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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역사-06] : 뜨렌또 공의회에서 전례 운동까지(1545-1909)
1. 일반적인 배경
종교분열의 시대상황과 교회의 반응
개신교의 종교 분열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을 언급할 수 있다. 한편으로, ①14-15세기 교회의 부족한 개혁 또는 최소한 충분하게 시기 적절하지 않은 개혁에 대한 혁신적인 반응으로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세의 침체기는 개신교 종교 분열의 역사적 기초가 되는 조건을 설정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또한 다른 관점이 있다. 곧, ②종교 분열은 1500년대에 완수되는 커다란 사건들, 즉 미대륙의 발견, 인쇄술의 발명 등과 같은 커다란 사건들에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의 탄생, 곧 ‘근대’로 규정된다. 모든 경우에 있어 종교 분열은, 그 자체에서나 하부구조에 있어 예외적으로 복잡한 사회적 사건이었다. ①영성적 쇄신의 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②정치적이고 ③경제적인 현상이기도 하였다. 총체적 그 구조에 있어, 중세를 지탱하였던 근본적인 전제조건들의 분해로 인해 준비된 사건이었다.
교회 개혁의 한계
다른 한편으로, 콘스탄짜(Constantia)와 바젤(Basel) 공의회이래 보편 공의회의 요구가 많이 감지되고 있었다. 내부 개혁의 많은 지향들이 완성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전 교회의 개혁에 도달하기 위한 창조적이고 변화시키는 충분한 힘을 갖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뜨렌또(Trento) 공의회에서 많은 노력들의 주된 목표는 교회의 똑같은 상황으로 인해 미리 한정되어 버렸다. 곧, 두가지의 한정된 근본적인 문제가 직면하여 드러난 것이다. 하나는 내적 문제들의 예외적인 중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분열이었다. 더 나아가 당대의 일반적인 처지와 상응하여, 공의회는 여러 나라의 정치적 책략들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밑바닥에 머물렀다. 또 황제, 스페인, 불란서, 독일의 내부 긴장관계의 프로테스탄트, ‘교황청의 정책’ 등의, 상반되는 이해관계들이 만나는 하나의 정치적 형국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신학적 혼란, 공의회주의 이론들로 다시금 표면화되는 교황재위의 우려, 고유법을 한정된 것으로 보는 교황청의 염려 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뜨렌또 공의회, 가톨릭 옹호를 위한 조치
몇 가지 예비조사가 있은 다음, 교리적 문제들이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의문으로 제시된 내부 개혁의 분야인지를 동시에 토론하기를 공의회는 결정하였다. 뜨렌또는 ‘신앙의 근거’(sola Scriptura)와 ‘구원의 과정’(solus Deus, sola fides)과 교회의 영성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 개념과의 관계에서 개혁가들 교리의 일방적이고 축소를 주장하는 관점들을 밝혀 냄으로써, 비가톨릭적 교리로부터 가톨릭 진리를 인식할 의무를 근본적인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하지만 공의회의 결정과 단죄들과 함께 뜨렌또 공의회의 교부들은, 특히 제3시기(1562-1563)에서, 교회 내부의 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을 연구하였는데, 성직록의 체계를 고치고 신학교를 통해 성직을 새롭게 설정하고 목자인 주교가 자신의 공동체 안에 현재하고 주재하는 이미지를 두드러지도록 작업하였다. 성사들과 전례의 주제가, 실천적 관점이든 교리적 관점이든 공의회 작업 중 중요한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바로크 사상에의 심취
17세기는 바로크 시대였다. 가톨릭의 자각은 뜨렌또 공의회로 쇄신되고 굳건하게 되었는데, 고유한 이 예술적 표현의 정신이었으며 ‘개혁 반대의 기교’로 명명되었다. 바로크의 특성들은 장엄함, 감정의 예찬, 영웅적 맹위, 자발적으로 생긴 활력으로 나타나는 승리와 개선의 감격 등이다. 바로크는 의심할 바 없이, 신앙과 교회를 구원하였다는 생각과 진리 안에 머문다는 행복감의 자각을 구체화하였다. 이때에는, 모든 것으로 생각되고 종교적 요인으로 가득 채워졌던 그리스도교 유럽의 마지막 시대였다. 근본적으로 축제 문화는,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위한 열성을 표현하였으며, 여기서 신비적이고 또한 명백하게 규정될 수 있는 신심을 호흡하였다.
계몽주의, 교회 가르침에 도전
이 17세기 말경에 유럽인들 의식 가운데 일련의 위기가 주목되는데, 계몽주의 시대에로 문을 열게 된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의무의 사상’을 기초로 한 문명의 뒤를 이어 ‘권리’를 기초로 한 문명이 연결된다. 곧 이 권리는, 개별 자각의, 이성의, 인간의, 시민의 권리들이다. 인간은, 그리고 단지 인간만이 만물의 척도이며, 자신 안에서 존재의 고유한 이성과 자신의 목적을 찾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새로운 개념은, 계시 종교에 기초한 옛 체계들, 곧 교계제도, 가르침, 질서, 권위 등을 붕괴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신권 없는 정치, 신비 없는 종교, 교의 없는 윤리 등의 미래 도시(사회)의 기초 세우기를 추구하였다. 18세기의 정신의 과학을 신뢰하였는데, 이는 자연을 지배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안녕과 행복을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손에 달린 능력과 일치한다.
