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자료] - 전례의 역사 :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서 뜨렌또 공의회까지(1073-1545)

2007. 1. 17. 오후 11: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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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자료] - 전례의 역사 :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서 뜨렌또 공의회까지(1073-1545)  

전례의 역사 목차

전례의 역사 : 교회 역사 발전 가운데 교회의 전례적·성사적 삶 ................ 1
제 1 장 신약성서 시대의 예배 .................................................... 2
제 2 장 순교자 시대의 전례(2-3세기) ......................................... 19
제 3 장 로마 제국 시대 교회의 예배(313-590) .............................. 35
제 4 장 그레고리오 대교황에서 그레고리오 7세 교황까지(590-1073) ....................... 51

제 5 장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서 뜨렌또 공의회까지(1073-1545) ................... 67
1. 일반적인 배경 ............................................................... 67
2. 전례적 발전의 노선들 ...................................................... 68
1) 교황청의 개혁과 서방 전례의 통일 ............................................... 68
2) 설교와 전례 .......................................................................... 70
3) 새로운 성체 신심 ................................................................... 71
4) ‘육화한 그리스도’, 성모와 성인들 ................................................. 73
5) ‘중세 침체기’의 전례 ................................................................ 76
3. 성사 신학 .................................................................... 78
1) 성 빅토르 후고(1096-1141) .................................................... 78
2) 베드로 롬바르도(1100-1160) ................................................... 79
3)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 80

제 6 장 뜨렌또 공의회에서 전례 운동까지(1545-1909) ..................... 82
제 7 장 전례 운동 ............................................................... 96
제 8 장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 106
제 9 장 공의회 이후 ............................................................ 117

[전례역사-05] :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서 뜨렌또 공의회까지(1073-1545)


1. 일반적인 배경

사회변혁, 교회 생활의 변화 가져옴

10세기 이후, 특히 12-13세기 동안 전 분야에서 커다란 변혁이 일어난다. 중세기에는 일종의 ‘상업적 변혁’이 일어난다. 경제가 활성화되며, 직업들이 전문화되며, 교환과 판매가 증가하며,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 흐름이 증가한다. 원천에로 돌아가려는 광범위한 움직임은 영성을 바꾸어 놓게 된다. 곧, ‘사도적 삶’(vita apostolica), 예수와 사도들의 생활은 이 시대에 맞이한 다양한 영성적 흐름의 규칙이었다. 또 새로운 위계들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성무의 거행보다는 대중 설교와 자선 사업에 더 헌신하게 된다. 이는 그들의 필요성과 고심을 나눔에 있어 인간을 통한 능동적 생활의 한가지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교회법 강화와 신학문들

그리스도교의 원천들에로 되돌아감은 옛 고전들과 옛 학문들에로, 특히 ‘로마법’에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다. 이 로마법은 12-13세기의 중세 사회에서 항상 더욱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황들의 대부분은 교회법 학자들이었으며, 그라찌아노의 교령집(Decretum Gratiani) 가말돌리회(Camaldolianus) 수도자로 볼로냐(Bologna) 대학 교수인 그라찌아노(Gratianus, +1158)는 1140년경 흩어져 있던 교회법령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교회법모순조령의해법령집’(敎會法矛盾條令義解法令集, Concordantia discordantium canonum)으로 단순히 ‘그라찌아의 법령집’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1918년까지 권위적 교회법전이었던 구교회법전(Corpus Juris Canonici)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교회법학의 시조로 간주된다.

은 드러나게 성서와 교부학을 위축시켰다. 번역물들이 많았으며, 스페인 똘레도(Toledo)에 유명한 번역가 학교가 있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아랍의 과학 저술들, 희랍과 히브리와 페르시아 또는 힌두의 새로운 문헌들이 서방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해석가들의 출현으로 사물 인식의 경험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 제시된다. 새 세상의 지리적 발견들은 지구상의 다양함과 광활함을 열어 주었으며, 의약과 식물학과 동물학의 기술적 발전은 경험적-학문적 관심을 강화시켰다. 중세의 교회 성직자(신학생)들은 마르코 폴로가 말했듯이, “세상이 똑같은 것, 기본 요소들의 본성, 천체의 위치, 동물들의 본성, 바람의 맹렬함, 나무와 풀들의 생명”에 감동하였다.

세상의 이해와 이성의 확대

중세기는 세상에 대한 시야와 합리적 방법론으로 특징된다. 우주(universum)는 영상이며 동시에 실제이다. 상징의 가치도 있지만, 내재적 가치도 갖기 시작한다. 12세기 한 저술가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의 ‘창조물들의 질서 정연한 모음’(ordinata collectio creaturarum)이다. 그리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하나뿐인 달과 별들은 명료하고 빛나며 아름답다”고 노래하였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상징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시대에, 이성은 온 세상을 연구하려는 시민적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 때에는 대(大)알베르토, 보나벤뚜라,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학자들의 시대였다. 교황청과 수도원 활동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명성을 얻었다. 비범한 건축가들과 설립자들이 출현하며, 전체가 하나의 문명으로 발전하며 예술의 기념적인 업적의 형식을 취하여 주로 수도원들과 고딕식 (주교좌) 대성당들이 출현하게 된다.

흑사병, 사회적 변혁의 한 요인

하지만 14세기 초 10여 년에 중세의 문화적 체계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348년 흑사병의 해는, 참사와 재난의 긴 시기로 넘어가는 상징적 해가 될 수 있는데, 이 때부터 ‘중세 침체기’가 시작된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사망률이 두드러지게 높아졌으며, 종교 영역에서 깊은 반향으로 특별한 문화적 분위기를 만들게 된다. 교황들은 아비뇽(Avignon)에 머물기 시작하였으며, 교황직은 내적이고 외적인 분쟁이 계속됨으로써 지쳐 버린다.

