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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역사-04] : 그레고리오 대교황에서 그레고리오 7세 교황까지(590-1073)
1. 일반적인 배경
봉건주의 계급사회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서부터 국가 정부라는 근대 세계의 탄생까지 긴 기간은 여러 민족들 간에 일련의 공통적인 특성들을 보여준다. 중세를 형성하는 이 9세기 동안(7세기부터 1454년 Trento공의회까지) 북방과 중부 유럽의 민족들은 로마 제국의 동서방을 밀어 붙여, 정치적, 문화적 차원에 관한 사회의 일정한 형태에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대중들은 근본적으로 ①농경민이었으며, 더 나아가 거의 도처에서 더 중요한 성주나 왕의 ②봉건적 권위 아래 모두가 위치하는 농경 지주나 다소간 권세있는 자들과 함께 하나의 ③계급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설교와 종교적 일치
교회의 역사에 있어 이 때에는 전 유럽에 있어 ①그리스도교 선포의 시기이다. 그레고리오 대교황(590-604)은, 아오스딩 수도자와 그의 동료들을 영국의 복음화를 위해 보냈으며, 교회의 내적 활력으로 중요한 결실들을 가져오는 ‘선교의’ 프로그램을 실행하였다. 다른 한편 서방 ②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일치는 중세기의 한가지 특성인데, 이전 시대와 특히 이후 시대와 구별된다.
신앙적 사상의 무변화
중세기의 일반적인 윤곽 가운데, 그의 일치성과 공통적인 자리 안에 서로 다른 두 시기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연결 지점은 1000-1050년의 기간이다. 여기서 살펴보는, 그레고리오 대교황부터 그레고리오 7세 교황까지의 4세기 동안(7-10세기)에는 서방에서의 변화는 느리게 진행된다. 또한 거의 모든 수준에서 일종의 ‘동면상태’를 만나게 된다. 교황 재위의 역사는, 7-10세기를 볼 때에 결코 그늘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도 세상에서 유럽이 덜 중요한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기들은 교회의 미래를 위한 다산의 수태기간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이점에 대해 J.A. 융만은, “교회 생활의 앞선 천 년대는 결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교부시대의 끝 부분과 교회학문의 시작 사이(5-6세기)로 이해되는 앞의 5세기에서처럼 그에 상응하는 상황들에서보다 신앙적 사고에서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슬람의 영향과 칼 대제
이 시대의 민감한 이해에 있어 이슬람 사상(회교)의 발전의 언급을 지나칠 수 없다. 이들은 동서방을 막론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어지러울 정도로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711-713년에 옛 스페인을 침략하였으며, 거기의 많은 주민들이 노예로 전락하거나 이슬람 종교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몇몇 승리자들은 자기 영토와 그리스도교를 잘 보존하였다. 이들이 모자라빅인들인데, 그들 나라의 후대 역사에 주목할 영향을 끼치게 된다. 800년대에 칼 대제(Carlus Magnus)가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그는 ①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와 방어의 수호자로 간주되고, 그의 제국은 중세의 특징인 ②종교와 정치 사이 단일의 공존을 세우게 된다. 더 나아가 칼 대제의 왕국은 ③문학과 건축 양식의 하나의 특별한 형식을 창조하게 되는데 이후 거의 2세기 동안의 모델로 제시된다.
비잔틴 교회의 발전
비잔틴에서 만큼은 성화상의 위기에 대해 언급할 것이 있는데, 200년 이상의 기간 동안(726-843) 비잔틴 교회의 생활은, (성상) 파괴주의의 추종, 박해, 전쟁 등으로 상반되는 두개의 분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게다가 모라비아(Moravia)의 선교사들인 치릴로(Cyrillus)와 메토디오(Methodius)의 예외적인 활동이 두드려지는데, 그들은 새로운 문학 용어를 창시하게 된다. 그들이 새로 만든 문학 용어란, 성서 번역에 있어 몇몇의 슬라브(Slave) 언어에서 사용되는 기호 자형들을 그들이 도입하였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을 ‘치릴로 문자’라 일컫는 것으로 슬라브인들은 가톨릭 예식에서 이 문자를 사용하였고 이를 ‘글라골리틱 문자’(glagoliticus)라 부른다.
비잔틴 출신의 이 두 수사(修士)는 전례 언어에 관해서 로마 권위와의 위험한 논쟁에 주인공들이었다. 관할권의 적법성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는 하나의 동일 조직의 두 부분처럼 여러 측면에서 공존하기를 지속하였다. 하지만, ‘성령 발출의 성자 포함’(filioque) 문제는 다른 총체적인 이유들과 함께 동서방 사이에 1054년의 커다란 단절을 결정하게 된다.
수도생활의 번성
유럽의 역사에서 성 베네딕도의 죽음(+548)과 성 베르나르도의 죽음(+1156) 사이로 이해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수도자 시대’ 또는 ‘분도회원들의 세기’로 지칭되는데, 이 때에는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로 사회 내의 한가지 특징적인 사실로 설정되는데, 이들은 영적이고 지적인 영역 뿐 아니라 예술적, 정치적, 종교적 영역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클뤼니(Cluny) 수도원의 설립은 10-12세기에 갖게 될 수도원 개혁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띠게 될 것이며, 11세기 거의 전부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영적 중심이 된다.
2. 전례 발전의 노선들
1)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모습과 업적
의심없이, 서방 전례 역사에서 그에 견줄 만한 사람은 없다. 그레고리오 대교황(590-604)의 전례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성장 과정과 인간적 심리, 하지만 특히 교황직에 선천적인 역사적 환경에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페스트와 기아와 격랑으로 백성들이 황폐하게 되었을 때, 로마는 롬바르디아 왕국의 군사적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귀족 가문이었고 이 가문은 흔히 문학가와 법관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로마의 시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수도자가 되기 위해 그 직무를 일찍 그만두었다. 그래서 주교로 축성된 후, 심리적으로, 백성의 필요성을 크게 배려하는 사목 행위가 발달하게 되었다.
