회의 음향효과가 만일 완벽하지 않으면, 오르간 연주는 완벽하게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 울림이 공명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주실이 아닌 교회에서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단지 시각적 분위기에서 뿐만 아니라 음향효과적 분위기에서도 기인한다. 많은 음악적 기술의 가능성 가운데서 오르간은 어울리지 않는 소리나 기교 또는 연주자를 통하여 하느님의 공동체가 아닌, 오르간 연주자의 명성에만 도움이 되리라는 유혹에 빠질 수가 있다. 오르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겸허한 봉사정신이 필요하다. 이렇듯 오르간 연주자에게 아름다운 찬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주가 노래를 부르게끔 하여 기도와 묵상을 돕는다는 데에 있다.
3.7 감각기능에 의한 기도(분향)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우리의 감수성 중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특히 시각과 다른 감각들이 너무 우세하여 우리는 종종 후각작용을 망각해버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지 못할 경우 “냄새도 싫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말하자면 우리의 위생적인 관념은 몸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운 냄새의 결함을 느끼지 못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을 본보기로 삼는다. 위생관념이 부족했던 시대에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항상 향수를 사용했다.
귀족들의 집이나, 회합장소 그리고 교회에서는 -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 좋은 향기가 퍼지도록 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방향물질을 태우기도 했다. 값비싼 외국산 송진과 방향제는 신을 공경한다는 의미에서 신들에게 분향하는 데 사용되었다(전염병을 멀리하기 위해 방향물질을 태우는 관습은 오늘날 주의공현 대축일에 집과 마구간에 향을 피우는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음).
전례의식의 전통에서 분향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원래는 유일하시고 홀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공경함으로써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 목적을 위해 지정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성서구절이 담긴 책, 제대 위에 놓인 제물, 십자고상 그리고 제대 그 자체를 예로 들 수 있다. 사제, 부제 그리고 공동체에게 드리는 분향은 우리들이 성스러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신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체께 바치는 분향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해 가능한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 그 외에 다른 뜻은 민감하게 지각된다는 사실에 있다. 즉, 향은 기분 좋게 향기를 풍기며, 연기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간다. 이리하여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가 그분을 즐겁게 해드린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간소화 개혁과정에서 많은 ‘진보적’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분향은 위신을 잃었다. 우리들의 집에서는 향기로운 초와 향을 피우고, 또한 온갖 종류의 향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더 이상 우리 믿음의 민감한 표현을 냄새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4. 성스러운 표징
상징과 그 용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가령, 반지나 아니면 어떤 물건을 두 개로 갈라서 어떤 징표로 두 사람이 갖기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에 다시 짝을 맞출 때 진정한 그 물건의 소유자를 식별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은 일종의 확인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뒤에 두 명의 제자들이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다(루가 24, 13 - 35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그들과 동행하며 성서의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당신을 알아본다. 이렇게 성체는 깨달음의 징표가 된다. 옛날의 상징은 우리 시대의 상징이 지니는 의미보다 더 깊은 뜻을 갖고 있었다.
상징에서 과거의 그 어떤 것이 현존하게 되고 현시점에서 유효한 것이 된다. 전에는 아무도 “아! 이것은 분명히 상징적일 뿐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에게 상징은 그렇게 중요시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시대에 인식의 징표가 필요하다고 함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표징과 단순한 상징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도 그 용법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보통 일체감을 형성하는 그런 상징들을 표징이라고 간주한다. 이리하여 우리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두 가지, 즉 빵과 포도주는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어 가장 귀한 표징들 중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상징은 오랫동안 존속될 수 있고, 또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의미가 변화할 수도 있으며, 주의 깊은 관심의 대상일 수도 혹은 간과할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상징의 빈번한 사용과 그 인용은 꼭 인식작용과 가치를 포함할 필요는 없다(무심코 성호를 긋는 습관을 한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음). 그러나 상징행위에 대해 보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현존하게 하는 데 있어서 상징의 효력은 때때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을 우리의 손안에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요술적 실체나 마법으로 그것들을 해석하도록 유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된 생각은 상징 그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4.1 모순의 표징(십자가)
십자가는 늘 모순의 표징이 되었다. 이미 사도시대에도 (고린 1,18-31)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사형언도를 받은 자를 믿는다는 것과 처형대의 표징으로부터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표징의 역사는 우리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 즉 양팔을 벌린 사람과 나무, 생명이 있는 나무와 한 줄기의 태양빛 등이 이러한 가장 오래된 표징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서로 교차하는 두 개의 직선은 세계와 인간 그리고 내재성을 향하고 있는 그 수평적인 차원과 더불어 하느님과 초자연을 향하여 하늘로 치솟고 있는 수직적 차원을 결합시키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 향하는 결과 사람에게로 향하는 길을 서로 결속하고자 애쓴다. 또한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하려 들지도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십자가 위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형상은 보다 후대에 와서 이루어졌다. 그 끔직한 사건에 대한 수치심은 매우 컸다. 처음에 예수님은 왕처럼, 주님처럼 표현되었다. 그 뒤 고딕 예술에서 처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감히 드러내려고 했다.