민족주의와 인문주의, 종교개혁 시대 예고

신학적,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과학적 활동은 새로운 방향을 택하게 되며, 이로 인해 매우 다른 지적, 영성적 관점들을 예고하게 된다.
많은 나라들에서 민족주의 정신(nationalismus)을 표명하고 강화하였으며, 자기 독립 중심과 엄격한 통치를 근거로 삼았다. 문장의 표시가 국경을 나타내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탐험가들은 커다란 신대륙 발견을 완수하게 되며, 반면 로마 고전에 감탄하는 인문주의자(humanista)들은 새로운 문화적 느낌을 창조하게 된다. 위클리프(J. Wyclif)와 후스(J. Hus)의 논쟁 이후, 매우 빠르게 개신교의 종교 개혁이 돌연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서방 그리스도교 일치의 항구히 찢겨진 상처가 된다.

2. 전례 발전의 노선들

1) 교황청의 개혁과 서방 전례의 통일

10세기 로마 전례의 쇠퇴 이후, 개혁을 이룬 위대한 교황으로는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인노첸시오 3세(1179-1180)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전례적 분파도 통제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레고리오 7세는 모임의 요인으로서 전례에 관해 교회 생활을 쇄신할 큰 의향을 갖고 작업하였다. 옛 전통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게르만인들에게 허용된 것이 우리 교회의 통솔이라고 할만큼 이 시기에 최대로’(maxime eo tempore, quo Teutonicis concessum est regimen nostrae Ecclesiae) 도입되었던 변화를 비판하였다. 그는 이런 복구를 위해 작업하면서 진정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실상 로마-프랑코-게르만 전례를 발족시키고 공고히 하였다.

그의 전례 개혁은 교황 권위의 확인을 목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로마 전례의 ‘예식 순서’(Ordo)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사용은 진실성의 보증으로, 또 전 서방 교회의 ‘어머니’(Mater)인 로마 교회에 영적 헌신으로 고려되어야 했다. 그런 교황 태도의 한가지 결과는 스페인 비시고틱 전례의 억압을 가져왔고, 로마 예식으로 대치되었다. 동일한 노선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성인 교황들의 축제가 ‘도처에서’(ubique, 즉 모든 교회에서) 거행되어야 하고, 발에 친구하는 것은 교황에게 유보된 경의의 표지가 되어야 하며, 주교 서품의 준비 예절에 있어 교황께 드리는 충성 서약을 첨가해야 한다고 포고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재임 시에 서방 교회들은, 로마의 전례 실천을 수용하고 교황의 예배법을 준수하는 것을 의무로 보았다. 하지만 전례적 통일의 과정은 다양한 앞선 원인들의 결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프란치스칸 수도회의 활동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사실 인노첸시오 3세 때 교황의 경당 사제들로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더욱 간결하고 실천적인 전례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로마 교황청 사용에 따른’(secundum usum romanae curiae) 미사경본(Missale; Pontificale Curiae Romanae)과 간이 성무일도서(Breviarium)를 마련하여, 우선 내부에서 사용하고 난 다음, 여행 설교가들이 그들 사도적 활동 중에 교황청의 전례서들을 도처에 가져갔으며, 이렇게 그들은 전 서방에 로마 전례의 전령이 된다. 전례의 통합적인 방향의 범위 안에 굴리엘모 두란(Gullielmus Durandus)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로마 출신의 굴리엘모 두란은 1285년에 불란서 망드(Mende)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8세기에 알퀴노(Alcuinus)가 했던 전례 활동과 유사한 활동을 구체화하였다. 그는 새로운 ‘주교 예식서’(Pontificale)를 편집하였다. 이를 ‘굴리엘모 두란의 주교 예식서’(Pontificale Gullielmi Durandi)라 일컫는다.

여기에는 로마 사용의 예식들과 함께, 그들 프랑코-게르만 문화의 감정에 더욱 유사한 다른 예식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주교 예식서는 처음 망드의 주교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었으나, 많은 다른 주교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호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예식서는, “광범위하고 친밀한 구성으로 인해 가톨릭적인”, 그래서 더욱 보편적인 특성의 로마 지역 교회에 덜 연결된 전례를 소개하고 있다. 굴리엘모 두란 주교는 자신의 주교 예식서 이전에, ‘거룩한 직무들의 이론’(Rationale divinorum officiorum)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3세기 마지막 시기의 ‘전례 총합’(Summa liturgica)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구 인쇄술의 발명(1436-1440)으로 전례 고정에 일정한 요인이 된다. 앞선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전적으로 일치하는 두개의 수사본을 찾기가 힘들었다면, 인쇄로 인해 다양한 텍스트와 예식이 점차 사라지면서 한 교회의 지역 내부에 있어 어떤 일치(통일)에 도달하게 되며, 뜨렌또 공의회(1545) 이래로 정확하고 보편적으로 사용 가능한 전례 양식의 ‘문헌화’(codificatio)에 적합한 객관적 상황을 마련하게 된다.

2) 설교와 전례

초세기에 예식 중 설교는 주교(episcopus)의 주된 임무들 중의 한가지였다. 뜨렌또 공의회 1203-1207조는 설교의 의무규정을 언급하고 있다.
몇몇 지역에서는 사제(presbyter)들도 설교할 수 있었으나, 이 실천을 다른 교회들이 허용하지는 않았다. 전례 설교는 모든 주일과 축일들에 의무였다. 하지만 실천이 항상 이 규범과 일치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역사 학자 소쪼메노(Sozomenus, 5세기 중엽)는, 자기가 살던 시대에 로마에서 설교하지 않았음을 덧붙여 증언하고 있다. Historia Ecclesiae VII, 19: PG 67,1478. “In eadem urbe, nec episcopus, nec alius quisquam in ecclesia populum docet”. 같은 로마에서 유래하는 ‘로마 예식서’(Ordines Romani)가 전적으로 강론이나 설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레오 대교황과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설교들은, 설교 활동이 전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중세 초기에 도처에서 설교의 감소를 찾아 볼 수 있다. 갈리아에서는 아를르의 체사리오의 요청에 대하여 배종(Vaison)의 공의회(529)는 사제들에게 도시(로마)와 어디서든지 설교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Vita Caesarii I, 54: MGH III, 478s. “Hoc etiam pro aedificatione omnium ecclesiarum et pro utilitate totius populi nobis placuit ut non solum in civitativus sed etiam in omnibus parochiis verbum faciendi daremus presbyteris potestatem: ita ut si presbyter, aliqua infirmitate prohibente, per seipsum non potuerit praedicare, sanctorum patrum homiliae a diaconibus recitentur”: 이상의 내용은 Concilium Vasense, can. 709의 2: J.D. Mansi, vol.8, col.727.