대성전(Basilica)과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순교자 성당)들을 위한 로마 백성의 공경심을 지지하면서,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그의 설교에서 읽어 볼 수 있듯이 회중들의 교리에 적합한 환경에 의해 필요했던 전례적 집회인 ‘순회 예배’(cultus stationalis)에 큰 비중을 줌으로써 선임자들의 솔선들을 키우고 완성하였다. 순회 예배는. ‘순회 미사’(Missa stationis)를 가리키는 것으로 로마에 많은 순교자 대성전들을 전례주기에 맞추어 지정된 기념일 또는 축일에 지정된 대성전에서 예절을 위한 행렬과 미사를 거행하였던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례 전체가 단순하고 무지한 그 백성들에게 영적 양식을 실재로 줄 수 있기를 갈망하면서, 커다란 자유성을 갖고서 전례의 깊은 재조직을 실현하였으며, 그런 사목적 목표를 지향하였다. 그에게 있어 예식들을 간소화(‘그레고리오식의 축약’; abbreviationes gregorianae)시키는 두드려지는 관심이 주목된다. 곧, 전례 언어는 단순한 백성들에게 ①직접적이고 ②능히 접할 수 있는 것이며, ③문학적 요구들로부터 면제되는 것이다.
그의 전기 작가 바울로 부제가, “많은 것을 제거하여 간단히 몇 마디의 말로 전환되며, 일부는 참으로 덧붙여진다”(Multa subtrahens, pauca convertens, nonnulla vero superadjiciens)고 증언하듯이,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생애’(S. Gregorii Magni vita), 16; PL 75,94. 간소화 또는 ‘그레고리오식의 축약’들에서 밝혀야 할 것은 감사송 수의 대폭 감소와 보편 지향 기도를 억제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독서집, 성사 분야, 응송들 등에 있어 다양한 개혁을 완수하였다. 다른 교회들에서 계속하던 미사 중 세 개의 독서 수를 반면 두개로 줄였다. 하지만 두가지 경우가 다 서로 좋은 관계에 있기를 바랐다. 복음 단편들의 시험은, 거행 신비의 설명으로서 뿐 아니라, 순회 교회에서 거행되는 (순교자 무덤의) ‘기념’(memoria)의 설명으로 종종 선택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성사집’(sacramentarium) ‘성사집’은 (로마의) 주교가 사용하던 미사와 여러 예절의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주례자용 예식서 형태를 띤 것이다.
에 관해서 그는, 로마의 다양한 ‘제목’(titulum)들을 가진 ‘미사책’(libelli missarum)들을 모아 그것들에 관해 깊이 있게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완성된 자료들을 재발견하였지만,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전례 개혁들에 의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한정짓기는 매우 어렵다. 이 개혁들은 추후 전설에 의해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오’라는 대교황의 유명세에 의해, ‘그레고리오의 미사’, ‘그레고리안 성가’ 등에 전설적인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노래와 음악 표현의 분야에서,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전례의 더욱 잘 나타나는 요인인 ‘음악학교’(schola cantorum)를 확대 개편함으로써, 한가지 특수한 노력을 완수해야 했다. 이 음악학교 ‘성가대’(schola)는 주례자와 회중 중간에 위치하게 되고, 신자들과 사제들 간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래하는 이들은 신자들에게 유보되기 이전의 전례 텍스트들을 실행(노래)하였다. 이 멜로디들은, 이제 더욱 풍성하고 복합적인 것이 되어서, 특수한 설명들을 필요로 한다. 신자들은 듣고 만족하고 감동하면 된다. 이것은 전례 참여에의 새로운 양상이 되었으며, 덜 내면적이고 더 수동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당대 문화적 조건들 안에서는 아마도 가능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로마의 주교로 일하였으며, 그래서 서방 교회의 전례가 아니라 도시(로마)의 전례를 체계화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교회들로부터 배울 의향을 갖고 개방된 자세를 보여주는데, 자신의 교회를 위해 유익한 것은 취하였다. 전례 순서에 몇 가지 새로운 것들을 도입함으로써 시라쿠사(Siracusa)의 요한 주교의 마음을 동요시켜 비판하게 만들었는데,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점에 대해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Si quid boni vel ipsa vel altera ecclesia habet, ego et minores meos, quos ab illicitis prohibeo, in bono imitari paratus sum. Stultus est enim qui in eo se primum existimat, ut bona quae viderit, discere contemnat”; Epistolae Gregorii I, in: MGH II, 59이하. [MGH =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Hannover-Berlin 1826ss.]
전례에 관한 자신의 자유와 사목적 염려에 대하여 영국의 선교를 위한 여행에서 아오스딩 수사에게 직접적으로 한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한가지 선집의 텍스트가 있다. 바로 이 점들에 대해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따라야 할 노선들에 관한 불확실함을 언급하면서, “하나의 유일한 신앙이 있다면, 그러나 로마 교회의 미사 순서와 갈리아 교회의 것과 다르듯이 관습들이 다른 것”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교황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고 있다:
“당신이 교육받았던 로마 교회 전통의 현재의 것을 항상 지키도록 하며, 그 전통을 항상 사랑하시오. 그러나 로마 교회나 갈리아 교회나 또는 어떤 다른 교회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께 더 큰 열망(만족)을 드릴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면, 매사의 주의 깊게 그것을 수집하고 아직 그렇게 젊은, 앵글로 교회에 가져가도록 하시고, 당신이 다른 교회들에서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하도록 하시오. 실상 지역이라는 이유로 인한 실재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좋은 것들의 동기로 인해 그 지역들을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모든 교회에 대한 열심으로, 신심으로, 그리고 올바름으로 갖고 있는 것을 선택하고, 앵글로인들의 정신에게 전통이 되도록 그것을 모아 기록으로 제공하시오.” Epistolae Gregorii I, in: MGH II, 332이하: “Cum una sit fides, sunt ecclesiarum diversae consuetudines et aliter consuetudo missarum in sancta Romana ecclesia atque aliter in Galliarum ecclesiis tenetur... Novit fraternitas tua Romanae ecclesiae consuetudinem, in qua se meminit nutritam; valde amabilem te habeat. Se mihi placet, sive in Romana sive in Galliarum sive in qualibet ecclesia aliquid invenisti, quod plus omnipotenti Deo possit placere, sollicite eligas et in Anglorum ecclesia, quae adhuc ad fidem nova est, institutione praecipua, quam de multis ecclesiis colligere potuisti, infundas. Non enim pro locis res, sed pro bonis rebus loca amanda sunt. Ex singulis ergo quibusque ecclesiis quae pia, quae religiosa, quae recta sunt elige et haec quasi in fasciculo collecta apud Anglorum mentes in consuetudinem depone.”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전례적 업적은, 로마 백성들을 위해 숙고되고 마련된 것으로, 로마 이외의 지역들에서도 계승되었으며, 실상 많은 다른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곧 ①예배 순서에서도 또한, 정통성의 보증으로 로마를 바라보는 사회의 관습, ②로마 교회와 매우 유사한 다른 교회들의 사목적 상황, 그리고 ③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모습과 업적으로 인해 항상 커져 가는 칭송 등의 요인들이다.