그리스도교 문화 해체와 낭만주의
19세기에 교회는, 비종교적이고 반교회적인 부분이 큰 문화, 점차적으로 자립적인 것으로 되어 가는 비그리스도교 문화에 직면하게 된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 마지막 4세기간의 다양한 해체 작업이 유산으로 이어져 왔는데, 특히 계몽주의와 불란서 혁명을 들 수 있다. 교회 방면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사건들은, 1870년 교황국가의 폐지, 다양한 가톨릭 국가에서 교회 재산의 계속되는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앞선 세기의 오류들은 복구 형태의 강한 반응을 일으키는데, 교의와 초자연적인 것과 교계적 권위와 전통을 강하게 확인하는 회귀를 야기하게 된다. 이 시대는 낭만주의 시대로, 과거와 바로크와 특별한 모양으로는 중세기의 향수 어린 복구(회귀)를 띠고 있었다.
신사조들의 시대
19세기에는 자신의 기준들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게 되는데, 활력이 없고 무능한 시대로 나타나며, 그래서 앞선 시대의 모델들을 지향한다. 모방의 시대이며, 예술과 특히 건축에 있어 ‘신’(新) 스타일의 시대였다. 하지만 또한 새로운 강한 세력들을 보여주는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산업화 현상, 기술의 발달, 노동자 계급이 사회 계급으로의 부상, 사회주의 운동 등이다.
교회, 시대 사조에 효과적 대처 미흡
교회는, 제도적 차원에서, 앞 시대에서 가졌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화합하는 그 힘의 표지들을 더 이상 주지 못하였다. 마치 고립적이고 자기 방어적이 되며, 불현듯 나타난 이 세력들과의 접촉이 전체로 부정적이었다. 그 결과는 교회와 근세 사회와의 분열, 노동자 계급의 이탈, 과학과 노동과 문화의 세계에서 또 교회 내부 자체에서도 교계 제도의 계층과 매우 열심한 신자들 사이에 항상 더 큰 분리 등이었다. 전반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근대 사회와 교회의 대화를 재설정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기다릴 필요가 생긴다.
2. 전례 발전의 노선들
1) 개혁가들과 예배
루터의 첫 저술들은 당대의 남용들로 인한 사목적 우려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전통의 관점을 지탱하고 있었다. ‘복음 미사’(missa evangelica)를 조직하고 ‘사적 미사’(missa privata)를 폐지하고 성체공경을 금지시킨 첫 인물들은 그의 동료 쯔빙글(Zwingl)과 카를로스타디오(Carlostadio)이다. 루터는, ‘바빌론 포로’(De captivitate babylonica, 1520)라는 책을 쓴 다음, ‘없어져야 할 사적 미사’(Abroganda missa privata, 1522)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사적 미사뿐 아니라 일반적인 미사의 희생(sacrificium)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이 저술이 근본적인 것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새로운 예배의 도입을 주저하였다. 같은 해 성탄 때, 카를로스타디오는 많은 회중과 함께 ‘독일말 미사’를 거행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성체설정문을 큰 소리로 또 독일말로 선포하였으며, 성체 설정문은 당대에 secreta부분으로서 주례 사제 혼자서 작은 소리로 외어야 했다.
거양성체를 하는 성찬의 나머지 부분을 생략하였다. 양형 영성체를 주었으며, 세속적인 옷을 입었었다. 며칠 뒤, 쯔빙글은 (성인들의) 형상을 없애고 모든 교회 내 측면경당들을 억제하기 위한 징후를 나타냈다. 루터는 카를로스타디오와 동료들의 변혁을 거슬러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본래의 이론적 원칙들로 인한 실천적 결과들을 다루는 것을 저지하였던 동기들은 다음의 것들을 열거할 수 있다. 즉, ①표지와 영상의 가치에 대한 유명론적 경시, ②의식에 대한 가장 무력한 우유법(alegoria), 라틴어의 문화적 가치에 의한 인본주의자와 교육자로서 고려, ③외견상의 모방에 빠지지 않고 모국어에 결합된 창조성과 말과 음악의 열망 등이다. 하지만 실상, 루터에 의해 공동체에 양도된 자유와, 의무적 형태에 의한 그의 인내는 전례적 표현의 무정부적 번식을 야기하였다. 1525년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본당 교회에서 처음으로 미사 전 부분을 독일말로 거행하였는데, 이어 인쇄로 출판되었으며 도처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생각은, 이 ‘독일말 미사’가 ‘복음 예배’의 유일한 형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개혁이 아직) 시작 단계였기 때문에 루터의 1523년 ‘미사 양식’(formula missae)에서 라틴어는 건재하게 남아 있게 된다.
루터의 미사 양식의 순서(통상문)는 로마 미사를 흉내낸 것이며, 당대 사적 거행의 흔적을 띠고 있었다. 시편을 대신하여 대중 노래로 대치하였으며, 미사의 희생제사의 특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제한하였다. 또 감사송과 나머지 성찬 기도문들을 영성체를 받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권고로 변형시킴으로서 ‘텍스트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루터에 의해 작업된 로마 미사의 이 축소는, 성찬기도문, 주님의 기도(최소한 전통적 위치에 의해서라도), 평화의 인사, 거룩하시도다 등이 사라졌으며, 전체적으로 이질적이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 무더기의 폐허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수세기에 걸친 값진 유산인 훌륭한 ‘성찬 기도’가 실천적으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루터는 성찬례 성사에서 바빌론의 것처럼 3가지 잘못된 것을 고발하고 있다. 곧, 양형 영성체를 금지한 것, 본질적 주체없이 비본질적인 것들의 영속하는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의 교리, 최고의 일과 희생제사로서의 미사 등을 지적하였다.