병이나 다른 이유로 사제들이 설교를 할 수 없다면, 부제들이 회중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거룩한 교부들의 강론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카롤링 시대 개혁의 교회회의(813)는 강론 텍스트의 번역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in rusticam Romanam linguam aut Theotiscam, quo facilius cuncti possint intelligere quae dicuntur”: Concilium Turonense III, can. 17: J.D. Mansi, vol.8, col.727.

그런 목적으로 강론의 다양한 수집이 조성되었으며, 수도원의 가대(chorus)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수집되었다. 당대 사제들의 준비에 있어 문화적 수준은 열악하였다. 이렇게 단순한 모양으로 그리고 매우 규칙적으로, 지방을 포함하여 여러 교회들에서, ‘신경’과 ‘주의 기도’의 근본 진리를 항상 교리 기초로 하여, 전례 설교가 실행되어야 했다.

12세기 마지막 10여 년은 베드로 발도(Petrus Valdus)의 운동과 조금 뒤의 ‘탁발 수도회’(Ordo mendicans)의 출현 같은 다양한 운동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전례 중 설교를 제외하고, 최소한 회중에게 하는 설교에 관해서 만큼은 새로운 개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미사 안에 위치하지 않는 하나의 설교였다. 이러한 무관심은, 설교대(pulpitum)가 주례자 사제석에서 주랑으로 이동하는데 반영되었다. 건축적 차원에서, 참석자들의 머리 위로 설교대를 들어 높인 것은, 빈번히 인상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중세의 설교가 높은 웅변의 소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성직자들의 가장 멋있고 훌륭한 설교는 대중들을 끌었으며, 본당 신부들의 호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탁발 수도회의 새 교회에 신자들이 무리를 짓곤 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은 본당 밖에서 주일 의무를 완수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였으며, 본당 신부들과 이 수사들 사이에 가시 돋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길게 지속되었으며, 단지 뜨렌또 공의회 이후에 종결짓게 된다.

13세기 교회 학문의 절정 이후 신학의 퇴보는 설교의 쇠퇴와 일치한다. 전에는 강론과 설교의 생명력을 보증하였던 근본적인 가치들이었으나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이 생명력은 거행하는 전례를 동반하는 내적 결속이며, 거룩한 텍스트의 영감이며, 단순성에 의한 염려인 것이다. 강론(강좌)란 항상 더욱 길어지고 호화스러워진다. 전례 주년의 주일이나 축일의 전례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대신하여, 대림절이나 사순절의 강론을 조직하게 된다. 여기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며, 예컨대, 일곱 개의 성사가 있듯이, 그 틀에 맞춰 일곱 개의 주된 죄(罪)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사색적인 종류의 문제들까지 취급하였다. 사색적인 종류는, 예컨대 ‘육화의 동기들은 무엇인가’ 같은 것을 취급하였다.
그래서 그 내용은 신학적 내용과 비슷한 것이 되어 버린다.
중세 후기에 모든 양상에 있어, 탁발 수도회의 영향과 자극으로 의심할 바 없이 설교가 많아진다. 미사 전이나 미사 중에 하는 설교는 로마에서나 지방에서나 공통적인 규칙이었다. 설교 전후로 다음 주간 축제들을 선포하고 은인들(죽은 이와 산 이 모두)의 이름을 읽었다. 어떤 곳에서는 강론(강좌) 다음에 사죄경을 포함한 일반 고백을 하기도 하였다.

3) 새로운 성체 신심

12세기말에 성체성사를 지향하는 하나의 새로운 태도가 들어오게 된다. 이 시대의 성찬례는 성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성찬례 음식을 받지 않았으며, 신자들은 엄숙한 성사를 멀리서 찬미하고 관상하고 공경하였다.
신자들의 영성체 횟수, 이것의 역사적 높낮이, 그리고 이 실천의 발전 안에 대비되는 신학적 동기들 등은, 전례 역사에 있어 대단한 관심의 주제를 일으킨다. 옛날 4세기말에, 모든 성찬 거행에서 영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관습이었다. 실재로, 신자들의 영성체는 오히려 성찬례의 거행보다 더 빈번하였다.

하지만 이미 5세기에 몇몇 지역에서 영성체 횟수가 분명하게 감소하였다. 동방 교회의 희랍인들 가운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주제를 암시하는 것 이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다. 성찬례의 성사에 있어, 신학적 기질에 따라, 그리스도론적 선택에 따라, 사목적 정황에 따라, 또한 각 저자의 개인적 위치에 따라, 효과있는 가치를 마태 26,28(...내 계약의 피로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의 노선에 따라 ‘죄의 용서’를 강조하거나, 또는 1고린 11,27-34(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몸과 피를 받으면 죄인이 될 것...)의 노선에 따라 거룩한 식탁의 참여로 요청되는 ‘정화의 조건’을 주장하거나 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성 아오스딩 등의 텍스트를 대조함으로써 이렇게 서로 다른 태도들을 함께 비교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갈리아에서 악드(Agde)의 공의회(506)는, 가톨릭인으로 고려되지 않는 처벌(신자에서 제외)과 함께, 최소로 일년에 세 번(성탄, 부활, 성령강림)은 영성체하기를 주장하였다. J.D. Mansi, vol.8, col.327: “Saeculares, qui Natale Domini, Pasca et pentecostem non communicaverint, catholici non credantur, nec inter catholicos habeantur.”