2) ‘순수 로마 전례’의 시대
5-8세기간에 로마 지역 교회는, 전성기이고 표현 형태가 성숙한 시대로 이해되며, 프랑코-게르만 형태로 확대되기 이전의 고전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문헌들이 후대의 것이고, 새로운 입맛과 의향에 따라 다시 손질된 자료들로 그 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규정하기는 쉽지가 않다. 전형적으로 로마적인 이 창조의 바탕에 더욱 일반적인 일종의 ‘전례적 움직임’(motus liturgicus)이 위치하며, 이것은 서방 교회의 전체 분위기이고 동일한 언어, 곧 그리스도교 라틴어에 수시로 의존하였던 것이다. 이런 지리적, 문화적 환경에서, 유일한 ‘감사 기도’문(euchologia)을 대신해서 다양한 기도문들이 발전하게 된다. 그 사례로 다음의 기도들이 확대 발전하는데, 본기도(Collecta), 예물 기도(Super oblata), 감사송(Praefatio), 감사 기도(Prex eucharistica), 영성체 후 기도(Post communionem), 백성을 위한 기도(Oratio super populum) 등 다양한 기도문들이 나타난다.
서방의 공통적인 발전에 있어 서로 다른 양식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①‘로마 양식’은 거의 불변하는 한 개의 감사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일반적 의미에서 ②‘갈리아 양식’은 변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의 짜깁기(mosaicus)처럼 구성된 유일한 감사 기도로 특징지어진다.
이 고전적 시대에 로마 미사 양식은, 전례 거행을 활성화하고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비슷한 특색을 가진 3가지의 행렬이 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①전례 거행자들의 장엄한 입장 행렬을 들 수 있는데, 입당송(Antiphona ad introitum)이 불러지며 본기도(collecta)로 끝맺다. ②봉헌 노래를 동반하는 예물 행렬은 예물 기도(Super oblata)로 마친다. ③영성체송(Antiphona ad communionem)을 함께 하는 신자들의 영성체 행렬은 영성체 후 기도(Post communionem)로 마치게 된다. 또한 ‘미사의 장엄성’(missarum solemnia)을 말해 주는 거행의 세 가지 스타일이 알려져 있다. 곧, ①주교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로마 교회의 전 공동체가 모이는 장엄 미사로, ‘순회 미사’(Missa stationis) 때 모이는 것에 해당된다. ②로마 밖 교회들의 경우에, 관련있는 신자들과 함께 ‘명예’(titulus)의 교회에 모이는 한 ‘사제’(presbyter) 중심의 미사, 그리고 ③특수한 환경에서 모이는 작은 그룹의 미사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사적 미사’(missa privata)라는 것은, 나중에 일반화되는 그런 의미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고전적 로마 전례의 특수한 단면, 곧 그 특질은 다음의 사실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형식 원리들’(3가지)로서, ①정확성, 절제성, 간결성, 감수성의 미양도성(감정에 기울지 않음)을 들 수 있고, ②투명하고 분명한 규범적인 (예식) 순서, 그리고 ③문학 유형의 큰 포괄성(다양한 문학 유형을 포함함)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신학적 원리들’(4가지)로서, ①로마 전례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지향’한다. 반면 동방 전례, 갈리아 전례, 비시고틱(스페인) 전례에서는 빈번하게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말을 건네는데, 이러한 기도 양상은 고전적인 로마 전례에는 찾아 볼 수 없다. 여기에서 이처럼 다른 표현의 기도문은 신성한 기초 원리들에 대한 공경이나 경배의 외적 표명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질적 현존에 관한 사실을 신학적이거나 사색적인 화제로 설명하는 의향들도 아니다. 성찬 거행은 지역 교회에 충만하게 연결되어, 그리고 그 교회의 총체적인 표현으로서 드러난다. ②또한 ‘명예’ 교회들(tituli)의 공동체는, 로마 교회 공동체와의 내적 친교 표지로서, (로마 교회의) 주교 미사의 성체분배(fermentum)를 받는 것이다. 주교미사의 성체 분배란 주교 축성의 빵을 본당에 나누어 미사 중에 성혈에 혼합하는 것으로 이후 성혈에 성체 조각을 넣는 것이 일치의 표지로 넣게 된 것이다. ③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수행하는 주님의 기념은, 전례 주년 안에서 신학적으로 완벽한 균형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성인들의 파스카 신비를 거행한다. 마지막으로, ④지역 교회 공동체는 전례 거행 중에 보편 교회라는 가장 큰 공동체와 자기 공동체와의 유대를 잊지 않는다.