루터의 전례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한가지는 거행에서 지역 언어의 사용이다. 그에게서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의 예배이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곧 말씀이 그 지역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제 말씀의 예배는 공동체에 의해 효과 있게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1523년의 세례에 관한 그의 글에서, 성사가 지역 언어로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저 없이 확인하고 있다. 곧, 그에게는 유용해서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틴어를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전통 언어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어떤 때는 라틴어를 지속하기도 하였는데, 언급하였듯이 기회가 주어지면, 이 언어의 교육적 가치, 음악적으로 적합한 독일어 텍스트의 부재, 가장 나약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기대함 등에 따라 라틴어의 위치를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례적 실천은 루터 신학의 요구에 철저하게 순응하게 된다. 16세기 중엽에 프로테스탄트는, 예배에서 지역 언어의 요구가 이론의 여지없이 완전하게 계승되는, 라틴어에 비해 총체적인 능가를 획득하게 된다.
2) 뜨렌또 공의회의 전례적 대책
공의회의 3시기 동안 개혁가들이 개시한 것의 되풀이로서, 연속적으로 성사의 주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7회기(1547년 3월)에 의화 교리의 논리적 귀결로서 일반적인 성사들과 세례와 견진에 대한 규정을 승인하였다. 13회기(1551년 10월)에 실재적 현존의 문제성과 함께 성찬에 관한 교령과 규정을 연구하였다. 14회기(1551년 11월)에는 참회와 마지막 도유(종부) 성사에 관한 교리를 토론하였다. 뜨렌또 공의회에서의 ‘종부성사’란 표현이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병자성사’로 그 표현이 바뀌어 본래의 의미를 되찾았다.
공의회의 종결 부분 중, 21회기(1562년 7월)에 양형 영성체와 어린이 영성체에 관한 교령을 승인하였으며, 22회기(1562년 11월)에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강하게 도전 받는 희생제사의 관점에서 성찬의 주제가 또다시 취급되었다. 23회기(1563년 7월)는 남은 두가지, 곧 서품과 혼배 성사를 취급하게 된다. 순전히 외견상의 동기로, 성찬 교리가 세 부분의 장으로 나누어져 다루게 된다. 곧, 실재적 현존(13회기), 영성체(21회기), 희생제사(22회기) 등은, 성사 신학이 뜨렌또 공의회 이후의 역사에서 방황하는 결과를 갖게 되며, 성찬례 성사에 관한 교리적 종합의 발견의 장애가 된다.
22회기에서, 미사의 희생제사에 관한 교령을 결정한 다음 즉시, ‘미사 거행에서 보존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에 관한 교령’(Decretum de observandis et evitandis in celebratione missae)을 승인하였다. 이미 공의회가 시작되던 1545년 7월 20일, 미사의 희생제사 거행 안에 이루어지는 남용들의 목록작성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가장 비판할 만한 점들을 개혁가들 뿐 아니라 여러 시노드들에서 빈번하게 지적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다. 남용목록에는 미사의 동일 순서의 요소들과 반대되는 몇 가지 신학적 대책 지적되어 있었다. 예컨대, 예물을 준비하는 동안의 기도들과 위령 미사의 ‘예물 봉헌 기도’(offertorium) 등이다.
위원회에서 작성한 대조표에 공통분모를 들자면, 모든 남용들은 손해와 불경과 미신의 개념 아래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연결에 따르면, 이 남용들이 공의회 논쟁과 관련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주교들이 다른 남용들을 나열하여 화염에 기름을 끼얹을 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다른 비판의 동기들을 제공할 지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남용들과 함께 그것을 제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을 제시해야 했던 것이다. 위원회는, 공의회 본회의가 이점을 받아들이도록 이 계획을 더 빈번히 작업해야 했었다. 모든 면에서 축적된 작업은, 1562년 11월 10일 전체 회의에서 개혁의 단지 아홉개 규정만 거치게 된다. 즉, ①미사 급료에 대한 항의, ②간결한 미사(Missa sicca), ③하루에 여러번 미사를 봉헌하는 것, ④기원미사나 위령미사의 경우에 주일 미사를 옮기는 것, ⑤주교좌나 참사회 관리 교회에 수도원 위령미사를 도입하는 것, ⑥미사 장소가 정상적인 허락의 예외와 함께 축성된 교회일 것, ⑦미사에서 사용된 그릇과 장식들의 청결에 관한 규정, ⑧읊거나 노래되는 미사의 전 텍스트는 듣는 이들이 인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⑨파문된 사람과 공공의 죄인은 미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등이다.
마지막으로 11월 17일에 승인한 교령에서 미사 전례의 주된 책임자로 주교를 지적하고 있다. 전례의 책임자로 주교를 지적한 것은 ‘교구장 주교’를 말하는 것으로 개별 교회(Ecclesia particularis)의 최고 책임자이다.
그러나 미사경본(미사 전례서)의 개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뜨렌또 공의회가 미사 전례의 통일 작업을 결국 완수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공의회는 이미 많은 시간 동안 모임을 가졌고, 25회기에서 미사경본(Missale)과 간이 성무일도(Breviarium)의 개혁을 교황에게 위임하였다.