카롤링 시대의 개혁은 모든 주일 집회에서 영성체하는 것을 복구하기를 시도하였지만, 그 결실들은 부족하였다. 아마도 9세기에 신자들은 대개 한해에 한번(부활 때) 영성체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한해에 한 번 하는 부활 영성체는 라떼란 공의회(1215)에서 규정된다.
이 실천(영성체)의 감소에 대한 가능한 동기들은, 당대의 그리스도교 정신의 미온이나 부족 안에서 단순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열성적인 수도원 안에서도 영성체 횟수는 신자들의 것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서방에서든 동방에서든 아리아니즘 사상을 반대하는 투쟁이, 아마도 그 결과로 그리스도에 대해 하느님(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한가지 차원의 공경심을 가졌고, 오히려 그분의 인간성과 중개자의 역할을 희미하게 방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양상으로 신성한 위엄과 죄많은 인간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습관적으로 성찬례에 대해 ‘두려움의 신비’(mysterium tremendum)라 한 것처럼 ‘떨리는 식탁’(mensa terribilis)으로 언급하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대단한 경외심의 무게는 전체 중세기 영성의 고유한 것으로, 이는 성찬례의 영성체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정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10세기 경에 벌써, 먼저 고백하지 않고 거룩한 성사(영성체)를 받았던 것을 인정하는 양심 시험의 양식들이 출현한다. 융만은, 적은 횟수의 영성체에 기여한 다양한 동기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새롭게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초기 중세에 도입된 새로운 참회 교육이 ‘심령 영성체’(communio spiritalis), 회중을 대표(대리)하는 사제의 영성체, 성찬 단식의 실행 등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례 영성체 실천이 심하게 감소한 반면, 그리스도교 백성 가운데,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쳐다보고 관상하며 공경하는 열망과 갈망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생겨난다. 미사의 개념은 ‘훌륭한 은총’(bona gratia), ‘하느님의 현현’(epiphania Dei)이라는 비유적 설명들로 대신하였는데, 12세기 말 축성 안에 성체 거양이 도입되었을 때 현저한 중요성을 획득하였다. 신학자들, 특히 설교가들은 영성체의 열망에 동일한 행위로 비교될 수 있을 만큼 거룩한 형식을 바라보는 열망을 장려하였다. 거룩한 성체성혈 거양의 숭고한 순간이 너무 허무하지 않도록, 이 시간을 얼마간 연장하였는데, 공동체는 주님의 성체께 노래하고 경의를 드렸다. 이 거양 예절은, ‘마침 영광송’(Per Christum)이나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다음 부분’처럼 미사의 다른 순간들에 반복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 가운데, 축성의 거룩한 순간에 주의 깊게 쳐다보도록 신자들을 초대하기 위한 경건함의 새로운 표현들이 도입되었다. 즉, 종치기, 촛불 밝히기, 그리스도의 몸 앞에 사제의 장궤, 성체를 만졌던 손가락을 붙이는 습관 등이다. 13세기에는 이것이 이 모든 예식의 절정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성체성사의 존경과 경배의 열망이 동기가 된 하나의 다른 예식이 도입되어 도처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것은 거룩한 성체성혈을 만지기 전후에 무릎꿇는 것으로, 축성에서 영성체에 이르는 미사 부분을 신비의 새로운 신성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한 것이다. 이처럼 지극히 거룩한 성체에 여러 특질들 중의 한가지가 적용되는데, 이는 궁정 예절의 사용인 빛과 향과 권좌와 금실수를 놓은 비단 등과 같은 것으로 이후에는 교회 교계를 통해 존경의 구별로 간주된다. 중세 침체기에는 거룩한 성체께 향한 존경심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사례로, 축성되지 않은 손으로 성체와 성혈을 만지는 것이 절대로 금지되었으며, 이로 인해 임종자가 성체 배령을 못하기도 하였다.

신자들은 이미 성찬례 거행에 소수가 참여하였으며, 그들은 습관적으로 축성된 성체와 멀어진 단지 구경꾼과 공경꾼들이 되었다. 성체를 백성에게 거양하고 현시하는 것은 일찍이 미사 밖에서 한가지 별도의 예식이 되어 버렸다. 성체신심 열성의 이러한 상황과 분위기에서 우르바노 4세(1261-1264) 교황은 전 교회에 ‘주님 성체’(Corpus Domini) 축일을 확대하였다(1264년). 교황 문헌에는 성체행렬에 관한 아무런 암시가 없었지만, 성체를 볼 수 있게 거리에서 장엄하게 행렬하는 습관이 금방 유행하였다. 성체 현시를 위해 유해 전시를 위해 활용하던 도구들을 사용하였다.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신자들은 주님 몸의 성체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14세기 후반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 성체 행렬은 주님 성체 축일의 예외적인 예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이 성체행렬은 연중 가장 중요한 축일들과 가장 두드러진 사건들에 성체 행렬로 표시되고 또한 현양 되었다.

4) ‘육화한 그리스도’(Christus secundum carnem), 성모와 성인들

고딕 양식이란 단지 건축 양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삶의 한가지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신앙적 차원에서는 새로운 감정, 점증하는 내면주의, 느낌의 양상으로 보고 체험하려는 경향, 객관적 요소들과 대조되는 주관적 차원의 수용,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것으로 인한 열렬한 사랑 등, 고딕 양식의 삶은 이런 것들을 보여 준다. 이 모든 특성들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 방향 지워진 신심의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되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성인들에 대한 신심, 특히 주님의 인간적 삶과의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들이 한 몫을 차지한다.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위격’(Persona Christi)이었다. 하지만 중세기에 영광받으신 그리스도의 형상은 부차적인 것으로 머물렀으며, 삼위이신 하느님의 위엄 안에 잠겨 버렸다. ‘영적인 그리스도’(Christus pneumaticus)는 신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어떤 양상으로는 사라졌으며, ‘육화하신 그리스도’(Christus secundum carnem)가 특권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것을 간단한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앞선 일천 년대는 빠스카의 주제가 두드러졌던 반면, 뒤의 이천 년대는 성탄의 주제가 분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가지 경우에서 그리스도는 항상 중심이지만, 전자는 영광받으신 그분의 몸과 함께 하느님의 생명에로 되돌아오심 가운데 그리스도를 관망하고, 후자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 다시 오심과 그분의 수난과 죽음 가운데 그분을 관조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중세에, 옛 그리스도교에서 발생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신앙 생활의 선호하는 화제가 되었으며, 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 인해 신성은 그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신심은 중세에 한가지 커다란 새로운 것을 만들게 되지만, 표현은 다소간 부정확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중세에 신앙의 언어 가운데 결코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이는 ‘관용적 통교’(communicatio idiomatum)를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며, 반면 교회 교부들 영성의 세계에서 인간성은 참으로 첫 자리에 위치하였다.