3) 프랑코-게르만 세계로 로마 전례의 이동
좁은 의미에서 금방 앞에서 규정했던 로마 전례는, 먼저 순례자들의 사적인 솔선들로 인해 그리고 이어서 정치적 세력의 후원으로 인해 프랑코 지역의 나라들에 퍼지게 된다. 실상 754년에 피핀(Pipin I, 황제741; 왕751-768)은 전 프랑코 제국에서 로마 전례의 공경을 선포하였다. 로마 전례 도입의 동기들은 다양하였다. 곧 ①정치적으로는, 유일한 형태의 한가지 전례를 통하여 전 제국이 더욱 굳건하게 일치하기를 원했던 것이며, 더 나아가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 사이에서 세속적 경쟁으로 이렇게 치닫게 되었는데, 프랑코인 왕국의 예배의 혼합주의와 부족한 규정을 억제할 의도였다. 의심할 바 없이, ②종교적 규정의 동기들도 있는데, 게르만인들에게 있어 로마와 성 베드로좌를 가까이하는 것이 영원한 구원의 한가지 보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칼 대제(768-814; 황제800-814)는 제국의 전 교회에 이 순수한 ‘그레고리오의 전례’, 곧 로마 전례의 의무를 재확인하였지만, 이 로마 전례가 그 기원과 순수성으로 말미암아 프랑코-게르만 회중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반대로 몇몇 축제들과 전통적인 예식들과 기도들을 풍성하게 만들 줄을 일찍부터 깨달아야 했다. 그래서 황제는 로마 미사 전례서에 부록(appendix)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여기에 일련의 지역 교회의 전례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이 증보 부록(supplementum)은 로마 미사 전례서와 혼합하거나 뒤섞지 말아야 했는데, 그러나 프랑코 제국의 교회들은 칼 대제의 법령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리고 프랑코 나라들에서 로마 전례의 혼합주의와, 계속해서 더 큰 전례적 무정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는 각각의 교회마다 자기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유익한 것을 다시 채택하는 고유한 텍스트와 예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8-10세기 프랑코-게르만 교회에서,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매우 대조되는 창조적 생명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찾아보게 된다. 프랑코-게르만 성사집 참조.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재임 동안(590-640) 사실 로마에서 전례적 새로움(창조성)의 뚜렷한 감소가 인정된다. 7-8세기에 이태리에 동방의 많은 이주자들이 유입해 들어오게 된다. 642-752년 사이 19명의 교황 중 7명의 동방 출신이 베드로좌에 등극한 만큼, 동방의 지배권이 교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곧, 로마 전례가 동방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이 두세기 동안 로마 전례에 받아들여진 동방의 영향을 말해 주는 사례들로는, 미사에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이 도입된 것, 성 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와 성모 축제들(천주의 모친, 성모 성탄, 주의 봉헌, 성모 영보)을 받아들인 것을 들 수 있다..
9세기에 로마의 상황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로마 전례를 인지하는 많은 분파들이 생겼다. 그래서 전례서를 준비하는 작업실까지 폐쇄하였으며, 전례 생활은 소멸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의 한 때에, 프랑코-게르만 전례는 로마와 전 세상을 위해 로마 전례를 구출하게 된다. 사실 오토 제국 시대(10세기 후반)에 혼합된 프랑코-로마 전례가 이태리와 로마로 되돌아오게 되며, 이것은 로마의 예배적 공백과 당시 로마의 쇠퇴로 인해 ‘영원의 도시’ 로마에 아주 쉽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래서 이 시대에 구성 편집된 라틴 전례는, 이 시대에 문헌으로 편집된 전례서로, 알퀴노(Alcuinus)가 ‘하드리안 성사집’(Sacramentarium Hadrianum)을 801-804년에 완성하였으며, 950년에 ‘로마-게르만 주교 예식서’(Pontificale romano- germanicum)가 편집되었다.
오늘날 일컫는 ‘서방 라틴 전례’가 되는데, 이 시대 이후로 순수한 로마 전례가 아니라 혼합된 것으로, ‘로마-프랑코 전례’ 또는 ‘로마-게르만 전례’가 된다. ‘로마의 것이지만, 또한 우리의 것’(Romana est, sed etiam nostra)이란 이 표현은, 하나의 새로운 관점과 하나의 새로운 감정이 현존함을 보여주는데, 프랑코-게르만 백성들의 기여로, 공생에서처럼 지금 먼저 본래의 로마 전례에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례 예식을 제외한 로마 전례의 다른 모든 성사와 준성사들은 프랑코-게르만 전례와의 접촉과 결합에 의한 흔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프랑코-게르만의 기여에 의한 유별난 특성과 관련해서 다음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곧, ①형식 원리들로서, 감정 풍부한 열정, 로마적인 절제성과 달리 서정적 느낌이 더 강한 표현, 어휘와 상징의 풍부함, 드라마틱한 행동의 강세 등이며, ②전례적 신학적 원리들로서는 전례 거행 동안 사적 기도의 증가, 죄와 잘못(변명)에 대한 매우 깊은 의식,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 중개자의 역할을 버려 둔 채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 삼위의 이름들을 펼치는 기도 도입 등이다.
공적인 이 전례서들로 인해, 새로운 느낌의 반향으로서 하나의 새로운 문학이 생겨나게 된다. 새로운 문학의 창조성의 증거로, 9세기 말의 찬미가 ‘오소서, 창조주여’(Veni Creator)와 10세기의 부속가 ‘빠스카 희생께 찬미드려라’(Victimae pascahli laudes)를 들 수 있다.
새로운 사고는 예술에서도 적절한 표현을 찾아보게 된다. 이 시대에 혼합된 전례에서 발생하는 것은 칼 대제 시대의 예술과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에 반영된다. 옛 로마 전례(단순성과 간결성과 균형과 미학적 표현)와 젊은 새 민족들의 활력(더 생명력 있고 서정적이며, 때때로 약간 무정부적인) 사이에 조화로운 합치를 이루어 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네스크 예술은, 정지성과 역동성, 횡적 노선과 종적 노선의 일치를 가져다주었으며, 긴장의 특수하고 충만한 아름다움을 낳는 창조적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활력은 위대한 로마 전통에 의해 계속 ‘자기 고향의 것’으로 남아 있다.