같은 22회기에서, 10년 전에 시작하였던 작업들을 완수함으로써 뜨렌또 공의회는 개혁가들과의 논쟁의 핵심 주제를 직면하게 된다. 곧 전례 언어 문제이다. 이 임무는 결코 쉽지 않은 것으로 소개되지는 않았으며, 상대편에서 반대하지 않는다면 상반되는 관심들을 지지해야 했다. 곧, 프로테스탄트의 원칙을 단죄해야 했으며, 동시에 지역 언어로 된 예식의 설명을 규정해야 했다. 또한 라틴어를 유지하고 동방 언어의 실천들을 재인식해야 했다. 아울러 경직된 규제를 의도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범주의 양상으로 지역 언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아야 했다. 공의회 전체 회의에서 승인된 텍스트는 포함된 내용들 가운데 드물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미사는 믿는 백성에게 커다란 ①교육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서에 따라 미사를 지방 언어로 거행하는 것이 공의회 ②교부들에게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규정 9항). 이로 인해 모든 장소에서, 전 교회의 어머니이시요 스승이신 거룩한 로마 교회에 의해 인준 받은, ①각 교회의 옛 예식을 보존하기를, 그리스도의 어린양들이 ‘어린것들이 빵을 청하여도 그들에게 그것을 주는 이가 없다’는 ②배고픔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거룩한 공의회는, 목자들과 미사 거행 동안 자주 설명하길 염려하는 마음이 사람들 각자에게, 이들 자신들이나 혹 다른 사람은 미사 때 같은 것들 사이에, 주로 주일과 축일들에 지극히 거룩한 ③이 희생제사의 어떤 신비를 읽고 표현하기를 명한다.” DS 1749.
이 텍스트의 취지는, 공의회의 표현들로 분명해지는데, 뜨렌또 공의회의 화제들이, 라틴어의 확대에 있어 우연하게도 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나중에 신학자들과 호교론자들이 라틴어 사용이 정당함을 제시할 때, 공의회의 이러한 예리한 단면을 잊고서, 라틴어 사용이 적합하다는 이야기들을 교의적 논거들로 대신하여 제시하게 된다. 이처럼 라틴어는 교회 일치의 표현과 이단을 반대하는 효과 있는 조치가 된다.
전례서들의 개혁은, 마지막 회기에서 교황에게 위임되었는데, 이것을 실천하기를 늦추지 않았다. 비오 5세(1566-1572)는, ‘로마 간이 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 1568)와 ‘로마 미사경본’(Missale romanum, 1570)을 발간하였고, 끌레멘스 8세(1592-1605)는 ‘로마 주교예식서’(Pontificale romanum, 1596)와 ‘주교 예절 지침서’(Caeremoniale episcoporum, 1600)를, 바울로 5세(1605-1621)는 ‘로마 사제예식서’(Rituale romanum, 1614)를 출간하였다.
이 개혁의 깊은 의도는 새 전례서에 포함된 교황 문헌들 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례의 오래되고 순수한 원천들에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들어 있다. 즉, ‘거룩한 교부들의 옛 규범과 예식에로’(ad pristinam sanctorum Patrum norman ac ritum) 되돌아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이용 가능한 수단들이 불충분하였기에 뜨렌또 공의회 이후의 개혁은,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개혁을 다소간 따르는 중세의 로마(그리고 프랑코-게르만) 예식을 정화하고 재건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것은 할 수 없었다.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중요한 규정(명령)은, 로마 미사경본의 출판과 함께 나온 교서 ‘첫 시기에’(Quo primum tempore)에 나타나는데, 여기에 ①이 미사경본이 전 교회에 있어 유일한 규범이어야 하며, 앞선 두 세기의 전통의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②지금부터 앞으로 누구라도 이것을 바꿀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연히 유사한 통일 작업은 인쇄술의 발명 이전이라면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다변화를 반대하는 전례의 견고한 획일성에 대한 감시를 위해 식스토 5세는 1588년 경신성성을 만들었다. 따라서 시작했던 개혁 작업을 계속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으며, 미사와 모든 전례의 거행에 있어서 규정된 형태를 항상 주목하고 감독하기 위해 감시에 치중하게 된다. 곧 ‘지침주의자’(rubricista)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3) 바로크 시대의 전례
뜨렌또 공의회가 종결된 다음,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의해 야기된 위기를 겪은 가톨릭 교회 내부에 자신감과 단결의 감정이 확산되었다. 개선과 축제의 분위기가 예배의 환경과 표현에도 난입하게 된다. 바로코 시대에 건립된 교회들은, 대리석과 금장식의 벽과 그림으로 채워진 천장으로 마치 우아한(품위있는) 커다란 응접실(홀)을 닮게 되는데, 발코니(무대)와 큰 통로(갤러리)를 갖추고 있다. 전면에 커다란 성화를 분리시켰지만, 제대는, 전례 행위로 가치가 평가되는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성화를 지탱해주는 일종의 멋있는 (벽 성화의) 받침대로 전락하였다.