사실 당대 예술에 의해서도 분명해지듯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중세 신앙 생활 가운데 선호되던 내용이었으며, 그 관심은 거의 배타적으로 예수 지상 생애의 시작과 끝 부분에 향하게 된다. 중세에, 예수의 공적 생활의 장면(기적 등)들은 그분 탄생과 수난에 대한 설명에서 상당히 덜 중요한 역할에 해당된다. 의심할 바 없이, 같은 전례 생활은 축제로 인해 가장 잘 의미하는 묘사와 주제의 선택에서 선별 원칙으로 작용해야 했다. 그러므로 탄생과 수난은 그리스도 인간성을 통한 중세기 신심의 근본 두가지 핵심인 것이다. 13세기초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게서 이 시대의 특출한 상징적 인물을 찾아 다. 그는 ‘구유’를 처음 마련하였으며, 수난의 표식(오상)을 받았다. 역사학자 델라루엘레(E. Delaruelle)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 의해 구상된 구유 또는 예수 탄생의 우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육화 안에서 신학적 신앙은 생기 있는 상상력에 결합되었다. 프란치스꼬는 복음의 풍경을 ‘보았으며’, 동시에 신비를 나타내 보이는 ‘유사전례’(para-liturgia)를 구성하였다... 사실, 그것을 희랍 교부들이 정의하였듯이, 육화의 신비는 대중에게 너무나 고상한 것이었다. 반면, 프란치스꼬는 공경의 대상으로 뿐 아니라 애정의 대상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한 아기를 그들에게 제시하였다. 중세 사회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갖지 못했다. 복음을 통하여 프란치스꼬는 이를 발견하였는데, 동시에 단지 공경만이 아니라 인간적 전 감정을 수용하는 종교적 느낌(감각)에로 초대하였다.” 하지만, 예수 탄생의 주제는 중세에서 주님 수난의 주제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가능한 더욱 실재적인 모양으로 수난의 역사적 과정(진행)을 나타내려 한 것이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을 골랐던 것이다.

성탄 신비의 거행에 주어진 추진력은,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존경심의 지속적인 증대를 가져왔다. 클뤼니(Cluny) 수도원 개혁의 특수성은 성모께 대한 두드러진 공경이었다. 12세기 십자가의 신비가인 끼아라발레(Chiaravalle)의 베르나르도는 동정 마리아의 위대한 ‘익살광대’(juglar) 중세에 성주들의 궁정 뜰에서 재주를 부리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시를 읊던 일종의 광대를 가리킨다.
였다. 그에게서 마리아의 주제는 항상 중세의 시(詩)와 예술과 대중 신심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성모는 성자 없이 결코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동정녀에 관한 주제는 항상 그리스도의 위격(Persona Christi)과 관련되어 섬기는 것으로 소개되며, 긴밀한 연결로는 예수 생애의 신비들과, 특히 예수의 유아기와 관련된다.

중세의 마리아 공경에서 두가지 근거를 지적할 수 있다. 즉, 교회의 공적 전례와, 신자들과 성인들의 사적 열성이 그것이다. 11세기에 마리아 공경은 거의 전체적으로 전례와 일치한다. 그 이후 13세기 이후, 아직 이 두가지 근거가 남아 있었지만, 대중 신심의 흐름은 언제나 대부분 독자적인 것(autonomia)이 된다. 이 시대에 ‘성모송’(Ave Maria)은, 특히 앞부분은 복음 말씀에서 따온 것이고 이미 옛 시대에 마리아 송가(antiphona mariana)로 알려져 있던 것이 계속 덧붙여져 오늘날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성모 찬송가 ‘여왕이시며’(Salve Regina)는 12세기에 구성된 것인데, 프란치스칸들의 업적으로 13세기에 최고로 빨리 확산되었다. ‘삼종기도’(Angelus) 때에 성당 종을 울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석양 기도 때,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은 저녁 삼종기도의 평화스런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이후 아침과 정오에 울리게 되었다. 성모의 성전 봉헌(주의 봉헌), 성모 엘리사벳 방문과 같은 성모 축일들이 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항상 더욱 주목하는 그리스도론의 발전 가운데, 12세기 전체를 통해서 성모 공경의 대부분 중요한 것을 얻게 되며, 성모의 인간적 모성(어머니이심)으로 인해, 고통의 참여, 고뇌의 참여, 희망의 참여, 한 어머니의 비극에 참여 등으로 고려되었다. 반면, 이태리의 위대한 종교시인들 중의 하나인 또디(Todi)의 야코뽀네(Jacopone)는 지식인들과 교회 노래를 위해 작곡한 ‘고통의 어머니’(Stabat Mater)를 작곡하였는데, 이것은 앞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성모 공경과 함께 중세는 대단한 열성으로 성인 공경에도 전념하였다. 성모와 성인 공경은 하느님께 향한 교량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모양으로는 그리스도론적 주제의 발전으로 인해 방치된 빈 공간을 채워 주었다. 초기 중세에 사람들에게 성인들의 이름을 부여하는 관습이 시작되었으며, 이 성인들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수호자로 공경되었다. 하지만 이 성인 공경을 예외적으로 대중화한 것은 노동조합들이었다. 사실 14-15세기의 장인(工人)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였으며, 각 조합은 자신의 고유한 수호성인을 모시고 있었다. 그 성인들은 순교록의 설명이나, 또는 빈번히 성서 외적인 설명을 바탕으로 선택된 이름들이었다. 중세 말기에 반쯤은 코믹한 형태로, 동정 마리아의 공경과 반대되는 존경받지 못했던 성 요셉에게 봉헌한 ‘노동 환경’은 신기하게 보인다.