4) 예배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분리
이 시기에는 성사 거행에 있어 중요한 많은 변화들을 발견한다. 그 변화의 공통분모는 전례 행위로부터 회중이 점차적으로 멀어지는 것으로 설정되며, 결정적으로는 예배의 새로운 개념이 되어 버린다. 이 상황의 근본 요인은 ‘전례 언어’(lingua liturgiae)이다. 로마 전례는 프랑코-게르만 제국에 이식된 다음 전례 언어를 바꾸지 않았는데, 거기서도 라틴어가 학자들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언어는, 사회적으로 하위 계급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였고, 실천적으로는 성직자와 동일시되었다. 라틴어와 라틴 문화를 지각하는 우월성은, 로만스(프랑코 계열의 신라틴어) 또는 게르만의 지역 언어인 백성의 언어로 성서와 전례를 번역하는 일을 저지하였다. 만일 그 번역이 있었다면, 이 지역 언어들은 기록 언어로서 수준급에 도달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초기 중세에, 전례 행위에 사용되는 기록은 예외적으로 사제에게 유보된 텍스트이어야 한다는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곧, 라틴어가 전례적 신비를 둘러싸는 신성한 언어이며, 이로써 이 신비를 항상 더 회중으로부터 멀게 만든 것이다. 서유럽 라틴 민족들(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등) 사이에서 12-13세기에 이미 라틴어는 그들의 일상용어가 아니었으며, 오늘날 유럽 각국어의 고중세 언어에 해당되는 변형된 언어를 사용하였다.
유아 세례의 보편화
6세기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된다. 교회의 사목과 시민의 권리(형벌과 처벌)는, 유아 세례에 관한 이 실천을 공고히 하고 항상 더 협소한 의무적 특성을 이 실천에 적용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당연히 어른 예비자들이 차차 사라지게 되며, 예비자 교육은, 로마 전례에서 세례 예식의 한 부분으로 수세기 동안 실천했던 것이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예식들의 혼합물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교 입교 성사가, 전에는 전 공동체의 장엄하고 본질에 속하는 거행이었고, 전례 주년에서 중요한 날에 위치하였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는 빠스카 밤과 성령강림에 세례를 거행하였다. 몇몇의 교황은 성령강림절의 세례를 강조하였으나 이를 확산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점차 개인적이거나 가족적인 일거리로 바뀌게 된다. 신생아의 나약함은 병자들과 동등하게 취급되고, 그래서 높은 유아 사망률은, 전례시기와 무관하게 한해 중 아무 날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quam primum) 세례를 주도록 이끌었다.
참회의 성사
세례에 따른 옛 ‘참회자 교육’(institutio paenitentialis)은 재반복할 수 없고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을 띠고 있었었다. 공적 참회에 이름을 올리면, 이것은 자신의 고백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전 참회 행위의 ‘교회적 차원’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7세기 중에 하나의 새로운 참회 과정이 등장하는데, 이는 골롬바노회 수도자와 다른 아일랜드 수도자들의 노력의 결과로 잉글랜드 섬들에서 유럽 대륙으로 확대된 것이다. 사실 그 수도원들 안에는, 진정한 범죄인지 또는 순수하게 징계의 과실인지를 구별하는, ‘범죄 목록’이 정착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수도자들은 평신도들의 영적 상담자들이었으며, 자기 수도원의 ‘범죄 목록(속죄규정서)’에 유사한, 또한 신자들을 위한 목록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참회 체제의 본질적인 것은 각각의 죄에 일정한 희생을 대응시킨 것으로, 그 시대의 ‘참회의 책’ 안에 세심한 수치로 나타낸 것인데, 도난과 살인과 다른 범죄들에 의한 복합적인 벌칙 항목에 익숙한 사회에서 특별히 의미심장한 일종의 ‘상호이행’(do, ut des)인 것이다. 상호이행이란, ‘네가 주는 만큼 나도 준다’ 또는 ‘네가 주는 것을 나는 준다’(Do, ut des)는 원칙으로, 대등하고 공평한 조건 하에서 주고 받는 거래 행위를 말한다. 곧, 이 죄목에는 이 벌을, 저 죄목에는 저 벌을 부과한다는 식으로 지정된 목록을 이룬다.
단식으로 특히 이루어지는 희생은 참회의 ‘상환’(상쇄)를 허용하였다. 참회의 상환 혹 상쇄는 다른 희생으로 죄에 대한 벌을 대신하는 것으로, 예컨대, 한해 동안의 단식은 일정한 애긍과 함께 수도원이나 교회에 규정된 일정양의 미사로 상쇄될 수 있었다.
이 참회의 상환은 제3의 것들로도 이행될 수 있었는데, 이는 개별적이고 효과적인 희생을 제외하고 분명 남용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참회자에게 의무가 주어지는 유일한 행동은 ‘고백’이며, 이후 미래에 전 참회 과정을 다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 양상으로 모든 공동체적 차원의 참회는 그 의미가 상실된다. 새로운 체제와 옛 참회 훈련(징계)이 병행해서 이 시대에 발전하였으며, 비록 ‘고백’이 ‘참회 훈련’을 대신하였지만 더 이상 진보한 것은 아니었다. 참회의 성사처럼 어떤 성사도 이 시대에는 성사의 외적 형식에서나 그 정신에서나 그렇게 근본적인 진보를 갖지는 못했다.
사적 미사(사미사)의 발달
그러나 예배와 공동체 사이 분리의 가장 명백한 사례는 ‘사적 미사’(Missa privata)의 출현이다. 이는 사제가 혼자서 미사를 거행하였는데, 참석하는 집회 회중이나 사목적 필요성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이러한 형태로 개인 미사는 6-7세기에 출현하며, 8세기에는 일반화된다. 사적(개인) 미사가 생긴 것은 그 기원이 수도원에 있다. 이 시대에 수도원에는 수도 사제들이 지나치게 많았으며, 그들은 신심의 개인 행사처럼 미사를 드렸다.