상징적인 형상에서 사실주의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형상에서 묵상을 돕는 형상으로 변모해갔다. 불행하게도 후대에 와서는 십자고상이 종종 여러 가지 장식으로 변형되어 갔다. 옷감 위에 수를 놓아서 전례의식 때 사용하는 제의를 장식하기도 했다. 전례개혁 전에는 미사 중에 사제와 신자들이 성체와 포도주, 물위에 십자가형으로 강복하는 일이 많았는데 축복하려고 할 때 실수하기가 쉬웠다. 개혁된 전례에서는 그 수가 감소되었는데, 여기에는 그 지향하는 바가 계속된다고 믿는 까닭에 있다.
십자고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하간 십자가의 모순은 아직도 끝나지 아니했다. 가장 명백한 모순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패배의 표징으로부터 승리의 표징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십자가의 모순은 이 세상의 경기규칙에 순응하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혁명적인 힘을 믿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표징이 된다.
4.2 생명의 빛(촛불)
세계의 수많은 꺼진 빛들 가운데, 그리고 다시 살아있는 빛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법을 우리는 배웠다. 벽난로의 타오르는 불을 여러 시간 동안 응시하거나 집안에 혼자 있을 때 촛불을 켜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고독을 극복하고자 자기 곁에 살아 있는 무엇을 갖고자 한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종종 의미를 상실하고 스스로를 위해 우리의 생활 안에서 삶의 의미를 충족시켜 줄 표징을 찾고자 한다. 큰 초와 같은 표징을….
봉헌 때에 사용하는 초라든지 망자를 위해서 쓰이는 초처럼, 초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금세기 초에 제대 위에 초를 놓아두기 시작했고 비록 빛을 발하는 기능이 약하고 그것이 별로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그곳에 두게 되었다. 대축일이 거행되는 시기라든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순간에 초는 전례의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부활절, 예수성탄, 세례 때, 그리고 첫영성체 때 특히 그러하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등불이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려고 한다. 부활절 전야에 어두운 교회 안으로 큰 부활초가 들어오고, 모든 사람들이 들고 있는 초에 그 불빛을 옮길 때, 그러한 의식으로 거행되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주례사제나 부제는 세 번 노래하며 매번 음을 올려 “그리스도의 광명!”하고 찬양한다. 주님의 봉헌축제 때(2월 2일 주의 봉헌축일)의 초의 봉헌과 촛불 행렬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이때 초는 봉헌 제물로 변모하지만 또한 “이방인들에게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루가 2,32) 예수님과 결속된다. 촛불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빛을 밝히고 있다는 그 사실에 있다. 홀로 자신을 희생하는 자만이 생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사랑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표양과 말씀은 그 점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의 말씀을 약간 풀이한다면(마태 10,39) 다음과 같이 단정할 수가 있다. 만일, 초가 자기자신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자신을 소모한다면 광채를 발하게 되며 이 점이 초가 지니는 의미가 된다.
4.3 맑고 밝히며 뜨겁게 하는(불)
대부분의 경우 전례 중에는 초와 분향에 쓰이는 숯불, 성체등불의 기름처럼 불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다. 다만 부활전야에는 참된 불꽃을 사용한다(그러나 교회 안에서 부활초가 들어오기를 대기하고 있는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작은 초를 갖고 촛불을 켜지 않은 채 기다림).
불은 근원적인 힘에 속한다. 만일 지구 내부에 있는 불이나 태양열을 상상한다면, 힘이 넘치는 부활절의 불 역시 의미가 있는 작은 불꽃이 된다. 오늘날, 거의 잊혀진 네 가지 원소에 대한 개념은 현대적인 의미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들로서, 이를테면 호흡할 수 있게 하는 공기, 성장과 생명에 필요한 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체의 서식처인 땅,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불을 나타내고 있다.
오염된 공기, 썩은 물, 시멘트로 덮인 흙, 에너지의 고갈로 인하여 우리의 운명이 어떠하겠는가는 자명하다. 불은 우리 인간들에게 세 가지 기능을 가져다준다. 즉 밝히고 맑게 하며 뜨겁게 해준다. 그 빛의 세기의 의미는 완전한 암흑 속에 잠기고 실명에 빠져 있는 삶을 상상해 보는 사람에게는 곧바로 분명해진다.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빛이다.
불의 뜨거운 힘은 특히 겨울에 더욱 그 효과를 발휘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겨울 동안의 추위로 인한 사망이 매년 나타나는 유령과도 같았다. 동짓달의 축제와도 같은 크리스마스는 과연 이러한 주기적인 체험 속에서 그 정확한 위상을 갖는다. 반대로 오늘날에는 대체로 불의 정화적 힘에 대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 불을 가지고서 금속이나 비금속 찌꺼기와 다른 물체를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불에 대한 소박한 상징을 분명하게, 직접 느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 자진해서 모여 앉았고 빛과 암흑, 더위와 추위, 상호간에 대립되는 감동적인 활동력을 거의 다 체험했던 것이다. 습관에 사로잡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보다 좋은 상황에서도 교회의 난방기능이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므로 점점 늘어나는 난방비용을 걱정하는 본당신부의 불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의 해석을 새겨들어야 한다.