교회 건물과 외관 사이의 경계는 가대(chorus)가 위치하는데, 이는 주례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연단(tribuna)으로, 바로크 시대에 음악적 표현이 전례 행위에 견줄 만큼 분리되고 독립된 것을 가리킨다. 이 때에는 교회 ‘다성음악’(polyphonia)의 황금기이다. 음악적 관점에서 볼 때, 미사는 수많은 예술적 창작의 영향을 받는, 부분적으로 한가지 수단이었다. 하지만 바로코 시대의 교회 음악은 원칙적 범위 안에서 대개 갈무리되었으며, 전례의 봉사로서 그 음악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순전히 미학적인 기준에 의해 진행되었다. 여기서 유래한 것은, 예배가 자주, 다성음악 합창단과 오르간이 그들의 예술적이고 음악적 기교를 보여주기까지 하는 형식 구성(음악회 공연)을 제공하는 것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축제가 교회 건축과 내부 조형의 장식으로 특징 되는 관심을 갖는다면, 바로크 문화는 자신의 예술적 전 자산을 펼쳐 놓기 위한 비교될 수 없는 요소를 가졌다. 곧, ‘성체’(Corpus Domini) 축제이다. 실재적 현존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와의 논쟁은, 신학에서든 전례적이고 대중적인 표현에서든 성찬례의 이 측면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반대 급부의 개혁을 낳게 된다. ‘성체’(Corpus Domini) 축제는, 이 성사적 현존을 인간들 사이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으로 공경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이 성체 축제는, 그리스도교 백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님의 개선 행진인 ‘행렬’(processio)이 중심이 되는데, 이는 바로크 문화의 가능한 모든 화려한 것들, 곧 음악과 합창, 요란한 만세소리와 깃발, 매우 휘황 찬란한 화관과 장식 같은 것들로 주님을 선포하고 환호한다. 하지만 행렬은 ‘성체(주님의 몸)’의 축제를 축소시키지는 않았으며, 교회생활에서나 시민생활에서나 이 사건들을 특별히 장엄하게 만들기 위해 연중의 다른 날에도 이를 반복하였고, 이로 인해 바로크 시대는 ‘행렬의 시대’라 불리게 된다.
17세기는 ‘빈번한 현시(expositio)의 세기’라고도 불린다. 사실 성체 행렬은 성체를 관상하고 공경하는 신자들의 열망을 채우는 충분한 해결로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극히 거룩한 성체의 현시, ‘40시간 성체 기도’의 신심, 지속 공경조배(성체조배), 보상의 공경조배 등을 강화하게 된다. 성광의 현시로 이루어지는 성체 예절은, 다소간 공경의 복잡한 체계이며 권좌와 금실수의 비단으로 꾸며지는데, 중세의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 시대에 보편적이고 의무적인 실천이 된다.
그리고 전례 역사에서 궁중 예절이, 처음의 것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이지만, 전례 안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존경의 행위는 주교와 사제에게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사적 현존, 곧 왕 중의 왕이신 성체의 그리스도께 지향된다.
바로크 시대 신심에서 근본이 되는 다른 중심은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커다란 성모성지의 순례와 성모를 공경하여 드리는 새로운 축제들이 많아진다. 곧, 로사리오(Rosario)의 성모 축일, 메르체데스(Mercedes)의 성모 축일, 카르멘(Carmen)의 성모 축일, 무염시태(Immaculata conceptionis) 성모 축일 등이 생겨난다. 옛 마리아 축제들이 구원 신비와 전례주년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반면, 새 축제들은 오히려 빠스카 신비의 거행과 비교할 때 ‘원심적인’(외부지향적) 움직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주변에로 향하는 이 경향’(원심적 운동)은 바로크 시대 전례생활의 전체적인 혼용으로 나타난다. 측면의 (경당) 제대들을 많게 하고 두드러지게 하였으며, 거기에는 보통 그리스도를 덜 소개하고 성인들을 더 표시하는 형상들을 위치시켰다. 장식들은 그 역할에 따라 이루어지고 영상이나 비유의 장식적 전시로 변형되었다. 전례는 오히려 보고, 듣고 하는 소수가 참여하는 연극(공연)이 되어 버린다. 설교는 미사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독자적인 것이 된다. 회중의 영성체는 사적인 새 신심 때문에 전례 거행은 축소되고, 윤리와 금욕을 강조하는 형태의 혼합으로 독립하게 된다. 백성에게 난해한 라틴어의 지속은 그 결과로, 예배가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신비에 공동체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믿는 이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도를 활성화하는 거의 극장식(무대식)으로 묘사하는 사실을 띠게 된다.
로마 전례는, 완벽하게 문헌화된 전례서들로 인해 백성들 앞에 봉인된 하나의 항아리로, 교회의 높은 권력(법제) 앞에 수많은 주관적 문제들 중의 하나로 남게 되며, 여기에 충실하게 순종하지만, 더 이상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능동적 원리는 아니었다. 경신 성성의 설치로 로마 전례는 정화되지만, 그 응보로 목석처럼 동면과 부동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백성의 솔선(전례의 능동적 참여)은 초세기 근본적 자기 원천에서 효력상 멀어졌으며, 이차적인 우여곡절과 특별한 신심들로 잃어버린다. 반면 이런 신심들은 전례의 공적 표현에 있어 예배의 공허함과 부족함을 보상하였다.
4) 계몽주의 시대(18세기) 전례 개혁의 지향들
17세기까지 프로테스탄트와의 논쟁은, 상대편의 적절치 못한 관점들에서 성찬례와 전례 일반을 숙고하기 위해 가톨릭 신학자들을 나서게 하였다. 그래서 ①실재적 현존과 ②희생제사와 ③사제직에 관한 주제가 집중된 것이다. 종교 개혁가들이 특수 사제직을 부정하였기에, 가톨릭 신학자는 사제가 백성과 구별되고 분리된다는 모든 것을 재확인할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반개혁의 사목적 우려들 중에는, 전례 행위에 신자들이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열망이 우월하지 않았다. 중세 때처럼 예배는 성직자와 교계 제도의 특전이기를 지속하였다.