성찬례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표현에 의해 주례자 사제(수도 사제 또는 재속 사제)의 예외적인 자산과 개인 신심의 훈련이 되었으며,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심한 변형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사실 7세기의 프랑코-게르만의 종교 심성은, 공동체적 가치를 손해로 여기는 사적 개인의 중요성(개인주의)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한편 예배는, 개인의 구원을 얻기 위해 방향 지워진 일련의 행위들로 이해되고 있었다. 예배 행위들의 증가는 이로 인한 당연한 결과로 구원을 위한 은총의 증가를 가져온다고 생각되었다. 또 미사는 그 은총을 갖기 위한 비교될 수 없는 해결책이며, 자신의 구원의 걱정을 위한 효과있는 구제조치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의 열성이나 개인적인 필요성에 의해, 또는 ‘참회의 미사’(Missae paenitentiales)을 대신하여 ‘신심 미사’(Missa votiva)가 증가된다. 또한 ‘미사 기금’(fundatio Missae)이 생겨나는데, 이로써 봉헌자는 다른 생애의 미래를 보증받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 현상은 모든 차원에서 눈에 띄는 결과들을 드러내 준다. 미사의 증가는 사제수의 증가와 직무자의 자기 이해의 본질적 변화를 낳게 되었다. 이 시대의 ‘사제’에 대한 개념은, 소위 ‘제대의 사람’(altarista)이라 일컬을 정도로 제대에서 오직 미사를 드리기 위한 직무자(미사드리는 기계)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도 사제들은 예물을 받은 미사로 대중 신심을 만족시켜 주었는데, 이것이 증가한 결과로 경제적으로 수도원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더 협의의 전례적 차원에서는 두가지 결과를 지적할 수 있다. 곧, ①교회 안에 제대들의 확산과 ②총체적인 ‘미사경본’(Missale)의 출현이 그것이다. 사적(개인) 미사의 출현으로 주례자는, 하나의 공동체적 거행에 할당된 전 독서, 응송과 노래, 기도 등을 혼자서 효과적으로 읊어야 했다. 이 두가지 사실 모두는 성찬례와 공동체와의 단절에 대한 예식적 해석을 말해 주는 것이다.
5) 그리스도교 예배의 구약성서적 모델
그리스도교의 상황은 사회 공공의 구조들 안에서 그리스도교 메세지의 현존과 투신으로 정의된다. 이런 관점에서 옛 계약(구약) 백성에 의해 제공되는 모델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 그들의 예배를 차별하고 신성시하는 매우 독특한 왕국과 함께, 그들이 백성과 나라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의 특수한 것이었다.
사제직, 구약성서적 해석 강해짐
실상 야만족들의 침략 이후, 새로운 민족들을 복음화하고 교화할 의향으로 주교들과 지역 공의회들은 구약의 경향에로 거슬러 올라갔다. 갈리아(불란서)의 아를르(Arles)의 체사리오(Cesarius, 470-542)와 5-6세기의 많은 문헌들, 특히 아일랜드와 스페인의 비시고틱의 문헌들은, 집단으로 세례받은 백성을 그리스도교화하기 위해 구약성서 안에서 모델과 규범들을 찾을 의향을 반영하고 있다. 당대의 중요한 입법가들 중의 하나인 시빌리야(Siviglia)의 성 이시돌(Isidorus, +636)는 “그리스도교 사제직의 다양한 위계가 모세의 예배 봉사직에 그 기원과 모델을 갖고 있다”는 사상을 전파하였으며, 그의 저술들이 이후 전 중세에서 전파되고 되풀이되었다.
이 새로운 관점은 사목적으로 가르쳐졌는데, 직접적으로 전례적 표현 분야 안에 드러났다. 아직 6세기에 교회가 성찬례의 초기 거행으로 축성되어 있었던 반면, 8세기에는 성수뿌림, 도유, 분향과 같이 구약성서에서 추론해 낸 복잡하고 화려한 예절이 위압하게 된다. 그 전까지 단지 안수로 이루어졌던 사제 서품은 이 세기에 와서 구약에서 착상을 받은 ‘손의 도유 예식’이 보태어진다. 구약에서 관련된 것으로 에제 28,41과 민수 3,3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사울왕과 다윗왕의 도유 모델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비시고틱과 갈리아(메로빙 왕조)에서는 전례 예식처럼 왕의 도유를 도입하였다. 관심이 되는 첫 예식은, 똘레도(Toledo)에서 672년의 왐바(Wamba)왕에게 도유한 것이다.
주일에 안식일 개념 도입
특히 우연한 것은 그리스도교 ‘주일’(dominica)을 규범화하는 가운데 유대화하는 사고를 갖게 된다. 북쪽에서 이주 민족들이 몰려온 결과로 교회는, 매우 급하게 불충분한 준비로, 집단으로 세례받은 사람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주교와 지역 공의회들은, 예배와 그리스도교 교리의 중심인 미사에 참여하도록 신자들에게 어디서나 허용하는 주일 휴식(파공)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의 입법은 그날 농사일을 금지하였으며, 그 정도가 사회적 정의의 요구처럼 근본적인 것으로 지향되었는데, 종들보다도 농토의 소유주에게 더 책임을 부여하였다. 이는 매우 분명하게 650년의 루앙(Rouen) 공의회가 지적하고 있는데, 주인들에게 의무를 부여하기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주일과 다른 축제일에, 짐승처럼 살아가는 들판이나 숲에서 일하는 소 키우는 이, 돼지 치는 이, 목동과 농민들을 최소한 미사에 보내라. 그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다. 주인들이 이 호소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이 종들의 부족함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J.D. Mansi, vol.10, col.1202.
하지만 주일 파공의 한가지 기초를 제공하는데 있어 유대화의 경향과 구약성서적 모델이 빈번하게 눈에 띈다. 유대교 안식일과 대조하는데 있어, 앞선 세기들처럼 주일의 기원을 강조하는 염려를 이제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어진다. ‘그와 반대되는’(e contra) 화제 내용이 ‘더 강한’(a fortiori) 것으로 전환되며, 유대 안식일의 성서적 규정으로서 주일의 규범을 강조하게 되는데, 아를르의 체사리오의 사상에서 유래한 개연성이 있다.
“불행한 유대인들이 대단한 공경심으로, 지상의 어떤 일도 수행하지 않는 것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을 지켰다면, 그만큼 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에 오직 하느님의 일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Cesarius, Sermo 73, 4: CC 103, p.308.