12세기에 성인 축일들은 계속 증가 중에 있었으며, 주교좌의 전례력은 그 교구에 있어서는 규범적이었다. 모든 대성전(Basilica)에는 공공으로 드러낸 ‘축일표’(tabula)가 있었으며, 또한 여기에는 보존하고 있는 유해와 인정된 대사(indulgentia)를 가리켜 주고 있다. 더욱 중요한 조합들의 수호성인인, 가장 대중적인 성인들을 공경하기 위해 하나의 교회를 짓거나 또는 최소한 한 개의 제대를 설치하였다. 성인 공경에 이 모든 추진력은 교회 봉헌에 그 영향력을 느끼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의 영상(이미지)은 자기의 자리를 유지하였지만, 높은 곳에 하나의 성화로 내버려둔 그림처럼, 또는 촛불들 사이에 위치하는 십자가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반면 성인의 영상은 주제대를, 그리고 드디어 성당 측면의 수많은 경당 제대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성인에 대한 헌신적 호의로 성인에 속하는 역할에 대해, 한가지 발전을 확인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초기 중세에 성인은, 자신의 전기와 함께 한가지의 장려 사항과 한가지 모범을 설정하였으며, 성인의 기적들은 ‘만병통치’와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인들은 ‘전문화’(specializatio)로 정의할 수 있는 한 과정에 들어가 버린다. 수호 성인으로서 전문성을 띤 대표적인 것들로, 파도바(Padova)의 성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잃은 자들의 성인’, 성녀 세실리아는 ‘음악의 성인’, 성 크리스토폴은 ‘여행의 성인’, 성 미카엘 천사는 ‘전쟁의 수호천사’, 성 요셉은 ‘노동자의 성인’ 등으로 불리운다.
후기 중세에는 각 성인마다 성인에 대한 헌신적 호의로 하느님과 가까운 섭리의 일정한 형태를 표시하였으며, 또는 활동력이나 사회 그룹이나 한 도시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보호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5) ‘중세 침체기’의 전례

성인 공경의 확대로 전례주년의 한해가 성인들의 축일로 채워지고, 전례시기에 따른 전례축일들을 제대로 기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413년, 빠리의 스승인 끌라망즈(Clamanges)의 니꼴라(Nicola)는 ‘설립되지 말아야 하는 새로운 축일들에 대해서’(De novis festivitatibus non instituendis)라는 작품을 출간하였다. 콘스탄짜(Constantia)의 공의회(1414-1418)에서 아이이(Ailly)의 베드로는, 무질서하고 소멸되지 않는 의무 축일의 감소를 제안하였다. 이 주제에 관한 공의회 토론 동안, 밖에서는 축제의 과다한 숫자 때문에 일일 노동자들의 고뇌스러운 경제적 손해도 생겨났다. 공의회 이후 요한 제르송(1363-1429)은 이 주제를 돌이키며, 수많은 축제들에서 유래하는 악습과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불이익을 상기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의 축일과 정말 중요한 다른 몇개의 축일로 한정하도록 제안하였다.

이것이, 중세의 마지막 국면이 쇠퇴하고 불안한 상황의 관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더욱 염려되는 것은 ‘미사의 결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다. 미사에서 설교의 근본 주제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한 유익의 관점이 되었으며, 미사에서 유래하는 결실들을, 또한 단지 거기에 참석함으로써도, 많게 하는 것이었다. 이 ‘미사의 결실’은 중세 침체기의 설교와 신심가의 문학의 분위기에서 언제나 더욱 물질적인(materiale) 묘사를 그리게 되었다. 30대의 그레고리오 미사처럼, 한묶음의 일정한 기원미사(Missa votiva)를 늘려 편성함으로써, 열망했던 ‘결실’ 또는 영혼의 구원을 분명한 효과로 얻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편법은 성직자의 손에 달렸으며, 회중은 기원미사를 거행하고 참여하도록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미사는 규칙 없이 늘어났으며 ‘제대의 사람’(altarista)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이 무산 계급의 성직자(altarista)는, 실천적으로 제대의 시간표(축일표)에 따라 사는 이들이었는데, 미사에 대한 이 이상하고 일관성 없는 의식의 결과를 더 보태었다. 사적이고 주관적인 이 경향은 전례주년으로부터 제외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들은 매일 기원미사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남용의 도입은 교회 내부 자체에 경고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현 상황을 비판하고 적절한 대책을 지적하였다. 이미 12세기에 베드로 깐똘(P. Cantor)이, “적은 교회, 더 적은 제대, 적은 사제,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선별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간결한 미사’(missa sicca), ‘두겹, 세겹의 미사’(missa bifaciata, trifaciata), ‘한번의 성찬례에 두벌짜리 미사 거행’(sub uno canone duas missas celebrare)과 같은 당대의 다양한 남용의 열거를 든 다음, 베드로 깐똘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언급하고 있다: “Ad hunc morbum multiplicem ab Ecclesia expellendum unicum hoc credo esse remedium, videlicet, si esset paucitas ecclesiarum, paucitas in eisdem altarium, paucitas et delectus ordinandorum, delectus etiam ordinatorum et admittendorum; insuper delectus maxime praepositorum minorum sacerdotum...”: Verbum abbreviatum 29(contra missas multarum facierum) : PL 205, 106.