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여러 곳에서 전례의 실재 상황에서 일반적인 불만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례적 쇄신의 의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의향의 근본 방향들은, ①공동체적 참여가 주된 것이기를 바라는 열망, ②예배에서 무의미한 모든 요소들을 피하고 대부분을 단순한 것으로 만들려는 요구, ③신자들의 주된 감화에 질서 있게 전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의 사용 등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향들은 계승되어 성취되지 못하였다. 베네딕또 14세(1740-1758)에 의해 계획된 전례 개혁은, 그가 볼로냐(Bologna)의 대주교였을 때 추진하였던 것으로, 오히려 달력을 총점검하는데 더 근원을 두었으며 거의 모든 근래의 축제들의 기원들로 이를 한정시켰는데, 정작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 자신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다. 불란서 교구 지역 교회들의 전례는 18세기 동안 규범없이 수많이 증가하였는데, 이 때 가장 많이 확산된 전례서는 1736년에 지역 교회에서 발행된 ‘빠리 미사경본’(Missale Parisiense)과 ‘빠리 성무일도서’(Breviarium Parisiense)이다. 불란서 지역의 산만한 전례를 이후 게랑제가 개혁하여 통일 작업을 이루게 된다. 다음 부분의 ‘문예 부흥’을 참조할 것.
성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지는 못하였다. 피스토이야(Pistoia, 1786년)의 시노드같이 전례 쇄신의 여타의 의향들은 교리적 단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피스토이야 시노드에 따라 개혁해야 할 전례 분야의 세부 항목은 관심을 끈다. 곧, ①모든 성당마다 단 하나의 제대, ②미사 급료의 폐지, ③신자들의 참여, ④행렬의 감축, ⑤노래가사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는 단순하고 엄격한 음악, ⑥정신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장식, ⑦성무일도와 미사경본의 개혁, ⑧새로운 사제 예식서, ⑨과도한 축제 수의 감소, ⑩성무기도에서 한해에 걸친 성서 독서 등이다. J.D. Mansi, vol.38, coll.1035-1041. 1074-1079. 1090-1094. 오스트리아의 개혁에 있어서, 특히 의무 축일들과의 관계에 있어 왕후 마리아 데레사는 ‘교회 최후의 여변호자’(suprema advocata ecclesiarum)였다.
이런 의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또 다시 제기되었으며, 결국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의 내용이 된다. 그러나 개혁의 이 요청들은 계몽주의의 고유한 관점들의 틀에 끼워 넣고 규정되어 버렸다. 곧, 전례는 공동체가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로 고려된 것이 아니라, ①백성의 교육적 기능과, ②개인의 윤리적 과정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곧, ①설교의 가치, ②1고린 14,16 이하에 따라 요청되는 참석자의 전례 텍스트 이해의 요구, ③지방 언어로 라틴어 텍스트를 번역하기를 되풀이하는 노력, ④대중 노래의 분위기와 촉진 등이 바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합리주의 시대는, ①비유적 설명을 불충분한 것으로 평가하고, ②바로크 시대에서 물려받은 전례 안에 ‘말씀’(logos)의 결핍을 비판하고, ③초기 사도 시대의 품격 있는 단순성을 발견했던 것 등을 인지할 수 있다.
18세기는 처음으로 전례 사목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생활에 관한 기원의 원천을 예배 안에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전례적 신비의 중심 뿌리를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지적인(스콜라 신학적) 차원과 윤리적이고 순수 교리교육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 동안 전례는 개인의 교화를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 전락하며,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에로 더 이상 지향되지 않게 된다.
5) 문예부흥(19세기)
앞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결핍과 실수들은 가톨릭의 영역에서 강한 반응을 야기하게 된다. 순수 이성의 범위 내에서 종교에 대한 계몽주의의 주장이 커졌는데, 이것을 반대하여 19세기에 계시와 교의와 전통의 원칙을, 그리고 교회의 교계에 의한 존중을 재확인하였다. 전통에 의한 분위기가 전례 안에 반영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①라틴어 기도의 맛깔, ②옛 예절과 지침말(rubrica), ③그레고리안 음악에 의한 열망 등은 ‘부흥’(Restauratio)이라 일컫는 이 시대의 특징들이다.
교회 성음악(musica sacra)의 개혁은 사실 19세기 부흥에서 우선권을 가진 대상들 중의 하나였다. 특히 바로크 시대의 교회 음악은 무대 정신(극장식 공연)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곧, 콘서트와 멋있는 노래는 예배의 형식 부문을 독점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노래와 음악의 세속화를 반대하는 교회 가르침의 반복되는 경고와 단죄는, 받아들이지 않는 휴지가 되고 말았었다. 이제 복구시대는 반대로 성음악에서 애호와 스타일의 정화를 위해 진지하게 일하게 된다. 또 정확한 그레고리안 노래를 복구하길 노력하였는데, 다른 이들이 인정하는 이 작업은, 게랑제(Guéranger)에 의해 활성화되고, 책임을 갖고 맡겨진 ‘솔렘’(Solesmes) 수도자들의 몫이었다. 이 ‘세실리아 운동’은 교회 노래의 새로운 원리들을 확산시키는데 노력하였는데, 라틴어로 된 그레고리안 노래를 좋은 것이라 변호하고, 지역 언어로 가사를 혼합한 것은 배척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이, 아직 전례 행위에 백성이 참여하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그리스도교 예배는, 역사적 발전 이래로 신성한 언어로 보호된 광영에 휩싸인 은신처에서, 만질 수 없는 신비스러운 실제, 성령의 완전한 업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런 개괄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행운이 깃든 게랑제(1805-1875) 수도원장의 공적의 모습이 두드려진다. 이 세기의 ‘신갈리아 전례’의 무자비한 정적이었던 게랑제는 순수 로마 전례의 정확한 문헌들에로 무조건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결코 대신할 수없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이해하였기에, 전통 전례를 위한 열성주의적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전례적 지침들’(Institutions liturgiques)과 ‘전례주년’(L´année liturgique)과 같은 훌륭한 작품의 저자였지만, 예배의 텍스트와 예절에 대해 백성에게 총체적으로 설명할 만큼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예배는 항상 백성에게 신비의 베일로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말하듯이, 솔렘의 수도원장인 그가 대단한 열성으로 방어하고 변호하였기에, 거룩한 언어로서 라틴어의 필연성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절제의 지향과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이제 드디어 전례 분야에서 두 어깨에 짐 지워지게 된다. 게랑제가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안 멜로디를 음미하기 위해 정예의 중심(엘리트 센터)을 자기 수도원 안에 세우는 동안, 비올레 르뒥(Viollet-Le-Duc, 1814-1879)은 중세의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교회 건축들을 연구하고 재건하였다. 전통과 낭만주의로 어우러진 이런 분위기에서 비일시적이고 비역사적인 한가지 전례의 개념이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 시대에 전례는,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 충만하고 경이로운 일로 출현하고 또 하느님 자신처럼 담길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어느 초기 시대에 형성된 지성소로 나타나곤 하였다. 이 개념의 우월함은 ‘전례운동’의 지난한 과제들 중의 한가지를 만들게 되며, 그 실체는 20세기초에 나타난다.