안식일적 규정들의 세심한 목록집은 이제 주일에 관한 입법에 적용되며, 당대의 ‘참회책’들은 그 경향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유대화하였다는 것은, 주일 파공의 위반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허가의 체제가 되게 하였다. (주일 휴식에 관한 이 체제는, 이날 파공을 지키지 않기 위해 청원해야 하고, 또 이것을 범했을 때의 신체적 처벌을 받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주일 파공을 위한 시간의 엄격한 사용에까지 의무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주일에 관한 가르침은, 레위 23,25의 ‘노예적 노동’과 같은 어휘들을 받아들여, 이 어휘들을 주님의 날 금지된 노동에 적용시키기 위해, 어원에 이르기까지 유대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3. 전례적-성사적 숙고
그레고리오 대교황(6세기말)과 11세기 말 사이로 이해되는 이 시대는, 신학 분야에서 고유하게 창조적이지는 못하였다. 구체적으로 서방에서 성사에 관한 성찰은, 성 아오스딩에 의해 윤곽이 잡힌 결정적인 자국 위에 머물러 있었다. 9세기에 요한 스콧트는 재판관인 가-디오니시오의 작품들을 번역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전례적-성사적 이해에 있어 중세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복음의 메세지와 신플라톤 사상의 조화를 이룬 가-디오니시오의 사상에 대해서는 앞의 3장 3의 2)을 참조할 것) 시간적으로 이 시대에 우리는 명백하게 다음의 세 가지 주제를 짚어야 할 것이다. 곧, 시빌리야의 이시돌의 신학적 설명들, 전례의 우유법(allegoria)들, 그리고 첫 성찬 논쟁들 등이다. 이 세 가지 문제들은 상호 연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1) 시빌리야 이시돌의 ‘어의론’(語義論, Etymologia)
성사의 개념에 대하여 스페인 저술가 이시돌은, 첫 자리에 ‘한가지 약속의 보증’처럼 어휘의 세속적 의미, 또 군사적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적용되는 법적 용어들을 모았다.(Isidorus, Etymologiarum V, 24,31; IX, 3,53: PL 82,206.547.) 그의 ‘어의론’ 제6권에서 ‘교회의 책들과 성무’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성사적 실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거행에서, ‘성사’(sacramentum)는, 구체적 의미에 따라 지향해야 하고 거룩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무엇을 실현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성사들은 세례, 견진, 주의 몸과 피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성사들’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외형 아래, 신성한 품격(virtus)이 이 성사들의 구원하는 힘(potestas)을 비밀스럽게 완성에로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들의 ‘비밀의’ 수용력(capacitas secreta) 때문에, 혹은 그것들의 ‘거룩한’(sacrum) 특성 때문에 여기에 그 이름의 기원이 있다. 교회의 심장부 안에 그것들의 행위는 결실을 가져다준다. 이는 교회 안에 성령이 현재하면서 비밀스럽게 이 성사들의 효과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이 성사들을 집행하는 사제들은 착하거나 나쁘기도 하다. 이는 성사들에 신비적으로(mysticamente)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 이는 사도들 시대에 가견적인 일들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성사들의 결실은, 성사를 집행하는 선한 사제의 보상들이 주된 것은 아니며, 나쁜 사제가 그것을 집행하기 때문에 미약한 것도 아니다. 이는 ‘누가 심고 물주고 한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1 고린 3,7. 때문이다. 이로 인해 희랍어로 ‘신비들’(mysterioi)이라 부르는데, 그 성사들의 활동이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Etymologiarum VI, 19,39-42: PL 82,255-256.)
앞선 세기들의 신학적 규명, 특히 성 아오스딩의 사상을 넘어서서, 이시돌의 표현에서, 회중으로부터 항상 더욱 성직자 중심적이고 분리된 예배를 지향하는 점진적인 과정 가운데, 성사들 안에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차원이 분명하고, 당대의 전례적 발전을 정당화하는 일관성을 나타내는 다른 노선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 이시돌의 매우 다른 어의론은 중세의 성사적 개념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행사하였지만, 아마도 그가 언급한 ‘최상의 은총’(bona gratia)의 개념으로, ‘성찬례’의 설명이 되지 않은 것은 없어 보인다.(Etymologiarum VI, 19,38: PL 82,255. “Panis et calicis sacramentum Graeci Eucharistiam dicunt quod latine bona gratia interpretatur.”)
그런 양상으로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 표현 안에 근본적인 변화가 작용하게 된다. 곧, ‘최상의 은총’(bona gratia)인 성찬례는, 그의 신학적-전례적 전 결과들과 함께 미사의 증가를 정당화하는 신학적 기준이 되게 된다.
2) 전례의 우유적 설명
종교들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비그리스도교 예배들은 빈번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설명되기를 거부되었지만, 반면 그리스도교 전례는, 몸됨(incarnatio)의 논리에 따라, 이 설명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미 4세기에 전례에 관한 설명들이 있었다. 곧, 그리스도교 입교의 예식들에 관한 ‘신비 교리교육’(cathechesis mystagogica)으로서, 부활 8부 동안 신영세자들을 위해 주교에 의해 완결되었다. 이 전례적 예식들은 행위나 말에 있어 특별한 설명이 없으며, 신영세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다만 후대에 더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설명(해설)이 제공되었다. (이 분야에서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예루살렘의 치릴로(Cyrillus),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의 테오도로(Theodorus)의 전례 교리교육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세가 시작될 때에 전통으로 전수된 전례적 형식들을 설명할 필요성이 발생하게 된다.(참조 : 카롤릭 왕조 시대(8세기 초-9세기 전반)의 성직자는, 이미 742년에 연중 전례 시험을 치루어 보증받아야 했던 전례를 자기 자신만이 이해해야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전 학문과 그리스도교 예배’(totius religionis studium et christianitatis cultum)를 또한 보여주어야 했었다.(J.A. 융만, Missarum solemnia, I,74 참조)
그리고 이것은, 그 형식들의 실재적 의미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예배의 외적 발전에서 새롭고 불가사의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대중이 모르는 언어로 편집된 텍스트들로 가득 채워 구분해 냄으로써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을 ‘우유적’(allegorici) 해석이라 하는데, 이 때부터 무한히 확산하게 된다. 이 비유의 진행은, 이미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신들의 옛 신화를 설명하기 위해 있었던 것인데, 그리스도교 사상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거룩한 텍스트들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에게 전례가 희미한 것이 되기 시작할 때 전례 안에 도입되곤 하였다.