조금 나중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수도원 전체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주님 안에서 경고하고 권고합니다. 형제들이 기거하는 곳에서는, 성교회의 예식에 따라 하루에 단 한번의 미사가 거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한 장소에 다른 사제가 있다면, 애덕의 사랑으로 인해 한 사람은 다른 사제가 거행하는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 제르송은, 설교가들이 그 과장된 미사의 ‘결실’을 약속하고, 그렇게 백성들을 맹신과 유대 사상(기복적 경향과 10일조 등)에로 밀어붙이는 것을 비난하였다. 쿠사(Cusa)의 니꼴로(Nicolò, 1401-1464)는, 자기 교구의 전 미사경본이 마땅히 시험된 사례들로 조화 있게 수정되기를 강력하게 명령하였다. 하지만 항상 어디서나 이런 전망과 이런 비판적 능력을 가진 모습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남용의 확대가 지속되었다. 전례적 쇠퇴의 그런 상황은, 변호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개혁가들의 가혹한 항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학문의 신학과 성찬례에 대한 고심(노작)은 설교와 백성의 종교심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런 노력들은, 실천에 있어 깊이도 분명함도 북돋우지 못하였으며, 수많은 이탈을 바로 잡지도 못하였다. 다른 한편 15세기에 고유한 것으로 소위 ‘근대적 신심’(devotio moderna)이라 일컫는 맹렬한 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심리적 실리주의로, 화려하고 영웅적인 행동들에 대한 의문점을 갖고서, 진지하고 견실하고 지혜롭게 온화한 사랑으로 특징되는 것인데, 소리내는 기도와 전례적 행위에 대한 것보다 마음의 내적인 기도에 대해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 영성생활을 시작한 이는 제라르도 그루트(Gerardo Groote)이며, 켐피스(Kempis)의 토마스에 의해 그의 그 유명한 저서 ‘준주성범’(Imitatio Christi)이 절정에 달했다. 이 생활의 스승들은 당대 쇠퇴하던 교회 학문의 ‘주지주의’(intellec- tualismus)를 거부하였고 내적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정작 이 반응도 자체로 개선하여, 신학과 영성생활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데 기여하게 된다. 주지주의와 내적 생명의 분리가 이후 수세기를 통해 서방 교회의 영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3. 성사 신학

11-12세기는 성사 신학의 작업 완성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때였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주로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합으로 사고의 적절한 사조를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기들의 첫 수확은 성사 신학에서 ①기술적 (전문)어휘의 창조 또는 정착을 언급할 수 있다. 몇몇의 단어들은, ‘불가견적 은총의 가견적 표징’(signum visibile gratiae invisibilis)이라는 성사의 정의(定意) 처럼 아오스딩의 어휘들에서 취급된 것으로, 이는 성사의 ‘형상’(forma)과 ‘능력’(virtus)의, ‘표징’(signum)과 ‘실재’(res)의 근본적인 구별, 다시 말하면 성사적 효과를 설명하는 첫 의도들이었다.

반면, 다른 단어들은 성사적 언어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며, 신학적 사고에 아리스토텔레스적 범주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를 들면, 성사 예식의 요소들을 묘사하기 위해 ‘형상과 질료’(forma et materia), 성사에 대한 동일한 정의에서 베드로 롬바르도(Lombardo)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 ‘원인’(causa)이란 어휘 등을 들 수 있다. 같은 시대에, 다양한 논쟁의 결과로서, 베렌가리오의 특별한 것으로 성체 신학에서 ‘본질’(substantia)과 ‘본질적 현존’(praesentia substantialis)이란 어휘들이 일반화되며, 이 어휘들은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라는 말의 형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인효성’(opus operantis)과 ‘사효성’(opus operatum)의 구별도 이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신학적 언어의 고정을 넘어서서, 근본적인 두 번째 획득처럼 11-12세기에는 ②성사 신학의 체계화를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에 완전한 첫 ‘신학적 종합’(summa)과 함께 성사들에 관한 체계적인 한 저작물도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일반적 서술들에서 결정적인 자리를 일찍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체계적인 성사 신학의 작업은 쉽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신학적 재발견의 분위기에서 최소한 성사적 종합의 다른 두가지 형태를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성 빅토르 후고(Hugo S. Victoris)의 것으로 사목적 염려에 더 연계되고, 둘째는 베드로 롬바르도의 것으로 사색적인 염려로 더 안내된 것이다. 또한 성 토마스에 의해 성사신학 분야는 종합을 이루며, 토미즘(Thomismus)은 오늘날까지 교의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1) 성 빅토르 후고(1096-1141)

빅토르 후고의 주요 저서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사론’(De saccramentis christianae fidei)에서 성사는 전 구원 경륜의 커다란 개괄의 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때때로 창조에서부터 육화에 이르는,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섭리는 성사의 열쇠로 숙고된다. 성사는 구원의 경륜의 세가지 단계 안에 현재하지만, 새 계약의 성사들은 옛 계약의 성사들과 자연 상태의 성사들의 뒤를 잇는다. 그에 의하면, 성사는 무엇보다 먼저 죄인인 인간의 ‘치료’(remedium)이다. 성사 행위를 수단으로 하는 하느님의 교육적 행위는 세 가지 관점에서 발전한다. 즉, ‘인간의 겸손과 교육과 실천’(ad humiliationem, ad eruditionem, ad exercitationem hominis)이라는 세 단계이다.

다른 부분에서, 그는 성사의 개념에 관한 작업에 일정 모양 기여하였다. ‘거룩한 실재의 표지’(sacrae rei signum)와 같은 성사의 옛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 상당히 더욱 풍부하고 뉘앙스 있는 다른 정의를 제시하였다. 곧, ‘성사는, 불가견적이고 무형의 은총을 다른 모양으로, 육체적 또는 질료적 요소이며, 두드러진 목적의 외적인 것이며, 유사함으로 현존하고, 규정으로 의미하는 것이며, 성화로 포함하는 것’ “Sacramentum est corporale vel materiale elementum, foris sensibiliter propositum, ①ex similitudine repraesentans, et ②ex instituione significans, et ③ex sanctificatione continens aliquam invisibilem et spiritualem gratiam”: Hugus, De sacaramentis christianae fidei I, 9,2: PL 176,317. 이라 하였다.