3. 성사 신학과 전례학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신학은 두가지 깊은 목적을 지향하였다. 한가지는, 구원의 무상성에 대해서, (업적이 아니라) 신앙을 통한 인간의 의화에 대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에 대해 용기 있게 주장하면서, ①복음의 순수성과 단순성에로 돌아가려는 의향이었다. 다른 한편의 목적은, 근본 교리들에 대해서 당대의 ②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부패와 이탈을 반대하여 항의하는 강한 세력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두가지 측면은 개혁 창시자들의 성사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도 동일한 목적이 다시 발견된다. 모든 신학적 종합에서 또 모든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에서 성사의 교리와 실천이 가장 민감한 문제들에 해당되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성사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의 새로운 교리에서 유별나게 주목되는 것이다.
성사에 관한 개혁을 주장하는 글들은, 사실 신학의 핵심 주변에서 근본적 이탈을 기초로 깔고 있다. 곧, 신앙, 은총, 의화, 교회 중개의 역할 등이다. 이것은 ①성사에 관한 스콜라 신학의 교리를 반대하는 신학, 특히 주체의 모든 인격적 참여가 배제하는, 또 결정적으로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업적들을 통하여 의화됨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마술적 작용처럼 설명하는 ②‘사효성’(ex opere operato)에 따른 성사적 효과의 확언을 반대하는 냉혹한 비판을 인정하는 신학인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사는 말씀과 약속의 순수한 표지라는 것이다. 약속의 근본원리와 성서에서 드러나는 그 결과는, 성사들 사이에서, 참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설정된 것들을 교회에 의해 부적합하게 도입된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사의 일곱이란 숫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 안에 증언된 단 두개의 숫자로 줄였다. 즉, 세례와 성찬이다. 또는 ‘참회’를 포함하여 셋이 되기도 한다.
성사는 단지 하느님이 당신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통교하시는 구원을 볼 수 있게 하는 표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구원 질서에 있어 어떤 경우(casus)도 의화하는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것의 전 효과는, ‘성사가 아니라 성사의 신앙이 의화한다’(non sacramentum, sed fides sacramenti justificat)고 언급하였듯이, 예외적으로 신앙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 성사에 관한 루터의 설명으로, “세례는 단순히 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과 함께 하는 물이요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물이다... 분명하게 물은 그런 효과를 갖고 있지 않지만, 물로써 하느님의 친밀한 말씀을 신뢰하는 신앙과 물이 함께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효과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성사신학 안에 그들의 일반적 개념의 몇 가지 의미있는 관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①신앙의 주관주의, ②현저하게 드러나는 염세주의적 인간론, ③교회의 가견적 역할의 무의미함(일부 무교회주의를 지향함), ④육화의 결과에 대한 불충분한 고려(육화신비에 소극적), ⑤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배타적인 관심, ⑥신적 내재성의 한계성 등이다.
‘말씀-성사’(Verbum-Sacramentum)와 ‘신앙-성사’(Fides-Sacramentum)의 관계를 짝으로 끼워 맞춘 프로테스탄트의 주장(명제)이 뜨렌또 공의회를 조건짓게 된 것은 분명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글들을 갖고서 여러 회기에서 성사의 교리를 토론하였던 것이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성사 신학에서 결정된 방침을 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사적 질료에 있어 위대한 스콜라 신학, 특히 성 토마스의 기조 원칙들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눈에는 공의회의 교리가, 신앙과 말씀의 중심성을 명백하게 잘못 알아들은, 성사에 대한 호의로 베푸는 근원적 선택처럼 나타났다. 그래서 ‘말씀의 교회’라는 이름이 프로테스탄트에게, 또 ‘성사의 교회’는 가톨릭에 붙여지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이원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결과로서 전례는 생생한 그리스도교 안에서 종파 분쟁(controversia)의 대상이 된다. 이 이론(異論)들은, 인본주의자들의 역할로 인한 역사적 의미의 재자각과 일치하여 ‘전례에 관한 고유의 과학적 연구’(典禮學)의 출발점을 세우게 된다. 근대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어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요한 원전 문헌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며, 이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논쟁에서 교리적 호교론의 진정한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옛 전례 문헌 연구는 작끄 빠믈리유(Jacques Pamelius)가 맨 처음 시작하였는데, 그는 1565년에 옛 전례 텍스트를 두 권의 책으로 묶었다. 또 멜키올 히토릅(Melchior Hittorp)은 1568년에, 중세 초기의 전례 설명 선집 및 ‘로마 예식 순서’(Ordines romani)와 주교 예식서(Pontificale) 모음집을 출간하였다.