전례적 비유를 처음으로 소개한 이들은 가-디오니시오와 시빌리야의 이시돌 자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비유적 설명은 알퀴노(Alcuinus)의 것이며, 특히 그의 제자인 메츠(Metz)의 아말라리오(Amalarius) 주교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눈에 띄는 상상과 창작으로 아말라리오는 전례에 속하는 것 모두(사람, 옷, 대상 등)를 우유적으로 설명하였다. 그의 주된 저술인 ‘교회 성무론’(De ecclesiasticis officiis)에서 이 비유의 다양한 형태들을 구별하고 있다.(참조 : 그의 저술에서는, 구약성서의 형상들의 완성을 보여주는 ‘형상적 비유’, 태도에 적용되는 ‘윤리적 비유’, 구원 역사의 사건들을 되살리는 ‘기념비적 비유’, 마지막 때를 향해 투영하는 ‘종말론적 비유’ 등을 들고 있다.)
아말라리오의 방법에 대한 비판들과 단죄에도 불구하고, 특히 미사에서의 비유는 후세기에 활보하였으며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처럼 전례의 공동체적 참여가 많이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3) 첫 성찬 논쟁들
앞선 천 년대에 세례 논쟁이 발달하였던 것처럼, 똑같이 다음 천 년대에는 성찬 논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9세기에 알려졌고 첫 표명들이 나타났었다. 출발점은, 미사의 다양한 예식들에 관한 메츠의 아말라리오의 상징적 또는 비유적 해석을 고려할 수 있겠다. 그는, 성체를 쪼갠 다음 그 세 개의 조각을 그리스도의 ‘세 형태의 몸’(corpus treforme)으로 보았다. 즉, 예수 개인의 몸, 교회의 살아 있는 구성원들, 세상을 떠난 신자들 등이다. 여기에 대해 리옹(Lyon)의 플로로(Florus)는, 비유적 해석을 생생하게 비판하면서 그것들의 신학적 중대함을 들어 반대하였다. 양쪽 다 서로들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praesentia sacramentalis)을 믿고는 있었으나, 상징주의자인 아말라리오는 이 현존을 과도하게 ‘질료화’(materializare)할 의도였던 반면, 그의 반대자인 반상징주의자 플로로는 ‘순수하게 실제적인 것’(virtualis)으로 전환시키기를 주장하였다.
같은 시대에 파스카시오 랏베르토(Pascasius Radbertus)는, 이후 코르비(Corby)의 아빠스가 되는데, 라바노 마우로(Rabanus Maurus)와 코르비의 수사 라트람노(Ratramno) 등 여러 동시대인들과 논쟁하였다. 토론의 대상은 성찬의 몸과 성모에게서 태어난 몸과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파스카시오는, 대단히 분명하지도 일관성도 없는 양상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확인하고 확산시켰다. 양쪽 전부 다 전통적 신앙임을 천명하였지만, 적절한 철학적 장치(논거)가 불충분하였으며,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을 이해하는 양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순수한 상징주의(symbolismus)와 가파르나움의 물리 중심적 사고(materialismus)(참조 : 요한 6,59-60 참조.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 가파르나움 사람들은 ‘물리적 또는 유물론적(신체적)인 사고’로 인해 결코 알아 들을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물리적(신체적) 현존(praesentia pysichalis)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사이를 동요하면서, 그들은 실재적이고 성사적 현존의 길을 찾으려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동일한 논쟁이 후세기들 가운데 또 다시 재현된다.
10세기에, 뚜르(Tours)의 베렌가리오(Berengarius)는, 랑프랑코(Lanfrnacus)와 그의 다른 동시대인들의 ‘실재론’(realismus)을 반대하였다. 그는 교부들의 교리, 특히 성 아오스딩의 성사에 대한 사상을 부흥시키길 원하였다. 베렌가리오는, 자신의 성찬 교리를 발전시키고 반대자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신학적 작업의 근본적 원칙으로 ‘변증법’(dialectica)을 사용하였다. 항상 정확하게 활용한 것은 아니지만 성 아오스딩의 확언을 기초로 두고, 성체 성사 안에서 상징과 표징을 본질적으로 식별해 냈다. 곧, 성찬례의 이 두 종류는 진정한 몸도 피도 아니라, 하나의 ‘표상’(figura-typus)이며 하나의 ‘모상’(similitudo-signum)이라는 것이다. 그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와, 그리스도 몸과 피의 질료적(sensualis) 현존을 자신 있게 거부하였다. 대신 그는, 축성하고 난 뒤의 빵은, 질료적이 아니라 신앙으로 인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베렌가리오는 많은 반대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베렌가리오와 같은 상징주의를 반대하여 실재적 현존을 방어해야 했다. 그러나 이 화제로 인해, 성사와 의미하는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애매하였으며 조금 밝혀 주었을 뿐이다. 대립하는 양쪽 모두, 교부학에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실재적 상징’(symbolum reale)의 옛 근본원리를 잊어 버렸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중세의 저술가들은 교부들의 어휘를 보존하였으나 매우 다른 양상으로 알아들었다. 카롤링 왕조 시대 이래 ‘상징’과 ‘실재’는 서로 서로 상반되는 두개의 개념으로 간주되었다. ‘상징’은, 다른 어떤 것을 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 한가지 낌새로 이해되었으며, ‘실재’는 꼭 집어낼 수 있는 것, 물리적인 것, 경험적인 것으로 고려되었다.
이것이 9-11세기의 성찬 논쟁에 관한 진정한 배경인 것이다. 1059년 로마 시노드의 ‘신앙고백문’(professio fidei)은, 베렌가리오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던 것인데, 그 개념들에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며, 이는 ‘감성주의자’(sensualista)들이 과도하게 주목하게 되고, 보나벤뚜라(Bonaventura)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비판받게 될 것이다.(참조 : 베렌가리오를 반대한 이 시노드는 다음 내용을 확인한다: “Ore et code profiteor panem et vinum quae in altari ponuntur, post consecrationem verum corpus et sanguinem Christi esse, et sensualiter, non solum sacramento, sed in veritate, manibus sacerdotum tractari, et frangi et fidelium dentibus atteri” J.D. Mansi, vol.19, col.900.)* |