4.4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물)
샘은 흐르는 물뿐만 아니라 생명수를 제공해준다. ‘죽은 물’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개념으로서 동양에서는 웅덩이나 거의 비어있는 물탱크의 소금기로 오염된, 괴어있는 물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 물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한 샘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요한 4, 10-14). 그러나 다만 물은 생명수일 뿐 아니라 위험을 나타내기도 한다. 불에 있어서와 같이 물도 마찬가지로 이 이중적인, 일치되지 않는 정반대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물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또한 가장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구약성서의 중심적인 이야기 속에 이러한 물의 이중적인 면을 극적인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같은 물인데도 홍해를 통과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주었지만 뒤쫓던 이집트인은 전멸시켰던 것이다. 부활전야에는 불과 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전례의식이 거행되고 있을 때 이 옛 이야기가 말하여진다. 그리고 옛 관습에 따라 바로 이날 밤에 세례가 집행되고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물의 상징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해 성수를 뿌리는 행위, 그리고 성당에 들어가고 나갈 때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는 일, 집안에서의 성수의 사용, 이러한 모든 것은 세례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다. 자기 자신을 청결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물의 또 다른 의미는 초창기부터 세례성사에 드러나 있다.
옛날에는 성인들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세례성사를 통해 죄악을 끊고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인식했다. 오늘날, 어린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 죄의 용서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지만 새로운 탄생과 새롭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디도 3,5) 세례를 받을 때 ‘죄가 씻겨진다’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최근 교회관습에 있어서의 변화는 세례 때 성수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시한다. 지금은 더 이상 부활전야에 축성된 성수를 일년 내내 보관하지 않고, 매년 성세성사가 거행될 때 신선한 물을 축성하여 사용하다.
4.5 승리의 상징(깃발)
깃발은 오늘날 거의 고려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상징이다. 깃발은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특히 행진할 때 사용했다. 장대 모양의 십자가에 장식용 천을 부착하여 행진을 하던 그러한 십자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림을 그리다시피한 장식이 점차 십자가 자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 밖에서 진행하는 공식행사에서의 깃발 시위는 개선의 표시로 간주되었고 또한 그것은 십자가의 상징을 실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실제로 종교적인 물건이나 상징들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하는 분위기에서는 결코 사용되서는 안될 것이다. 개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여전히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며, 죄와 죽음에 맞서서 승리하는 의미의 표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개선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 유형의 상징에 관해 생각할 때, 위험성은 그것들의 본질적인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외부적인 용도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때, 악과 죽음을 물리쳤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쁨의 동기가 되어야지, 승리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쁨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승리가 아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이름으로 싸워서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임무처럼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깃발은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를 묵상해볼 수 있는 좋은 동기가 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관한 전설(4세기)을 보면, 밀비오 다리의 전투 전날 밤, 꿈속에서 그는 “이 표징으로 너는 승리할 것이니라!” 하는 소리와 함께 십자가의 표징을 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과 관련이 있는 이 전설은, 그 시대의 군사 정책적인 배경에서 십자가가 어떻게 해서 콘스탄티누스로 하여금 승리의 행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였는지를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과 함께 십자가가 종교적 승리의 표징으로서의 그 순수성을 잃고 정치적 승리의 표징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교회의 깃발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표징을 한쪽 구석에 방치시켜 두어서는 안되며, 의식적이고도 비판적인 태도로 그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깃발은 우리들의 승리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징이어야 한다.
4.6 현존의 표상(상본)
거룩한 상본에 관해 성서의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성서적 금지에서부터 성서에 대해서 표시하는 똑같은 존경이 상본(성화)에도 들어간다는 동방교회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진행된다. 성서적 금지의 경우, 흠숭지례로 상본을 공경하는 것을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로 금지했던 반면, 동방교회 전통의 경우에는 상본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다른 말로 표현하는 데 쓰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입술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무엇인가를 알리고 장려한다.”(870년 콘스탄티노플 제 4 차 종교회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리는 데 필요하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이야기를 따르려하지 않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성화를 그리는 행위는 마치 종교적이며 문화적인 행위로 이해되어왔고 매우 정확한 규칙에 따라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상본의 정당성에 관한 논쟁은 종교개혁 이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잇달아 대두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립은 없다. 그러나 현대적 교회건축은 성화의 사용을 보다 제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이면서도 때로는 매우 피상적인 작품들이 대두된 이후로, 지난날의 종교적인 상본에 대한 회의론이 어느 정도 강요되기도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현대 예술이 난해하다 할지라도 성화의 언어로 표현되는 종교 예술에 있어서 소박한 일반 대중까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각적인 자극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도 종교문화에서만은 영상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은 유감이다. 하지만, 영상언어가 늘 지대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옛 성화에 대한 단순한 신자들이 신심은 우리에게 반성의 동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우리는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영상이라는 어휘(그림)에서 유래하므로 만일 우리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을 강렬하고도 충만한 표현력을 지닌 영상을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통속적인 영상에 사로잡히리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합리적인 언어가 표현력을 잃고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상본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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