나중에 전례학의 제2기에, 불란서 분도회의 성 마오로(S. Maurus) 수도원의 많은 수사들의 작업이 가속되었는데, 그들은 전례 수사본들을 수집하고 이것에 흥미 있고 박식한 주석들을 달아 출판하였다. 이들 가운데 훌륭하게 일을 해낸 이들로, 니꼴라 위그(Nicolas-Hugues), 쟝 모랭(Jean Morin), 쟝 마비용(Jean Mabillon) 등이며, 특히 에드몽 마르떼느(Edmond Martène)는 자신이 정리한 4권의 ‘교회의 옛 예식들’(De antiquis Ecclesiae ritibus)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같은 작업을 했던 이들로는 또한 요한 보나(Giovanni Bona), 루도비꼬 안또니오 무라또리(Ludovico Antonio Muratori), 마르틴 게르베르트(Martin Gerbert)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동방 예식을 연구한 이들로는 별도로, 외세브 르노도(Eusèbe Renaudot)와 아쎄마니(Assemani)의 수사들이 구별된다.
20세기에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idaché), ‘세라피온(Serapion)의 (성찬) 기도집’(Euchologion), ‘에제리아 여행기’(Itinerarium Egeriae), ‘주님의 증언록’(Testamentum Domini)과 같은 옛날의 중요한 전례 원전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문헌들 모두는 우리 시대의 전례 연구를 위한 새로운 출발점들이 되었다.
본래 ‘성사 신학’이라 일컬어졌던 만큼 뜨렌또 공의회 이후 양상에 관한 취급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저술들에 대한 표명과 논박에 중요한 몫을 할당하게 된다. 하지만 반개혁의 같은 신학자들 사이에 반개혁의 신학자들로, 로베르또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멜키올 까노(Melchior Cano), 프란시스코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요점이 다양하다는 것이 흥미있는 주목거리이다. 수아레스(Suárez)의 성사에 관한 주석은 다음 시대에서 성사 신학의 교과서적 요점을 위한 모델과 안내로 대부분 사용된다. 뜨렌또 공의회 이후 성사 신학은 오히려 내용에 있어서는 빈약하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절충적이었다. 그의 저술 ‘일반 성사론’(De sacramentis in genere)은, 오히려 분화된 기준들에 따라 두가지 가르침을 표시하는 방식과 그의 주제에 있어 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사의 일곱이란 숫자와 그리스도의 역할에 의한 성사 설정과 같은 몇가지 의문들은, 개혁가들이 부정하는 것에 대해 뜨렌또 공의회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응답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호교론적 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논쟁 방법은 일반적으로 몇가지 관점을 확대시켰으며, 아마 더욱 중심이 되는 다른 것들에 대한 불충분한 해결을 가져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술 내용의 대부분은 성사적 표징의 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에 할애하였다. 즉, 질료(materia), 형상(forma), 직무자(minister) 등이다. 스콜라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hylemorphismus)의 도입은, 성사를 함유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모으고 통합하는 능력을 가진 설명하는 도식(schema)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모양으로 교회법 학자들은 모든 성사의 유효성(validitas)와 적법성(liceitas)을 위해 필요한 것을 세심하게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항상 성사 신학의 역사에서 대체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성사의 실행(factum)이 행위와 사건의 근본적 특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느님은 당신 은총을 성사에 얽매이게 하지 않으신다’(Deus gratiam suam non alligavit sacramentis)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성사적 요소들과 동일시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아울러 신앙을 통한 성사 내면의 인간적 참여는 항상 더 이차적인 것이 되며, 결정적으로 성사의 전 영역이 커져 가는 ‘제도화, 법제화’(codificatio)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현대 국가들이 나타남에 따라 교회는 외형의 조직에 대한 관심과 제도적 측면을 고정시킨다. 이러한 노선 안에서 성사 행위(actus sacramentalis)와 ‘전례의 장엄성’(solemnitas liturgica)을 보았다. 그 결과 전례와 성사의 전 방면은 법률적 우려와 결의론(사례연구)의 영향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뜨렌또 공의회 이후 시기의 성사에 관한 취급들은 성사 행위를 독립된 현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곧, 구원 역사의 역동성과 범위 안에서의 행위들로서 ‘일반적인 신학적 의미’(significativum theologicum generale)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교회적 배경’(contextus ecclesialis)이 부족하였으며,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짜이게 되었다. 이점은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의한, 또한 뜨렌또 공의회 이후 성사 신학에 의한, 환영받고 상당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스콜라 신학의 성사 종합의 잘 알려진 결점이기도 하다. 이점에 대하여 이미 가르데이(Gardeil)는 말하기를, “만일 성 토마스가 자신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을 20세기에 썼다면, 자신의 ‘육화론’(De incarnatione)과 ‘성사론’(De sacramentis) 사이에 ‘교회론’(De ecclesia)을 집어 넣을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이 시대의 성사론 안에 ‘인간학적 배경’(contextus antropologicus)이 없다. 역사와 문화에 의한 어떠한 방식으로도 조건 지워지지 않고, 또 어떤 모양으로는 인간 조건에 이국적인 ‘제도’(institutio)처럼 보았다. 성사의 상황(casus)에 관한 주제는 이처럼 마술적 형태의 설명 아래 굴복하고, 일정한 중심 의문이 되어 버렸다. 분명 여기에 성사 신학과 전례 참여 운동 사이의 ‘격리’의 근원이 있으며, 오늘날 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