후고의 이 정의에, 세 가지 내용이 성사의 설정으로 들어 있다. 곧, ①표지의 특성, ②그리스도의 역할에 의한 설정, ③성사 안에 ‘포함된’ 은총을 통한 성화 등이다. 이 세 번째 관점을 위해 후고는 용기의 형상을 사용한다. 곧, 성사는, 환자를 위한 약을 잔이 담고 있듯이 은총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또 세례와 성찬은 ‘으뜸가는 성사들’(sacramenta principalia)이라 말한다.

2) 베드로 롬바르도(1100-1160)

그의 ‘신학명제론’(Sententiae) 제4권에서 처음으로 성사일반에 관한취급을 찾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다른 모든 표지들, 또한 거룩한 표지들에서 성사를 구별하는 특별한 관점은 ‘효과’라는 것이다. 곧,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표지(signum)이고 불가견적 은총의 형상(forma)이며, 거기서 원인(causa)의 영상(imago)이 되는 (원인이 되는) 척도 안에서 무엇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Sacramentum enim proprie dicitur quod ita signum est gratiae Dei, et invisibilis gratiae forma, ut ipsius imaginem gerat et causa existat”: Sententia, IV, dist. I,2: PL 192,839.

롬바르도의 이 정의는 직접 전수되는데, 이는 아오스딩 사상의 노선을 지속시킨 가운데, 아오스딩의 교리에 충만한 수준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양상으로, 성사와 다른 거룩한 거행들 사이의 명백한 구별을 내세우기 위한 열쇠가 찾아지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결과는, 12세기 중엽 커다란 논쟁들이 있은 다음 일곱 성사에 대한 관념이 굳어지게 된다.

롬바르도에 의해 획득된 체계성으로 성사의 개념은, 주요 성사와 으뜸 성사로서 세례와 성찬의 모델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다른 성사들에도 적용되게 된다. 이후 이어지는 업적에서 연구한 세 가지 중요점을 밝혀 낸다. 곧, ①성사의 감각적 설정 요소, 이 측면은 성사들의 질료(materia)와 형상(forma)의 교리를 연구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②모든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의향에서 유래하는 상징적 또는 성사적 요소, 이것은 그리스도의 역할에 의한 성사들의 설정에 관한 다양한 신학적 설명을 하는 데에 자리를 만들어 준다. ③의미하는 실재(res)와 산출된 은총과 함께 외적 표징의 관계, 이는 이 시대부터, 여기서 성사의 인과관계(causalitas)와 이것을 지각하는 다양한 형태를 찾아본다.

3)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후고와 롬바르도의 사상들은 가장 큰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며, 이 신학자들은 뜨렌또 공의회까지 연결된다. 또한 성사 신학의 영역에서도 성 토마스의 종합에, 곧 그의 넓고 깊은 사상에, 또 그의 많은 추종자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몇가지 근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강조하는 능력에, 특별한 중요성을 미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말로 성사에 관헤 다루고 있다: “육화하신 말씀의 신비에 관련되는 의문들을 고려한 다음, 같은 육화하신 말씀에 의해 효과를 받는 교회의 성사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Summa theologica, III, q.60. 그러므로 성사는 그리스도 신비의 연장인 것이며, 이는 “어떤 모양으로는 성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그리스도 수난의 품격(virtus)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Summa theologica, III, q.61, art.1-3.

‘일반적으로 성사는 표징으로 드러난다’(Sacramentum ponitur in genere signi) Summa theologica, III, q.60, art.1.
는 표현은, 성사의 인과관계 또는 효과를 말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후기 해석가들이 이 차원을 잊어버릴 경향이 있기 때문에, 본래의 토미즘 종합에서 표시되어야 할 한가지 다른 관점인 것이다. 성 토마스는 성사의 의미에 관한 이 세 가지 관점을 주목하도록 하였다. 이 세 가지는, 곧 “①그리스도 수난이 발생한 기념적 표징, ②그분 수난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실재적으로 생겨나는, 은총의 현실적 표징, ③미래 영광의 선포와 보증” Summa theologica, III, q.60, art.3.
등이다.

Y. 꽁가르가 표명하였듯이, 스콜라 학문에서 성사에 관해 다루어 연구되었던 역사적 조건들은 위험과 한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 관한 비판적 관점들은 다음을 들 수 있다. ①스콜라 학문은, 특히 성 토마스에게 있어서, 성사의 질서에 그리스도론적 기초를 놓았다. 하지만 영적 학문에 대한 충분한 숙고없이, 과도하게 그리스도론적 전망을 키웠다. ②‘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us)을 넘어서, 교회론에 관한 것이 ‘없다’(deficit). 스콜라적 종합에 있어, 실상 성사를 취급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다룬 것이며, 성사와 그리스도간의 연결 교량을 맡은 교회에 관한 취급은 제외되었다. 지역 공동체에 관한 신학이 부족하며, 성사는 ‘개인주의’(individualismus)와 ‘사유화’(privatizatio)의 활동 영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즉, ‘성사’는 한 직무자로부터 믿는 이 한사람에게로 관리된 것이다. 개인의 감화를, 그리고 개인적 구원을 위한 호혜(이익)를 주장한다. ③스콜라 신학은, 그들 의문 요인들의 해체로, 형상적 관점들의 구별로, 정의와 규정의 열망으로 특징 된다. 하지만, 더욱 종합적인 풍부한 전망을 붙들지 못하는 위험과, 분석하고 구별하려는 애착으로 인해 내용을 빈곤하게 만드는 위험이 흐른다. ④마지막으로,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설명하지 않고 살았으며, 오직 그리스도교 공동체 앞에 위치하는 외형적인 하나의 실재로서 있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성사에 관한 취급은 이러한 짜임새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와 세상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세상의 성사로서 교회의 주제를 분명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이런 맥락에서 연구한 성사적 확인들로 ‘교회-세상’은 서로 다른 좌표로 옮겨진 것이 드러났으며,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시대착오와 평범함에로 떨어지는 고심 아래 살고 있는 서로(교회와 세상)의 위치들도 같은 처지로서, 근본적인 재착수가 필요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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